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세 부처의 모임-상주 용흥사 괘불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불교회화실
기 간 : 2018. 05. 04-2018.10.28.
글/ 김진녕
- 고려불화 못지않은 생생함과 화려함
- 코큰 남자만 모신 나한전의 계보
해마다 5월이 오면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괘불이 걸린다.
올해는 상주 용흥사 괘불이 걸렸다.
부처의 머리 뒤에서 쏟아져 나오는 선명하고 영롱한 일곱줄기 후광은 20세기 후반에 조성된 괘불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훌륭하다. 같은 해(1684년)에 조성된 영주 부석사 괘불(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보존 상태와 비교하면 너무나 대조적이다. 화려한 무늬나 생생하고 세련된 색감 구사는 조선조 불화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게 만들 정도다.
1684년 5월, 상주 연악산 용흥사에 조성된 괘불은 세로 10미터가 넘는 대형 괘불이다.
괘불을 그린 이는 수화승 인규를 비롯해 종직, 취감, 선즙, 광일 등 다섯 화승이다. 이 작업의 총감독격인 증명(證明)은 소영당 신경 스님이 맡았다. 신경은 같은해에 이뤄진 영주 부석사 괘불 조성 작업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예연구사 김아름은 “용흥사 괘불의 가장 큰 특징은 세 부처를 한자리에 모신 괘불이 많지 않은데다, 300년이 지난 세월동안 부분적으로 보수한 적은 있지만 크게 손대지 않았음에도 화사한 색채와 다채로운 문양, 금박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는 점이다. 불교의 세계를 상징하는 연꽃이나 상상 속의 꽃인 보상화와 국화 등 다양한 꽃과 넝쿨, 상서로운 구름, 기하학적인 문양이 화면 가득 아름답게 표현돼 있다”고 밝혔다.
또다른 특징은 석가모니불과 약사불, 아미타불이 한자리에 모였다는 것이다. 물론 주존불은 석가모니다. 광배에서 쏟아져나오는 일곱줄기의 빛은 신성한 자리임을 한껏 강조하고 있다. 민중에게 질병을 치료하는 존재로 인식되는 약사불과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아미타불은 현생의 질병과 욕망에 고통받고 있는 중생에게 등불과도 같은 존재다. 이 세 부처를 중심으로 모두 38가지의 캐릭터가 화면을 가득채우고 있다.
특히나 화면의 네쪽 귀에 배치된 사천왕상은 화려함의 끝판왕이다.
화면 앞쪽에 전진 배치된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남방증장천왕과 동방 지국천왕은 전신이 드러난만큼 그 화려한 자태를 공들여 묘사하고 있다.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은 유려하게 흘러내리는 여러 겹의 옷자락에 화려한 보관을 쓰고 있지만 맨발이다. 반면 사천왕 중 앞쪽에 배치된 남방증장천왕과 동방 지국천왕은 현대의 패션왕이라고 불러될 정도로 화려하다. 특히 구두는 발등에 꽃술을 달고 앞쪽이 들리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밑창에도 장식적인 효과를 주고 있어 현대의 고가사치품 매장에서 팔리는 구두보다 더 패셔너블해 보인다. 옷자락 아래 드러난 사천왕의 맨살도 그대로 처리하지 않고 화려한 무늬의 피부에 밀착하는 옷을 입혔다. 문신이라기 보다는 무늬가 들어있는 스타킹에 가깝다. 그시절에도 스판덱스 소재가 있었는지 의심될 정도다.
화려함과 장업함에 공을 들였지만 유머를 잃은 것도 아니다.
왼쪽 하단의 사천왕(남방증장천왕)은 오른손에 용을, 왼손에 여의주를 들고 용을 희롱하고 있다. 사천왕의 오른팔목에 휘감긴 용은 미꾸라지만한 사이즈다. 사천왕의 위엄과 힘에 눌린 용은 그의 왼손에 쥔 여의주를 쳐다보며 사천왕의 처분만 기다리는 애절한 상황이라 미소를 짓게 만든다.
이번 전시에 용흥사 괘불과 함께 상경한 두 점의 나한상도 눈길을 끈다.
코뿌리부터 급격히 치솟아 매부리 코 형상을 하고 있고 눈썹 라인보다 귓바퀴가 위로 올라가 있어고 귀는 과장적으로 길게 묘사돼 있다. 코에 분필을 넣은 듯 오똑한 코는 보물로 지정된 작품을 만든 17세기 조각승 영철의 시왕상에도 보이지만 그는 매부리코를 만들 정도로 높은 코에 집착하지는 않았다.
이건 누가 만든 것일까. 국립중앙박물관의 양희정 학예사는 “용흥사 나한전의 <목조석가불좌상>과 나한상은 17세기 후반의 조각승 탁밀의 불상제작방식과 아주 유사하다”고 밝혔다. 탁밀의 활동 말기 또는 탁밀파의 18세기 초반 제작 작품이라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용흥사 나한전에는 애초 상주 용흥사 극락보전에 모셔진 <목조아미타삼존상>(1647년작 추정)의 조각승 승일이 만든 작품이 있다고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보다 후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조각승 탁밀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석가불좌상>과 나한상으로 교체됐다는 점이다. 용흥사에는 1665년에 승일이 제작한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 등 29구의 작품이 있었는데 대구 서봉사 명부전으로 옮겨졌다. 탁밀은 승일과는 다른 유파의 조각승이다.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17세기는 절집에서 일감이 쏟아지던 시기였다. 전쟁으로 파괴된 절에서 새로이 불상과 탱화를 조성한 것이다. 송은석 동국대 교수는 이 시기에 활동했던 조각승 유파를 다섯 유파로 정리했다. 현진‧청헌파, 응원‧인균파, 수연파, 법령파, 무염파 등이다.
현진‧청헌파는 현진에서 시작하여 청헌을 거쳐 승일, 응혜, 희장으로 이어진 17세기에 가장 먼저 성립한 유파이다.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유파이기도 하며 경상북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경상, 전라, 충청 등에서 두루 활동하였다.
탁밀은 승일이 속한 현진‧청헌파가 아닌 무염파의 계보에 닿아있다. 불교미술사학자 최선일은 “단응‧탁밀의 조각승 계보는 무염(1634~1656)→계훈(1654~1656)→단응(1650~1692)·탁밀(1665~1714)·법청(1665~1684)→탁린(1674~1716)·정행(1715~1738)·혜주(1703~1730) 등으로 이어진다”고 분류하고 있다.
17세기에서 18세기로 이어지는 불교 미술 시장의 중흥기에 활동한 화승과 조각승의 활동 무대를 더듬어보는 것도 이번 용흥사 괘불전이 주는 또다른 재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