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오원배
장 소 : OCI 미술관
기 간 : 2017년 11월 2일~2017년 12월 23일
글/김진녕
OCI미술관에서 오원배 작가의 17번째 개인전(~12월23일)이 열리고 있다.
미술관 현장에서 제작한 가로 길이 32미터의 대작을 포함한 평면 작품 11점과 드로잉 37점이 나왔다. 마침 그의 초기작인 1987년 작 <무제>가 국립현대미술관의 <균열>전(~2018년 4월29일)에 출품돼 있기도 하다. 1987년 작은 그가 프랑스 유학 뒤 귀국한 무렵에 나온 작품이다.
그때의 청년 작가는 30년이 흐른 지금 내년 2월 정년 퇴직을 앞두고 있다. 이번 전시가 일종의 중간 결산전인 셈이다.
오원배 작가에게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몇가지 기호와 상징, 색에 대해 물어봤다.
▶ 2012년, 2014년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 속에도 건물 지붕을 떠받드는 트러스 구조체가 등장하고 이번 전시에도 등장했다.
◁ 기본적으로, 시각적으로 지극히 단순하고 긴장감 있게 하는 것. 그런 것을 위에서 밑을 바라보는 극단적인 시점을 이용하거나. 원근, 또는 밑에서 위를 바라보는 원근법을 이용한다. 그런 것이 긴장의 요소를 배가시킨다고 생각한다.
긴장의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밑에서 위를 볼 적에 천정의 트러스 구조같은 것이 눈에 보일 수 있다.
보통 사람은 그런걸 봐도 그렇구나 하지만, 나같은 경우는, 그런 부분을 확대시켰을 적에 내가 설정해 놓은 실존이나 소외 같은 문제를 상황적으로 설명하는데 있어서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을 듣고 보니 생각해 보니, 내가 그랬나 싶기도 했다.
나름 평이한 구도라도, 그것을 어떤 시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평이한 그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구도이기도 하고 내가 노리는 긴장 효과를 내기도 한다.
또 그게, 그런 극단적인 구도가 심리적으로 불안감이나 위축감을 느끼게도 한다.
▶ 이번 전시에도 악기 부는 장면이 등장하고 1층의 그림 속 로봇은 춤추는 듯한 리듬감을 보여준다.
◁ 2003년 금호미술관에서의 개인전, 2007년 아트사이드 개인전 때 악기를 부는 캐릭터가 그림 속에 들어갔다.
내가 악기를 처음 동원한 것은 93년도인가 내가 ‘올해의 젊은 작가상’(조선일보사 제정)을 받고 수상기념전을 열었다. 그 전시에서 악기가 등장한다. 그때는 소리를 내고 싶어도, 소리가 나지 않는 무성의 악기를 그림에 그렸다. 그러다 2003년도 쯤 와서 다시 악기를 다루는 인물군을 그림에 등장시켰다. 과거와 달리 2003년도의 작품은 군상이 악기를 들고 있다. 93년도에 소리가 나지 않던 악기를 그리던 것이 2003년도 작품부터는 소리가 나는 악기가 등장한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소외라 한다면 소외도 즐겨라’라는 맥락이다. 내 작품에 그런 맥락으로 음악과 악기가 들어간다.
이번 전시회에 나온 작품에 율동이나 흥을 나게 하는 음악적 요소를 관람자가 느낄 수도 있지만, 이번엔 그런 맥락으로 의도적으로 포함시킨 것은 아니다.
▶ 로봇은 춤추고 인간은 경직된 자세로 통제에 따르는 모습은 어떤 의미인지.
◁ 나는 기계와 인간의 원활하지 못한 관계에 주목한다.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로봇-기계나 인공지능-A.I가 출현했다.
그런데 그런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 상당수를 빼앗고, 그걸 통해서 또다른 긴장관계가 형성됐다. 인간이 로봇으로 인한 일자리 상실에 대해 불안감을 가져야 하는 시대가 왔다.
여기서 인간은 기계와의 관계에서, 그게 싸움이든 경쟁이든 이기려고 하고, 기계는 오히려 여유가 있는 상황이 됐다. 그래서 그런 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은 신기술에 적용하려고 안간힘을 쓰면서 동일한 동작을 취하는데, 오히려 기계는 인간보다 여유로운 몸짓을 하고 있다.
이건 인간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집단, 인간 종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2020년쯤 되면 710만개의 일자리가 없어지고, 210만개가 생기는데 결국 500만개의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편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없다.
단순 반복업무는 사람이 손을 떼기 시작하는 등 사회 구조적으로 로봇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심지어 사람들한테는 ‘당신의 직업은 밤새 안녕하십니까’란 자조적 얘기도 나올 정도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 80년대 권력의 폭력에 노출된 인물은 나신이었는데 2010년대 안드로이드의 공세 앞에 노출된 인류는 속옷을 입혀놨다.
◁ (요즘 작품에서는)사람을 피동적으로 그렸다. 어떤 상황 아래서 피동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80년대에 알몸을 그렸던 데에 이유가 있던 것처럼, 이번 경우에는 부자연스런 상황, 그러나 나름대로는, 처절하게 적응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그렇게 그렸다.
▶1980년대의 민중미술 진영에 직접적으로 그루핑되지는 않지만 현실 발언은 꾸준히 했다.
◁ 내가 1980년대 사회 현실에 대해 작품을 통해 발언했지만 그 시절의 민중미술과 내 작품은 ‘조금의 차이’가 있다.
내가 하는 작업을 통해 내가 갖고 있던 어떤 상상력과 이미지의 역동성을 늘 생각한다. 나는 ‘현실’이라는 것을 시대의 상황이나 삶이라는 문제로 통칭된다고 본다.
그런데 민중미술 진영에선 사회적 현상으로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다.
나는, 어느 나라든지, 어느 시대든 사회 참여는 다 있다고 본다. 예술의 사회 참여를 독재에 대한 반대로만, 협의로만 국한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예술의 현실 참여를 사회적 기능만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면 공허한 구호만 남게 된다.
나는 삶의 보편적 가치를 생각한다.
현실참여를 정치 사회적 이슈에만 국한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미술사에서 80년대의 미술은 민중미술이다.
한국미술사에서 80년대의 미술은 민중미술이다.
다만 내가 일부, 민중미술적인 시각을 공유하고 고민하는 지점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밖에서는 오원배는 민중미술이다, 라고 보는 시각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여러 시각의 작가와 함께 다양한 그룹전에도 참여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현실의 보편적 가치, 삶의 보편적 가치를 작품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시각의 작가와 함께 다양한 그룹전에도 참여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현실의 보편적 가치, 삶의 보편적 가치를 작품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작품 속의 세계가 비관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 내가 이 세상이 끝날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그림을 안그렸을 수도 있다.
내 작업을 통해서, 그늘진 면을 통해, 그것이 하나의 진보가 있는, 그런 측면으로 발전하는 측면으로 나아가는, 좀 더 나은 길로 통하는 것을 조망하고 싶었다. 현실의 문제에 대한 극복의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 주최측이 전시공간을 1층은 욕계, 2층 색계, 3층이 무색계로 부르더라.
◁ OCI미술관이 좋은 전시공간이지만 까다로운 공간이기도 하다. 공간활용을 잘하지 않으면 실패한 전시가 될 소지가 있다. 그래서 면밀히 검토하고, 가서 조사하고 현장에서 제작한 작품을 걸기도 했다.
3층에는 드로잉 작업으로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평소에 드로잉 작업을 많이 한다. 사람들은 ‘오원배 스타일’이라는 것에 대한 편견 같은 게 있다.
드로잉과 회화작업은 다르다는 게 내 생각이다.
드로잉은 기록하는 수단이다.
내가 어떤 감정이냐에 따라서 드로잉이 달라진다. 1,2층에 전시된 작품과 상관없이 나는 평소에도 늘 끄적이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3층의 드로잉은 그런 기록을 전시한 것이다. 매일 매일의 감정이나 사고의 기록지이다. 1,2층에 전시된 작업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마무리를 해야 하는지를 잘알고, 그런 표현은 눈감고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드로잉은 1,2층에 전시된 작업을 할 때와는 다른 감각적이거나, 기하학적인, 순수한 결정체, 추상주의적 표현도 있고. 내가 해왔던 작업의 대척점에 있던 지점에 있던 것도 있고, 내가 해왔던 종래의 작업과는 달리 내가 갖고 있는 세계의 자유스러움, 또 다른 내가 있다. 어떤 표현은 되고 어떤 표현은 안된다는 룰이 적용된 게 1,2층이라면 그런 기준이 적용안된 게 3층의 드로잉이다.
▶ 2014년 개인전 때는 화사한 컬러의 작품을 선보이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색을 쓰는데 엄격한 편인 것 같다.
◁ 내가 색을 많이 쓰는 것을 잘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드로잉에서도 색을 남용하지는 않았다.
2014년의 개인전에 나온 작품이 화사한 것은 그 전시가 프레스코 기법으로 파리의 지붕을 그린 작품을 전시했기 때문이다. 내가 색에 엄격하다기 보다는 내가 선호하는 색이 지금의 작품에 반영된 것일 수도 있다.
내가 파리 유학 시절에 표현주의를 공부했기에...붓질도 그렇고, 그런 붓질이 내 체질에 더 맞는다고 생각한다.
▶ 전업이 아닌 교수 화가의 길을 걸었다.
◁ 한국 사회에서는 ‘교수’ 작가면 작품을 더 잘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편견도 있다. 따져보면 그건 또 아닌데. 한국 사회는 ‘교수 작가’에게 미술교육자로 역할도 잘하고, 작가로서 역할도 잘하기를 기대한다. 교수는 그 두가지를 모두 잘하지 않으면 학교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학교에서도 교수 개개인의 연구 업적을 따지니까.
화가의 연구업적은 전시인데, 어떤 교수는 전시를 큰데서 하고, 어떤 이는 대관해 전시하기도 하고...학교에선 업적 내놓으라고 교수 개개인에게 요구하고... 어떤 미술대학 교수는 내가 2월에 정년을 하는 것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역설적이지만.
나는 작가로서의 역할과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나에 대한 평가는 내가 내릴 게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서, 학교생활이 만족스러웠단 것이지, 작품이 다 만족스러왔다는 것은 아니다.
오원배 작가는 내년 2월 이후에 작업할 공간을 이미 마련해놨다. 구파발에 있는 천장이 높은 아파트형 공장을 새 작업실로 점찍고 30년 이상 쌓여있던 학교의 짐을 옮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