전시명 : 조선시대 꽃그림-민화, 현대를 만나다
장 소 : 갤러리현대 신관, 본관, 두가헌
기 간 : 2018.7.4-2018.8.19
글 : 김진녕
-욕망의 직유화법 시대 개막을 알린 모란도
-왕실의 부귀영화와 근심없는 삶을 넘보는 열망
<조선시대 꽃그림-민화, 현대를 만나다>전(~8월19일)이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주최측에서 펴낸 도록에는 정조 연간에 활동했던 문인 강이천(姜彛天, 1769-1801)의 <한경사(漢京詞)> 중 광통교를 언급한 부분이 실려있다.
<한경사>는 18세기 후반 정조 시대 한양성의 풍속과 생활상을 연작 시 형태로 지은 작품이다. 영조와 정조 연간은 임진왜란 이후 세가 기울어가던 조선 후반부에 반짝 반등했던 시기로 상공업의 발달과 화폐 경제의 확산으로 인한 물질적 풍요와 서학 등 외부 문물의 유입, 중인 계급의 존재감이 커지는 등 새로운 기운이 움트던 시기였다.
강이천은 18세기 조선 문인화와 화원들의 평판을 좌지우지했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의 손자이다. 신체적 제약과 번뜩이는 문재,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짧은 생을 살다간 강이천은 106편의 7언 절구 속에 당시 한양의 풍속을 담아냈고 이중에는 광통교를 중심으로 세워진 ‘그림 시장’ 풍경도 담겼다.
한낮 광통교 기둥에 울긋불긋 그림을 걸었으니, 여러 폭 비단 그림으로 병풍을 만들었네.
근래 가장 많은 것은 도화서 화원의 솜씨로다. 많이들 좋아하는 속화는 산 듯이 묘하도다.
강이천의 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8세기 후반, 광통교에 그림 시장이 있었다는 것, 그 그림은 수묵화같은 게 아니라 컬러풀한 채색화고, 비단 그림 병풍이 보란 듯이 진열됐고, 도화서 화원이 그린 그림으로 추정되는 게 많이 눈에 띄고, 그때 광통교 그림 시장의 스테디셀러는 ‘속화(俗畫)’였고 이게 느낌이 생생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광통교에서 팔리는 속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1844년(헌종 10)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지은 풍물가사(風物歌辭)인 <漢陽歌>에는 조선의 왕도인 한양성(漢陽城)의 연혁·풍속·문물·제도·도국(都局) 및 왕실에서 능(陵)에 나들이하는 광경 등 여러 가지 당대 한양의 모습을 노래했다.
이중 광통교 아래의 풍경을 다룬 부분이 들어있다.
광통교(廣通橋) 아래 가게 각색 그림 걸렸구나
보기 좋은 병풍차(屛風次)에 백자도(百子圖) 요지연(瑤池宴)과
곽분양(郭汾陽) 행낙도(行樂圖)며 강남금능(江南金陵) 경직도(耕織圖)며
한가한 소상팔경(瀟湘八景) 산수(山水)도 기이하다
다락벽(壁) 계견사호(鷄犬獅虎) 장지문〔障子門〕 어약용문(魚躍龍門)
해학(海鶴) 반도(蟠桃) 십장생(十長生)과 벽장문차(壁欌門次) 매죽난국(梅竹蘭菊)
횡축(橫軸)을 볼작시면 구운몽(九雲夢) 성진(性眞)이가
팔선녀(八仙女) 희롱하여 투화성주(投花成珠) 하는 모양
주(周)나라 강태공(姜太公)이 궁팔십(窮八十) 노옹(老翁)으로
사립(紗笠)을 숙여 쓰고 곧은 낚시 물에 넣고
때 오기만 기다릴 제 주문왕(周文王) 착한 임금
어진 사람 얻으려고 손수 와서 보는 거동
한(漢)나라 상산사호(商山四皓) 갈건야복(葛巾野服) 도인(道人)모양
네 늙은이 바둑 둘 제 제세안민(濟世安民) 경영(經營)일다
남양(南陽)의 제갈공명(諸葛孔明) 초당(草堂)에 잠을 겨워
형익도(荊益圖) 걸어 놓고 평생을 아자지(我自知)라
한 소열(漢昭烈) 유황숙(劉皇叔)이 삼고초려(三顧草廬) 하는 모양
진처사(晋處士) 도연명(陶淵明)은 오두미(五斗米) 마다 하고
팽택령(彭澤令) 하직하고 무고송이(撫孤松而) 반환(盤桓)이라
당학사(唐學士) 이태백(李太白)은 주사청루(酒肆靑樓) 취하여서
천자호래(天子呼來) 불상선(不上船)을 역력히 그렸으며
문에 붙일 신장(神將)들과 모대(帽帶)한 문비(門裨)들을
진채(眞彩)먹여 그렸으니 화려하기 측량없다
노랫말이 속화의 주제로 쓰이는 화제를 이어붙여 만든 듯이 보인다. 여기에 쓰인 유황숙의 삼고초려나 네 늙은이의 바둑, 요지연도, 백자도 등은 모두 인기있는 풍속화로 거의 대부분 국립중앙박물관 등 여러 박물관에 이런 주제의 조선 후기 풍속화가 소장돼 있다.
특히나 ‘다락벽(壁) 계견사호(鷄犬獅虎) 장지문〔障子門〕 어약용문(魚躍龍門) 해학(海鶴) 반도(蟠桃) 십장생(十長生)과 벽장문차(壁欌門次) 매죽난국(梅竹蘭菊)’은 거의 모든 민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이 노래를 보면 광통교 그림 시장에서 꽃그림도 꽤 인기있는 아이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모란이 18세기 중반 광통교 그림 시장에서 인기있는 ‘단독 아이템’이었는지는 단언할 수가 없다. 왠만한 속화의 화제는 다 끼워넣어서 노래했지만 모란 자체를 독립적인 아이템으로 들먹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란 그림은 고려시대부터 귀한 대접을 받았다.
송대 주돈이(周敦頤)가 <애련설(愛蓮說)>에서 ‘모란은 부귀’에 해당한다고 정의한 뒤부터 모란의 꽃말은 ‘부귀영화’가 됐고 ‘모든 꽃의 왕(百花王)’이란 말에서 보듯 모란 꽃 그림은 발톱 세 개짜리 용 그림처럼 왕을 상징하는 귀물로 대접받았다.
오래된 그림 중 모란이 그려진 그림을 꼽아보자면 절집에서 쓰인 <감로도>에 그려진 모란 화병을 들 수 있다. 일본인 에지마 고도가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16세기 감로도(증 7551)에는 불단에 하얗고 빨간 모란이 풍성하게 꼽힌 화병이 올라가 있다. 연대가 확실한 것으로는 역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 1649년 작 <감로도>(신수2743)를 꼽을 수 있다. 이 역시 불단에 화려한 모란 화병이 올려져 있다. 중생이 부처에게 올리는 공양물 중 최대한의 화려함을 상징하는 꽃이 바로 모란인 것이다.
감로도 부분. 1649. 국립중앙박물관 (신수 2743)
조선시대 궁중행사에서 모란도 병풍을 사용했다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1627년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에서 보인다. 왕실의 경사와 상사에 모란 병풍을 썼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지금처럼 ‘상사(장례식)에는 국화’라는 규칙은 20세기에 생긴 것이다.
왕실 전용이던 모란 그림이 궁궐 밖으로 폭발적으로 보급된 것은 19세기부터로 보는 시각이 다수다.
물자도 귀하고 노골적인 욕망의 전시를 낮춰보던 조선에서는 화려하고 장식적인 기물을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제한된 계층에서만 가능했다. 그러던 것이 조선의 시스템이 작동불능상태로 접어드는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이런 터부가 깨진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왕실에서나 쓰이던 모란도가 민간에서 여러 형태로 제작되어 보급됐고, 그릇이나 베개 등 일상 기물에 금시발복을 바라는 ‘수복(壽福)’을 새긴 기물이 큰 인기를 끈다. 청화 백자 바깥에 복자나 수자를 사방 연속 무늬처럼 박아넣은 그릇은 조선 전기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세계였다. 지금으로 치면 돈을 바라는 심정에서 ‘돈’자를 사방 연속 무늬로 그릇에 새겨넣은 격이다. 조선이 그런 시대가 됐다.
모란 그림과 수복 무늬 청화백자는 19세기 조선 사람들의 바뀐 가치관, 바뀌고 있는 시대 분위기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기물인 것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조선시대 꽃그림"인 만큼 모란 그림만 나온 것은 아니다.
낙도, 19세기말-20세기 초, 8첩 병풍, 종이에 채색, 각 91x38cm
19세기 말 또는 20세기 전반에 그려진 대담한 맨드라미 그림은 모란도 병풍에서 보여준 구도의 변형이라는 점에서, 안경쓴 호랑이와 솟구치는 잉어 그림(낙도)은 시대에 맞추어 조금씩 변해가며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내는 민화의 끈질긴 생명력과 에너지를 보여준다.
이번 전시의 장점은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민화 명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괴석 묘사를 의인화한 <모란괴석도> 6폭 병풍(18세기 후반, 온양민속박물관 소장품)과 절집의 꽃살 무늬 문틀을 연상시키는 <모란화병도>(19세기, 온양민속박물관 소장품), 십장생도와 포도도 등 화조영모도의 모든 화제를 민화풍으로 담아낸 <화조도>(19세기, 가회민화박물관), 채용신의 화조도 병풍만큼이나 만개한 기량을 보여주는 20세기 초반의 작자 미상 <화조도>(OCI 미술관 소장품) 4첩 병풍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괴석 묘사를 의인화한 <모란괴석도> 6폭 병풍(18세기 후반, 온양민속박물관 소장품)과 절집의 꽃살 무늬 문틀을 연상시키는 <모란화병도>(19세기, 온양민속박물관 소장품), 십장생도와 포도도 등 화조영모도의 모든 화제를 민화풍으로 담아낸 <화조도>(19세기, 가회민화박물관), 채용신의 화조도 병풍만큼이나 만개한 기량을 보여주는 20세기 초반의 작자 미상 <화조도>(OCI 미술관 소장품) 4첩 병풍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연화모란도 19세기 축 1점, 종이에 채색 100.8 x 57.3cm
무엇보다도 속화에 ‘민화’라는 이름을 붙여 한국과 일본 양국에 조선의 도자와 그림이 가진 가치를 재인식시킨 야나기 무네요시가 수집한 두 점의 민화를 볼 수 있다는 것도 기록해 둘만하다. <연화모란도>(19세기, 일본 민예관 소장품)와 <화병도>(19세기, 일본 민예관 소장품)가 그것이다. 특히 <연화모란도>에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 운동에 참여했던 버나드 리치가 제작한 족자봉이 끼어있어서 20세기 초반 동아시아 문화 운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화조도, 17-18세기, 8점, 종이에 채색, 각 92x41cm
이번 전시에 별안간 나타난 ‘17세기 화조도’ 8점도 화제라면 화제다. 주최측은 이 작품의 연대를 17세기까지 올려잡고 있다. 이 작품은 한반도에서 17세기에 만들어진 그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선과 생생한 색감을 자랑하고 있다. 김홍도(1745~1806)가 그린 8폭 화조도 병풍(덕수 2500)은 1910년에 이왕가에서 사들인 작품으로 나름 100년 이상 한반도에서 최상급의 관리를 받아온 작품이지만 이번 전시에 등장한 ‘17세기 화조도’의 생생한 색감에는 비길 수 없을 정도다.
김홍도의 8폭 화조도 병풍 부분. 국립중앙박물관 (덕수 2500)
이제 ‘주장’이 나왔으니 학계에서는 검증을 하면 될 것이고 관람객은 구경을 하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