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중국의 얼굴 Face of China
장 소 : 독일 베를린 게멜데갤러리
기 간 : ~2018.1.7
글/ 김진녕
독일 베를린 주립미술관 게멜데갤러리에서 <중국의 얼굴 Face of China>(~2018.1.7.)전이 열리고 있다.
주최측에선 이 전시가 유럽에서 중국의 전통 초상화, 주로 명청시대의 초상화에 초점을 맞춘 전시로는 아마 첫 번째 전시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출품작은 주로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관과 토론토의 로열온타리오박물관에서 온 100점이 넘는 작품이 포함돼 있고 500년 이상된 작품도 포함돼 있다.
주최측은 전시를 11가지 섹션으로 나누어 중국 초상화의 전통을 소개하고 있다. 섹션 구분은 왕실 초상화, 관료의 초상화, 문인의 초상화, 종교인의 초상, 조상숭배용 초상, 예술가의 자화상, 가족의 초상 등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과 용도로 나뉘어져 있다.
청나라 시대 권력자의 초상 뿐만 아니라 조상의 초상과 화가의 초상, 여성의 초상 등 다양한 계층의 초상화 등장
초상화는 중국의 역사만큼이나 긴 전통을 갖고 있다. 특히 16세기 초반, 명대 후기로 접어들면서 경제적인 붐과 지식의 개방성이 절정기의 중요한 순간을 이끌어냈다.
이번 전시는 명대의 작품도 포함돼 있지만 대다수 착품은 청나라(1644~1912) 시절의 초상화이다. 전시에 출품된 청나라 시절에 그려진 초상화는 청나라 조정에 몸담은 고관대작이나 군인은 물론 조상 숭배용으로 초상된 초상, 예술가나 유명한 여성의 초상화를 망라하고 있다. 중국에서 이렇게 여러 계층의 초상화가 등장한 것은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기도 하다.
동시대 유럽에서 제작된 초상화와 비교 감상을 통해 동시대성과 차이성 부각
또 하나 눈여겨 볼 점은 유럽과의 교류 흔적이다.
이탈리아의 예수회 소속 화가로 유럽 회화의 새로운 테크닉을 중국에 소개한 마테오 리치가 중국을 방문한 것은 명나라가 무너지기 직전인 1583년이다. 그는 전도 활동은 물론 지도제작법 등 르네상스 이후 대항해시대를 촉발하며 발전하기 시작한 서양의 과학기술을 중국에 전했다.
1616년 누르하치가 만주에 세운 후금은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치고(1636년) 중원의 패권을 잡았다. 청나라는 베이징 황궁은 중국과 유럽의 활발한 문화교류의 장이 됐다.
이는 특별히 초상화에 잘 반영됐다. 주세페 카스틸리오네(Giuseppe Castiglione, 1688~1766, 중국 이름 랑시닝 郎世寧)은 이 시기의 주요 인물이다. 밀라노 출신인 그는 이탈리아의 예수회 선교사로 1715년에 선교사가 되어 청나라에 파견되었다. 그는 청나라 조정에서 선교사보다는 궁정 화가로 더 주목을 받으며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를 거치며 50여 년간 활동하면서 청나라 회화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강희제 때 공사가 시작돼 건륭제 때 완공된 청나라 황실정원인 원명원(圓明園)에 건륭제가 그를 위해 화실로 내준 여의관(如意館)이란 건물이 있을 정도로 그는 청나라 황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원명원에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한 서양루 등을 설계하고 시공하는데 참여하였다. 음영법을 통해 중국회화에 원근법을 도입한 것은 그의 영향이고 건륭제 때 화원 화가인 당대(唐垈)와 함께 <원명원전도圓明園全圖>를 그리기도 했다.
전시장에는 카스틸리오네가 그린 무인도가 나와있다.
주최측은 중국의 초상화를 크게 두 개의 갈래로 나누었다. 하나는 조상의 초상이고 다른 하나는 생존 인물의 초상이다.
조상의 초상은 고인이 된 가족 구성원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다. 이런 초상의 대부분은 전문적이지만 익명의 장인이 그린다.
반면 유명 예술가가 유명 인사를 그린 초상화에는 종종 작가의 서명이 남아있다. 이를테면 관료나 예술가, 시인, 군대의 유명인사, 보통사람의 초상이나 가족 초상에도 작가의 서명이 남아있다.
1층 전시장에는 황족이나 관료, 예술가의 초상화에 할애됐고 지하1층 전시장은 개인이나 가족, 조상의 초상을 집중적으로 걸려있었다.
주최측은 가능한한 작품 자체가 기본적으로 담고 있는 사회적 종교적 맥락이나 작품이 만들어질 때의 조건을 환기시키는 전시환경을 만드는 데도 신경을 쓴 것으로 보였다.
이를테면 큰 규모의 황실 초상화는 실제로 황족이 입던 비단으로 만든 황실 의복을 베이징 고궁박물관으로부터 빌려와 함께 전시하고 있다. 또 물총새의 깃털로 만든 청대 고유의 머리장식물인 점취장식품도 함께 전시하는 등 그림 속 주인공들의 복식을 전시장에서 실물로 보여주고 있다.
또 제사용도로 쓰이는 조상의 초상은 제사상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이를 위해 제사상에 올라가는 꽃병과 향로, 촛대 등을 토론토의 로얄온타리오박물관에서 빌려와 함께 전시하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전시 소품이 베를린주립박물관의 민속학박물관이나 아시아박물관에서 빌려온 것이다.
조상의 초상을 위한 365개의 도상은 이번에 처음 전시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 것은 직업적인 화가가 쓰던 것이고, 주최측은 이 도상이 작가가 잠재고객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샘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초상화가를 위한 목판 일러스트북도 눈길을 끈다. 이것은 청대의 화가로 유명했던 딩가오(丁皋, ?-1761)와 딩가오의 아들인 딩이청(丁以誠)이 함께 만든 전통 초상화 제작비법을 담은 책이다. 여기에는 기술적인 제작 디테일뿐 아니라 골상에 기반한 초상화 예술을 위한 과학적 접근법도 탐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전시품 중 당대 조선과 청의 교류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작품도 몇 점 나와있다.
조선 후기 상해에서 흘러나온 인쇄화는 장승업 등 조선 후기의 화단에도 영향을 끼쳤다.
사임(四任)으로 불리는 해상화파의 주요인물인 네 명의 임씨 화가(런시옹 任熊 1820~1857, 런 이 任頤 1840~1895, 런순 任薰 1835~1893, 런유 任預 1854~1901)는 19세기 상해의 직업 화가군 중 리더로 불리는데 이들은 혈연과 제자 관계로 엮여 있다.
런시옹 <자화상>
전시회장의 마지막에 자리잡고 있는 런시옹의 자화상은 18세기 카스틸리오네에 의해 섞이기 시작한 서양화 기법이 한층 더 대담하게 중국 전통의 초상화에 섞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 <홍루몽>의 삽화가로 이름을 널리 알리고 있는 화가 가이치(改琦, 1773~1828)의 작품도 나와있다. 가이치가 그린 <홍루몽> 삽화는 그가 죽은 뒤인 1879년 출판물로 세상에 나왔고 이것이 조선에도 전해졌다.
가이치가 그린 <치안동錢東의 초상>(1823)과 유탕玉堂이 그린 <가이치의 초상>(1800)이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전시장에 나와있다.
섹션4에 전시된 <우고도 友古圖>(1848년작)를 그린 우준(吳儁)은 <세한도>와 관련있는 인물이다. 그가 그린 우고도의 주인공은 괴석으로 상판을 만든 책상에 고목으로 만든 의자에 앉아 자신의 골동품 컬렉션을 바라보고 있다. 이 컬렉터가 바라보는 도철무늬 청동잔의 모습과 구도는 조선에 전해져 장승업의 기명절지도를 시작으로 조선의 화가들이 숱하게 반복해 그리는 도상이 됐다.
1844년 제주에 유배 중인 추사가 역관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주자 이상적은 그해 말 사행길에 역관으로 베이징에 갈 때 이 그림을 들고 갔다.
1845년 1월13일 청나라의 정치인이자 문인인 장야오선(張曜孫, 1808~1863)이 주최한 모임에 이상적은 이 그림을 들고 참석해 베이징 지식인 사회의 셀렙들에게 제사(題辭)를 부탁했다. 청의 지식인 16명이 이 그림에 대한 찬사를 적었다고 한다. 모임의 주최자인 장야오선은 연경 명사들의 <세한도> 관람 장면을 화가인 우준에게 부탁해 그림으로 옮기게 했고, 이 그림이 <해금객준 제이도 海客琴樽第二圖>인데 그날의 기록과 그림 제목은 전하지만 실물은 사라졌다.
한반도에 연관된 또 하나의 전시물은 다섯 번째 섹션인 무인의 초상에 등장한 두 점의 초상화다.
작자미상 <다와치 초상達瓦斉像> 청(1736–1795) ca 1756, Oil on Korean paper, Ethnologisches Museum – Staatliche Museen zu Berlin
건륭제 연간(1736~1795)에 제작된 <다와치의 초상>(佚名 傳王致誠 達齊瓦像, 1756)과 <몽코르투의 초상>(佚名 傳王致誠 璊綽爾像, 1758)은 조선 종이에 그린 유화다.
기록에 의하면 1756년 4월1일 카스틸리오네가 다와치의 초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게 그 작품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작자 미상으로 남아있다.
이 전시는 시작부와 끄트머리에 동시대 중국의 작품과 서양의 작품을 함께 걸어놨다.
동시대에 동양과 서양의 시간이 어떻게 다르고 비슷했는지 비교해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작자미상<양워싱 초상楊我行神像> 16–17c, Hanging scroll, ink and colours on silk, © Royal Ontario Museum, Toronto, The George Crofts Collection
주최측은 전시장 들머리 정면에 명대에 만들어진 <양워싱의 초상>(佚名 楊我行神像, 16~17세기, 로열온타리오뮤지엄 소장품)과 안토니 반 다이크가 그린 제노바의 귀부인(1623년 작, 게멜데갤러리 소장품)을 나란히 걸어놨다. 비슷한 시기의 두 작품을 통해 동서양의 차이와 초상화의 본질을 느껴보라는 의도일 것이다.
전시에서 확인되듯 16세기까지 중국은 세계 최고였다.
아프리카까지 배를 타고 나아간 정화의 남해원정이 15세기 전반의 일이다. 중국은 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을 발명한 당대 최고의 하이테크 국가였다.
하지만 중국의 영광은 거기까지였다.
무지와 야만의 대륙이었던 유럽은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종이와 나침반과 화약, 인쇄술을 통해 지식의 대량보급과 상업의 발달을 통해 15세기 말부터 대항해의 시대를 열었고 이를 통해 식민지에서 빨아들인 재화를 바탕으로 유럽의 지도를 다시 그리는 쉴새없는 전쟁을 벌이면서 화약과 총포를 개량해 나갔고 1840년 1차 아편전쟁을 통해 중국을 굴복시켰다. 청에게만 기댔던 조선도 강제 개방을 하고 곧 식민지로 전락했고 수백만명이 국경을 넘는 유랑걸식을 떠나야했던 디아스포라와 대량학살을 동반한 내전을 거쳐 곧바로 ‘현대’로 진입한 20세기를 맞이했다.
<중국의 얼굴>전은 16세기 이후 아시아의 지체와 유럽의 급속한 근대화, 한국의 20세기까지 두루두루 생각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전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