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
장 소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기 간 : 2017. 07. 05. ~ 2017. 10. 09
언뜻 떠올려도 서너 군데는 생각나는 백범 김구의 동상. 그 중 효창공원에 있는 동상과 같은 모양의 조각에 영상을 투사하여 래핑하는 방식으로 <나의 소원>(2017)이라는 신작을 낸 미디어 아티스트는 폴란드 출신의 크지슈토프 보디츠코(74)이다. 그는 아시아 최초의 회고전을 열면서 지난해 5월부터 한국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와 모습을 모으고 김구의 동상에 투사시키는 1년 여의 작업을 시작했다. 마침 지난 12월은 광화문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때였고, 이 사회의 변화와 그 담론을 작품에 담고자 했다.
<나의 소원> 2017
1943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크지슈토프 보디츠코는 원래 산업디자인을 전공, 산업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대안공간을 중심으로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1977년 캐나다로 이주, 1980년대에 들어 뉴욕, 슈투트가르트, 카셀 등 여러 도시에서 사회 비판적,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야외 프로젝션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세계 각지의 난민, 외국인, 노숙자, 가정 폭력 희생자 등 상처받고 억압된 사람들이 공적인 공간에서 발언할 기회를 만들어주는 공공 프로젝션과 디자인 작품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히로시마 프로젝션> 1999
히로시마 미술상 수상 기념으로 열린 히로시마 평화기념관 원폭돔에서 열린 공공 프로젝션
MMCA 전시실 영상
보디츠코를 대표하는 작품은 한 도시의 유명 건물 파사드에 난민들의 손 등을 거대하게 확대한 영상을 비추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도록 한 것들이다. 이번 회고전의 중심 또한 히로시마 원폭 돔 건물에 원폭 피해자들의 손을 비추는 '히로시마 프로젝션', 멕시코 티후아나의 미술관에 가정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얼굴을 투사한 '티후아나 프로젝션' 등 주요 작품들을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것들이다.
벨기에 메헬렌 시청사에서의 공공 프로젝션 <새로운 메헬렌 사람들> 2012
회고전의 또 다른 한 축은 디자이너로서의 그의 관심사와 역량의 산물인 기구들이다. 수레 위에서 계속 걸어다니면 바퀴가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는 <수레>(1971-73), 노숙자의 이동수단 겸 쉼터인 <노숙자 수레>(1988-89), 이민자들을 위한 의사소통 기구인 <외국인 지팡이>(1992) 등은 유머러스하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진지하고 치밀하며 비판적이다.
바르샤바에서 <수레>를 시연하는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1973, 우치미술관
스톡홀름 거리에서 <외국인 지팡이>(1993)을 시연 중인 두 명의 퍼포머 들, 1994,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
한 노숙인이 뉴욕 트럼프 타워 앞에서 <노숙자 수레>를 시연 중인 모습, 1988
MMCA 전시실의 <노숙자 수레>와 드로잉
신작 <나의 소원>에는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 해고노동자, 탈북 예술가, 귀화 영화배우, 동성애 인권 운동가, 소외되는 노인 등 지금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의 목소리를 담았다. 동상에 투사되는 그들의 모습을 넓고 어두운 공간에 앉아 보고 듣고 있으면, 이 외국인 작가 앞에서 왠지 부끄러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백범 김구의 시대에서 현재까지, 우리는 무엇을 해 왔나. 이 폴란드 작가는 백범 김구에 투영된 이 사람들의 목소리가 우리들에게 어떤 울림을 줄지 어느 정도 이해했을까.
예술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일까. 약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온 보디츠코가 김구의 동상을 선택한 이유를 백범일지 속의 글 「나의 소원」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침 이 글을 쓰는 오늘(2017년8월29일)은 김구 선생이 태어난지 141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요,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인류가 현재 불행한 근본 이유는 인의(仁義)가 부족하고, 자비가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한 때문이다. 이 마음만 발달이 되면 현재의 물질력으로 20억이 다 편안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이 정신을 배양하는 것은 오직 문화다.“(김구, 「나의 소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