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진녕
현대 미술계의 스타 작가인 데미언 허스트(Damien Hirst, 1965- )가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 중 베니스에 판을 벌렸다.
‘프로듀서’는 구찌, 입생로랑 등 수많은 명품 브랜드를 소유한 케링(Kering) 그룹의 프랑수아 피노(Francois Pinault) 회장. 피노 회장은 7000억원이 넘는 돈을 이 프로젝트에 쏟아 부었고, 제작기간은 3년이 넘는다.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다. 헐리우드의 판타지 영화 제작기와 비슷하다.
한 가지 모티브를 잡고, 아이디어를 모으고, 여러 각본가를 고용해 이야기를 발전시키고, 최종 크레딧에 이름을 올릴 이를 결정하고, 대규모 자본으로 전문가(공방-스튜디오)를 고용해 첨단의 기술을 제품에 적용하고, 제품 완성을 전후해 세계적인 영화 페스티벌에서 대규모 홍보전을 갖는다.
어디 한군데 이런 도식에서 빠지는 게 없는 데미안 허스트의 신작 쇼다.
쇼의 제목마저도 완벽한 판타지(거짓말)이다.<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Treasures from the Wreck of the Unbelievable>.
제목조차 기시감이 든다.
헐리우드의 유능한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와 놀이공원을 운영하고 있는 디즈니가 손잡고 출범시킨 프랜차이즈 시리즈 <캐리비안의 해적>과 정확히 겹친다.
헐리우드의 유능한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와 놀이공원을 운영하고 있는 디즈니가 손잡고 출범시킨 프랜차이즈 시리즈 <캐리비안의 해적>과 정확히 겹친다.
만화와 소설, 소년지에서 공룡만큼이나 단골 손님인 해적선 신화. 카리브해 어디쯤에서 활약하다가 수많은 황금보화를 싣고 침몰했다는.
제리 브룩하이머는 대항해시대의 끄트머리에 등장한 ‘해적 신화’의 관습적 요소만 빌려 뼈대를 만든 뒤 각본가를 고용해 그럴싸하지만 완전히 창작(거짓말)인 스토리를 입히고 그때 그때 적당한 감독을 섭외해 제작자의 상품을 만들어냈다. 그 스토리 창작의 제한 요소는 양대 제작자 중 하나인 디즈니의 주력 사업 중 하나인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로 재현 가능할 것' 정도이다.
그렇게 현대 영화 산업의 매표력 플러스 요인인 유색인종이 자유인 캐릭터로 들어가고, 중국인도 조연으로 들어가고, 독립적인 강인한 여성도 해적선에 오를 수 있었다. 흥행을 위해 표를 팔 수 있는 지금의 매표력 위주로 에피소드와 캐릭터가 결정되는 것이다. 심지어 주인공을 자주 바꾸지 않아도 되게끔 주인공 캐릭터는 시리즈 시작부터 두꺼운 메이크업으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렸다. 판타지 속에 등장하는 그 나이에 영원히 고정되어 현실에서 그가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여부를 관객은 전혀 알 수 없게끔 시작부터 플라스틱 마스크를 입힌 것이다.
<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은 그래서 제작자 피노 회장의 작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가 전주이기도 하지만 이 쇼가 열리는 베니스의 '팔라조 그라시나 푼타 델라 도가나'가 피노 회장이 현대 미술 산업에 투자한 지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전용 쇼장’이기 때문이다.
이 블록버스터 쇼에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상당 부분을 피노가 가져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건 메디치가의 르네상스 후원과는 맥락이 다르다. 즉각적인 자본 회수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는 난파선의 보물> 전시를 보도하는 상당수의 해외 미디어들이 ‘이미 작품이 팔렸다’ 운운한 것도 누군가가 얘기한 것을 들었을 것이고 그 누군가는 ‘주최측’일 가능성이 크다.
서양의 세계관에서 역사 이전의 신화 시대로 분류되는 그리스 로마 문명의 유산과 이집트 문명, 중국 상대 문명의 유산과 불상 등 서기 이전의 문명사를 바탕으로 생성된 기물과 크리처가 디테일을 살린 채 ‘난파선의 신화’를 부추길 만한 제스처로 전시장을 메우고 있었다.
다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비해 중국 상대 문명이나 동아시아의 청동기 제기에 대해서는 리서치가 부족했는지 구체적인 스토리텔링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단편적인 작품 제작에 그쳤다는 게 눈에 띄었다.
@Andrea Merola/EPA
허스트 쇼가 열린 전시장 두 곳, 팔라조 그라시와 푼타델라도가나는 장소의 성격이 달랐다.
팔라조 그라시는 아트리움이 건물 중앙에 있는 직사각형의 우물 스타일의 전시장이고 푼타델라도가나는 깊이보다 넓이가 넓은 장소다.
팔라조 그라시는 아트리움에 전시된 18m가 넘는 <보울을 든 악마Demon with a Bowl>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머리가 없고, 인간의 육체와 비슷한 이 금속 느낌의 대형 조각품은 등뼈가 마치 기거(H. R. Giger)의 에일리언처럼 명확히 드러나 인간이 아님을 확실히 하고 있다. 또 이 작품은 본체가 폴리에스터이고 그 위에 금속 느낌을 내기 위해 알루미늄 파우더를 코팅한 제품이다. 덕분에 이동과 조립이 간편하다. 로드쇼에도 적합한 것.
이 데몬Demon이 이번 허스트쇼의 아이콘 격이서인지 여기에는 이번 전시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테크닉이 등장한다. 난파선에 실려 바다에 있었던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 몸에는 해초와 갑각류가 붙어있다. 데몬을 둘러싼 팔라조 그라시의 3개층 전시 공간은 난파선에서 건진 소품과 가라앉은 난파선의 축소 모델, 난파선 유물을 스케치한 그림, 허스트 팀이 난파선과 그 보물을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리는 과정을 담은 고화질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상영 공간에 할애됐다.
푼타델라도가나는 데몬만큼 큰 작품은 없지만 팔라조 그라시에 전시할 수 없었던 대형 ‘액션 피겨’를 전시했다. 전투 장면을 묘사한 역동적인 작품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푼타델라도가나가 1층 건물이지만 부분적으로 2층을 헐어 대형 작품 전시에 용이했기 때문이다.
사실 푼타델라도가나는 일본의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건물 리뉴얼 공사를 하여 국내에서도 화제가 됐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1600년대에 세워진 건물로 지붕 위에 올려진 골든 볼로 유명한 건물이었다. 베니스 항을 드나다는 배들은 이 건물 위에 올려진 골든 볼을 통과하면 관세를 내야했다. 이 건물이 세관 건물이었고 일종의 톨게이트였던 것이다.
현대로 들어서면서 방치됐던 건물을 2007년 4월 지명 입찰를 통해 낙찰받은 피노 회장은 안도 타다오를 고용해 리노베이션을 한 뒤 2009년 6월 푼타델라도가나의 문을 열었다.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맡은 안도 타다오는 고풍스러운 건물 외관과 목재로 이뤄진 천정은 보존하고 나머지 부분의 내부는 안도 특유의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다듬어냈다.
그래서 푼타델라도가나는 건물 자체가 디자인 투어의 장소가 되고 있기도 하다.
허스트는 푼타델라도가나에서 이번 쇼에 적용된 거짓말의 규칙, ‘원본’, ‘산호본’, ‘미술관을 위한 레플리카-모조본’이라는 세 가지 모델을 충실히 전시한다.
반짝이고 예쁜 귀금속류의 ‘인양 유물’은 팔라조 그라시에, 미술관을 위한 거짓말은 푼타델라도가나에 전시된 셈이다.
베니스의 허스트쇼는 미술이라는 장르에서 해보지 않았던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 이때 ‘새로운 시도’란 미술관이 당대 대중의 일반적인 오락 상품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허스트의 새로운 방향 모색과 피노의 베팅이 결합된 형태인 듯 하다.
허스트는 분명 쇼의 시작 전에 이야기했다.
이 깜찍한 판타지가 거짓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