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칸의 제국 몽골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기 간 : 2018.05.16-2018.07.17
글/김진녕
초원을 제패한 뒤 남하했던 흉노부터 돌궐, 몽골까지 제국의 역사
한반도의 역사와 병렬해서 보는 동아시아의 역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칸의 제국 몽골>전이 열리고 있다.
몽골 과학아카데미 역사학고고학 연구소, 몽골국립박물관, 복드 한 궁전박물관과 공동으로 한몽 공동학술조사 20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전시다. 지금의 몽골 강역을 바탕으로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몽골 초원에서 일어났다 사라져간 여러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대표하는 536점의 문화재가 선보이고 있다.
특히 몽골에서는 16점의 국보를 이번 전시에 보내주는 성의를 보였다. 관심을 모았던 녹색 타라보살상은 애초 전시 라인업에는 있었지만 몽골 내부의 반대로 전시가 성사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대신 녹색 타라보살의 사진이 몽골의 불교 문화를 소개하는 섹션에 걸렸다.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제국의 여명에서는 선사시대부터 청동기까지 몽골 지역의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몽골에서 인류의 거주 흔적이 발견된 것은 적어도 80만 년 전. 이후 초원 지역 거주자의 일상을 지배했던 유목과 사냥이라는 문화가 반영된 동물 문양 토기나 산양모양의 장식이 들어간 칼자루 등 청동기 유물과 사슴돌 탁본 등이 전시되고 있다.
맹수조각머리띠, 초기철기시대(기원전 5~3세기).
영양, 사슴, 말 등의 장식물, 초기 철기 시대. 초원 사람들이 열망했던 대상이다.
산양 모양 칼자루 끝장식, 초기 철기시대(BC 7~3세기). 국립몽골박물관 소장품.
한반도 지역의 공동체와 직간접적 교류 흔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제2부 부터다. 2부의 제목은 ‘고대 유목 제국’이고 흉노와 돌궐을 다루고 있다. 우리 역사서나 중국쪽 역사서에도 등장하는 이름이다.
기원전 3세기에 몽골 지역에 최초로 국가를 세운 부족은 흉노(匈奴). 이어 선비(鮮卑)와 유연(柔然)이 등장한다. 이어 6세기에 돌궐(突厥)이 등장하고 8세기에 위구르, 10세기에 거란이 등장한다. 흉노가 활동하던 시기에 한반도에는 고조선, 돌궐이 활동할 때는 삼국시대, 거란의 건국 전후로는 고려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다.
흉노시대(BC 1세기~AD 1세기) 지배층 무덤 장식용 직물. 시리아 원산지.
이 섹션에서는 몽골 초원에서 흥망했던 여러 국가 중 흉노와 돌궐 유물만이 전시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국립중앙박물관쪽에선 ‘여러 유목 국가 가운데 흉노 제국과 돌궐 제국의 유적이 최근 활발하게 조사되어 많은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특히 몽골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금제 꽃모양 장식’이나 ‘금제 허리띠’, 빌게 카간의 제사 유적지에서 발굴된 ‘금제 주전자와 금잔’, ‘카간의 금관’, ‘금제 장신구’, ‘은제 사슴상’ 등은 모두 초원에 세워진 유목 제국의 영화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공통점은 모두 8세기 돌궐 시대의 유물이라는 점, 또 몽골 국보로 몽골국립박물관 소장품이라는 점이다.
제3부의 주제는 ‘몽골 제국과 칭기스 칸의 후예들’이다. 정복 왕조의 대명사답게 전투에 쓰인 말갖춤이나 갑옷, 무기류, 한반도에 영향을 끼친 티벳 불교풍의 종교 유물이 선보이고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했던 제국이 13~14세기의 몽골 제국이다. 동아시아의 태평양 연안에서 지중해와 맞닿은 중부유럽과 시베리아, 인도양 연안의 남아시아까지 초거대 제국을 건설했다. 통신이나 이동 수단, 의료 수준이 현대와 같지 않았던 중세에 이런 규모의 영토를 확보한 제국을 건설했다는 것 자체가 미스테리인 제국이다. 비록 영속 기간이 짧기는 했지만.
몽골과 한반도의 관계를 놓고 보면 가장 논쟁적이고 직접적이고 ‘뜨거운’ 교류를 했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이다.
파라오 모양 가면(13~14세기). 카라코룸 출토
1231년부터 1259년까지 한반도에서 28년간 여몽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전란이 잦았던 기원 후 한반도의 역사에서도 가장 최악의 전쟁으로 꼽히는 전쟁이다. 7년 전쟁으로 불리는 임진왜란은 실상 중간의 휴전기를 감안하면 1년 정도의 전쟁이었다. 병자호란 역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다 합쳐도 실제 전쟁 기간은 불과 4개월이었다. 그런데 여몽전쟁은 28년의 기간 중 전투 기간만 무려 11년이었다.
원대 자조요 생산 추정 청자 철화 칠보 넝쿨무늬 대야. 개성 출토품
마두금(모링 호르), 19~20세기
몽어노걸대. 조선시대 몽골어 회화 교재.
그리고 전쟁이 끝난 1259년(고종 46년)부터 1356년(공민왕 5년)까지 근 100년 간의 ‘원 간섭기’가 펼쳐졌다. 원 간섭기에 고려 왕은 원나라 왕의 사위가 되야했고, 왕자는 원의 수도로 사실상 볼모로 머물러야 했다. 원의 ‘간섭기’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제주도의 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원 간섭기에 제주도에는 원의 군대를 위한 말 목장이 세워졌고, 이를 관리 감독하기 위해 원의 관리가 파견돼 이 기간에 제주도 인구가 1만명 대에서 3만 명대로 늘어났다. 언어학자들은 지금도 제주도 사투리에 남아있는 단어나 성조에서 몽골 말의 흔적을 찾아내고 있다. 우리나라 전체를 놓고 봐도 음식문화나 복식같은 기층문화부터 라마 불교나 정치제도, 학문의 유입같은 데서 엄청난 몽골의 영향을 받았다.
우리 사회가 1945년에 끝난 일제 식민지의 후유증으로 아직도 내부 갈등을 겪고 있고 36년 간의 왜정 기간 동안에 생활 문화나 언어 생활, 지배 계층의 구조변화까지 엄청나게 큰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그 영향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일제의 식민지배는 36년이었다. 반면 원의 간섭기는 97년이고 여몽전쟁기까지 더하면 일제 식민지배 기간보다 3배가 넘는다. 이 지배기간 중 고려 지배계급 최상층부는 모두 원 황실의 사위가 되고 원나라 거주 경험을 했다. 고려시대 사람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는 기간이었을 것이다.
‘일제 36년’과 ‘몽골 간섭 100년’ 중 지금 한반도 거주자에게 더 생생한 아픔을 전해주는 것은 36년의 기억이다. 몽골의 지배와 영향은 근 1000년 전의 일이고, 과거 몽골의 국토의 반 이상을 잃어버린 현재의 몽골과 지금의 대한민국의 국력 차이는 고려시대와 역전되어 있다.
무엇보다 천년이라는 시간의 퇴적층은 한국인 관람자에게도 감정적인 동요보다는 동아시아 역사의 교류사에 대한 차분한 응시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원의 간섭기를 통해 한반도로 유입된 몽골의 식문화나 종교 등은 한반도에 토착화하면서 또 다른 자양분으로 작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왜정 시대에 일본을 통해 서양 문화가 들어왔던 것처럼 고려 시대와 고조선, 흉노 시대엔 초원의 길을 따라 들어온 금은세공품 유물이나 지중해 연안의 조각 양식이 산사의 절집 탑면에 박혀 있다.
<칸의 제국 몽골>전은 아시아 대륙의 일부이자 해양 세력과 대륙 세력의 교차점인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의미와 동아시아의 문명 교류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역사의 거울로 기능한다. 전시장 들머리엔 한반도의 왕조 연표와 몽골 지역에 흥망했던 왕조의 연표를 나란히 붙여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