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신여성 도착하다The Arrival of New Women
장 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기 간 : 2017. 12. 21.-2018. 4. 1.
글/ 조은정(미술사, 미술비평)
전시장 문을 열고 들어서면 멀리서부터 울리는 축음기 소리가 작지만 강하게 공간을 채운다. 내게는 어린시절 “춤추면서도 칼을 막아낸다”며 아름다운 무희에 대한 전설 같은 이야기를 전해주시던 어머니의 추억이 묻어 있는 추억의 멜로디다. “~ 저녁 종소리 들려오면/세레나델 부르면서/사랑을 속삭이러/님 오길 기다리는/이태리 정원 어서 와 주셔요.” 재즈 싱어 빌리 코튼의 노래의 남성 세레나데를 여성의 세레나데로 변화시킨 노래, 목소리 주인공은 바로 최승희이다. 오래된 도너츠판이 돌며 나는 잡음을 제거하고 맑은 소리로 재생하였으니, 전시에 들인 공이 얼마나 세부에까지 이르는지 알 수 있다.
2017년부터 역으로 결국 1920년에 이르게 하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 2충에서 시작하는 전시는 신여성이라는 언어가 사용된 근대와 현대작품까지 ‘여성’을 단서로 시공간을 오간다. 검고 두툼한 종이 위에 얹혀져 있던 앨범 속 흑백사진에서 찬란하던 어머니의 미소처럼 전시는 아련한 시간의 추억을 소환하고 식민지와 전쟁의 공간에서 휘몰아쳤을 그녀들의 운명에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근대 그대로의 언어를 가져와 시간을 확인시키는 전시는 ‘1부 신여성 언파레드, 2부 내가 그림이요 그림이 내가 되어: 근대 여성미술가들, 3부 그녀가 그들의 운명이다:5인의 신여성’으로 전체 전시장은 3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신여성 언파레-드
‘온 퍼레이드(on parade)’의 근대적 표기인 ‘언파레-드’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전시장은 근대 여성의 일상을 다룬다. 붉은 양산을 쓰고 걸어가는 여성의 뒷모습이 그려진 김주경의 도시풍경, 그의 상대편 유리 벽장 안에 붉은 비단양산과 구두 그리고 그녀들의 나들이를 찍은 사진이 걸린 공간이 교묘히 조합되어 보인다. ‘생활사로 접근한 근대여성’이라고나 할까.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벽면에 도열한 잡지들은 근대기 여성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세련되거나 음전하거나 발랄한 그녀들은 근대 여성들의 ‘이미지’ 형성과정을 노출한다. 여성의 직업과 신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김인승, 이유태 등의 ‘여성 그림’들과 익명의 여성 사진들이 근대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김주경 <북악산을 배경으로 한 풍경> 1929, 캔버스에 유채, 97.5x130, 국립현대미술관
이유태, <인물일대 탐구> 1944, 종이에 채색, 212x153cm, 국립현대미술관
<반도의 봄>과 같은 영화 속 여인들의 모습도 모습이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안석주의 여성들에 대한 만평을 디지털화하여 영상으로 만든 것이었다. 당시 언어 그대로 읽어내려가는 현대 여성 아나운서의 나레이션을 들으며 여성들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근대 남성의 시선을 마주한다. 안석주의 화면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거의 벌거벗은 듯이 간략한 옷을 입은 여성들이나 지나친 치레를 하는 여성의 모습은 여성 스스로의 자신에 대한 평가를 반영한 결과라는 점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지만 그녀보다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한 때문임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안석주 <모-던 껄의 장신운동> 조선일보
사실 전시장을 다 돌아보고 난 뒤에 느끼는 불편함의 진실을 1부에서 맞닥뜨린다. 그것은 남성의 눈과 관념에 의해 소비되는 여성 이미지와의 대면이다. 신기로운 볼거리로 전락한 신여성의 모습은 잡지가 발간되어 표지에 비쳐졌을 때인 그 시절이나 신문 만평의 한 자락을 차지하고 독자를 낄낄거리게 하였던 그때나, 지금과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조금이라도 이렇게 보여졌구나 라는 생각의 틈을 벌렸다면 그것은 이 전시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이다.
근대 여성 미술가들
여성미술가의 탄생과 그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는 섹션이다. 기예의 일부로 익힌 미술, 특히 기생들의 묵란도가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단 석 점의 묵란에서도 작가에 따라 뛰어난 기량과 품위, 넘치는 화사함 등을 드러낸다. 어쩌면 단기간 속성으로 자신의 내면에 있는 예술혼을 끄집어내어 터뜨릴 수 있는 조건이 기생들에게 부여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근대기 여성에게 부여된 테두리 안에서, 기생 그녀들도 예외는 아니었으나 춤과 노래, 연주 그리고 그림이라는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성집단이 있었음은 상기할 일이다. 물론 근대기 사군자를 ‘앉은그림’이라고 폄훼한 이유는 기생들의 기예 일부였던 때문이었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난초는 욕망, 자신의 드러냄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화사한 그림 앞에서 잠시나마 피었던 특별한 여성들의 재능을 기억할 일이다.
정찬영 <공작> 1937, 비단에 채색(4폭 병풍), 173.3x250cm, 유족
가장 화려한 새인 공작이 활짝 핀 꽁지를 그녀만큼 잘 그린 이도 드물 것이다. 정찬영의 그림들은 화학도가 양가집의 주부로 어머니로 지나며 작업시간이 현저히 줄고 결국 화가보다는 훌륭한 어머니로 생을 마친 근대 여성화가들의 일반을 보여주는 것 같다. 딸을 데리고 산책하는 배정례의 작품을 볼 때마다 자신의 정원을 거닌 인상주의 여성화가들이 생각나곤 했다. 아름다운 꽃처럼 아름다운 그녀들의 한정적인 공간은 그녀들이 돌파할 수 없었던 시대의 굴레를 보여준다.
나혜석 <자화상> 1928추정, 캔버스에 유채, 88x75cm,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나혜석, 박래경, 천경자 등 여성화가들에 대한 조명은 동경유학이라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여자미술학교에서의 교육과 그들의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조명되고 있다. 나상윤, 이갑경 등의 작품과 근대 여성에게 미술이라는 영역으로 교육된 자수를 보여준다. 여성의 미술영역인 자수가 미술의 영역에서 홀대받으며 작가로 성장할 기반을 잃은 것을 기억하게 한다.
무엇보다 이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것은 여성 미술사연표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전시가 기록되고 작가가 태어나고 죽는다. 길지 않은 그 연표가 의미하는 것은 <게릴라걸스의 서양미술사>에 비척할 일이다. 이런 식으로 정리된 적이 없었던 그 연표는 미술사에서 봉인된 여성화가의 이름을 현재로 소환하는 것이다.
5인의 신여성들
나혜석, 최승희는 <한국미술100년전>에도 등장했던 여성 문화인이다. 미술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최승희는 당대를 풍미한 예술가로서, 또 그 시각적 자료의 풍부함으로 여성을 주제로 한 전시에서는 주요한 자원이어 왔다. 미술에 한정된 주제가 아닌 만큼 자유로이 인물들이 선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수 이난영과 문학가 김명순 그리고 피아니스트이자 혁명가였던 주세죽 등 5인을 하나의 섹션으로 구성하였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여성을 기억하는 방식은 현대여성의 영상작업이나 다큐멘터리와 함께 보여진다. 실재했던 이 여성들에 대한 오마주는 현대 여성의 삶과 중첩되어 과잉이미지로 나타난다. 과잉, 그 이유를 문득 깨닫는다. 싸움에서 이기려면 제스처를 크게 해야 하는 것이 일차 전략이다. 그 제스처는 아직도 과거 혹은 근대, 신여성이라는 그녀들의 운명을 넘어서지 못한 현대여성의 자화상이 그곳에 있는 것이다.
전시에서는 흥미로운 관심의 대상 ‘신여성’이 ‘보여지고’ 있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현대여성작가들이 대변하는 작품 안에서만 주체적인 화자가 되고 있다. 그래서 한 공간에서 전시장의 내용을 구분하는 미닫이문의 상징들 앞에서 위로받는다. 열려진 문틈을 지나며 우리는 그녀들의 세계로 초대받은 것이지 결코 훔쳐보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안심의 사인을 받아든 때문이다.
100여 년 전 그녀들은 엄마, 엄마의 엄마였다. 깨끼바느질에 곱게 다듬은 모시적삼 차려입은 할머니의 젊은 날 사진은 마치 흑백영화 속 세계처럼 허구의 어떤 공간처럼 보였다. 머나먼 공간 저 멀리 어느 곳에 있었던 그녀들이 실재임을 확인시켜 준 것, 그것이 이 전시의 가장 큰 의미일 것이다. 그곳에 그녀들이 있었고 그리고 그녀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라는 존재가 가능함을, 그녀들의 대담한 도전이 우리 일상의 원천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시각’에서 차려낸 멋진 전시장에 대한 환상이 자꾸 뒤통수를 잡아끌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