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성 개인전
2017. 7. 7.-7. 30. 자하미술관
녹색 풀(Green Pool)
글/ 조은정(미술평론가)
지난 2017년 3월 21일자 헤럴드 경제에는 “부산광역시 조현화랑에서는 도시공간에 관심을 갖고 작업해 온 작가 정직성의 개인전 ‘겨울 꽃’이 열린다. 극한 속에서 피는 매화 ‘겨울 꽃’시리즈와 지류강들의 녹조현상을 소재로 삼는 ‘녹색풀’ 시리즈를 포함한 48점의 회화가 선보인다. 4월 7일부터 5월 7일까지.”라는 기사가 실렸다. 하지만 갤러리를 찾은 이들은 눈을 씻고 찾아도 만개한 매화만 발견할 수 있었으니 녹색풀은 어디에서 전시되는가 물을 수밖에.
그 갤러리에 걸리지 못한 ‘녹색 풀’들의 전시가 오랜만에 장마다운 비를 구경한 7월 7일 오후 아마도 서울에서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미술관이 아닐까 생각되는 자하미술관에서 시작되었다. 여름공기와 비가 만나 수증기마저 내뿜는 것과 같은 날씨 속에서 만난 ‘녹색 풀’은 말 그대로 녹색의 식물이자 녹색의 작은 수영장이었으며 결국 한국인 모두 깊은 곳 트라우마처럼 끌어올려져 마주하고야 마는 녹조(綠藻) 그림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녹색 풀’ 그림은 갤러리에 걸리지 못하였던 것이고, 이를 일러 우리는 자기 방어 좀더 적극적인 표현으로 자기검열이라 한다. 물론 초대한 갤러리 측의 입장에서 말이다. 맑은 물이 짙은 녹색을 띠게 되는 녹조현상이, 그 그림이 환경문제가 아닌 정치문제로 인지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미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금 생각한다.
이에 매화와 녹조 두 유형의 작품들 모두를 대상으로 썼던 전시 서문을 여기에 올려, 작가가 생각했던 전시의 개념을 확인해보고자 한다.
녹조와 매화 ; 정치적 풍경의 아남네시스
자연과 인간의 생활을 유기적으로 파악하고 표현해낸 풍경화는 인상주의 회화에서 커다란 변모를 이루었다. 그것은 종교로부터 독립된 자연이자 인간을 중심에 둔 사유의 결과였으며 산업혁명으로 풍요로워진 삶의 반영이자 튜브물감의 발명 결과이기도 했다. 화구통을 둘러매고 들판으로 나가 대기를 호흡한 화가의 화필은 자연의 현상을 화폭에 고정시켰다. 터너나 프리드리히의 낭만적 회화에는 그들이 들이마신 호흡이, 그들이 목도한 자연의 공기가 그대로 들어앉아 있다.
그리스 아테네 아카데미에서 주도한 연구는 독일의 광학적 분석 연구소까지 가세하여 이른바 풍경화 대가들의 화면을 기후변화라는 측면에서 분석하여 흥미로운 결과를 내놓았다. “1815년에는 인도네시아의 탐보라 화산이 폭발했는데 그 후 3년간 유럽 화가들의 그림 속에는 선홍색과 오렌지색의 하늘이 등장한다. 화산에서 분출된 재와 가스가 대륙을 넘어 확산되면서 대기에 늘어난 에어로졸이 햇빛을 산란시켜 더 붉고 강한 빛을 만들어낸 것이 그림 속에 반영된 것이다. 선홍색과 오렌지색의 하늘은 당시 미술 유파나 화가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그림 속에 어김없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프리드리히의 풍경이 신성으로 가득한 감상이라거나 터너의 풍경이 넘치는 에너지의 상징만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풍경화는 그들이 이해하거나 주관적 감상에 의한 해석으로만 이루어진 화면만은 아니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산업혁명 이후 인상주의 화가들의 화면에서 일몰은 더욱 강한 붉은 빛을 띤다는 사실이다. 대규모 화산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던 시기임에도 이들 화가들에게 포착된 붉은 일몰은 결국 인간이 생산해낸 오염물질의 결과라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이들 근대의 화가들에게 과학적 태도는 감정과 감각을 더 잘 표현하기 위한 도구였고, 광학과 그 표현에 대한 연구는 면밀한 자연에의 관찰로 이어져 자신이 존재하던 시대의 대기(大氣)를 표현해내었던 것이다.
헌데 산업과 자연의 관계를 드러내던 인상주의 화가들의 풍경은 산책자-플라뇌르로서 시대를 관찰한 기록의 의미도 지닌다. 의도치 않은 감각의 자연뿐만 아니라 그들이 목도한 사회의 변화와 삶에 대한 성찰이 담긴 풍경화는 작가마다 시선이 다를지라도 자연에 그들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다름이 없다. 그들은 피사로처럼 산업화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서든 모네처럼 자연 스스로에 몰입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과 연계된 인간 삶을 드러내었으며, 어느 경우든 산업화에 몸살을 앓는 자연에 대한 애도 또한 잊지 않았다.
정직성의 〈녹조〉와 〈매화〉 시리즈 앞에서 자연에 대한 해석과 기록이 한 화면에서 긴장감을 유지하던 인상주의 화면을 연상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화면에 펼쳐진 자연과 그것을 구성한 구조-평면적이든 대상의 재현이든-는 작가의 감각과 시대의 증언이라는 플라뇌르의 시선에 닿아 있다. 그리하여 정직성의 화면은 지극히 주관적인 자연에 대한 해석이되 경험에서 이해되는 자연이라는 점에서 지금 ‘우리 시대에 이해가능’이라는 동시대성을 갖는다. 흐드러진 매화가 밤에도 빛을 잃지 않은 화면이나 지나치게 푸르러서 발광하는 인위적 색채로 느끼게 하는 녹조가 가득한 화면은 아름다운 자연의 묘사를 넘어선 정치적 풍경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이 땅의 이들에게 그것들은 실지 풍경이지만 또한 정치적 사건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녹조, 녹색모노크롬의 권력
낡은 캔버스 속에 사인을 남긴 누군지 알 수 없는 작가가 그렸던 바위를 가르며 지나는 물줄기가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소박한 생각은 우리 시대의 풍경이라는 인상주의 회화의 가장 기초적인 의미와 닿았다. 캔버스에 기록된 1983년의 풍경에 대한 상기는 작가가 3년 전 우연히 얻은 금박액자 속에 담긴 그림 한 점을 통해서였다. 나무들이 울창한 계곡 바위틈에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중앙을 가로지르는 그림은 ‘남의 눈을 통해서 본 물’을 드러내 주었다, 이렇게 자신의 눈이 아닌 타인의 눈에 의해 포착되어 전달된 물이 강하게 각인된 이미지 중에는 보도사진 속의 ‘물’도 있었다. 그 물은 사진이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될 정도로 인공적 색채를 띠고 있었는데 그것을 일러 세상은 ‘녹조’라고 하였다. 따라서 작가가 옛 그림 속에 물줄기를 녹조로 바꾼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 자연의 현재 기록이 된 셈이다. 이 키치적인 단색화의 녹조는 텁텁하고 짙은, 보도사진 속 색채 그대로 인공적인 색채이다.
변화된 자연의 모습에 대한 개인의 분노는 외부의 힘에 의해 변화된 생명체, 망가진 자연, 그리하여 분노하는 자연으로서 물을 나타낸 것이다. 물(水) 자체에 이입된 감정은 살아 움직이는 녹조로도 그려지는데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공유한 에너지로서의 실체를 나타낸 것이다. 작고 푸른 것들의 엄청난 에너지는 봄날의 쑥과 냉이처럼 작가 경험의 소산이다. 교외에 작업실을 마련하면서 잡초와의 기나긴 전투 속에서 깨달은 하잘것없는 자연의 위대한 힘-에너지인 것이다. 잡초와 인간과의 영역 점유 투쟁은 분명 전투와 같았을 것이지만, 계곡을 이끼로 가득하게 만들어버린 보도사진 속 사대강 사업의 실체는 인간사회 내부의 권력과 쟁투를 모두 헛되게 하는 분노하는 자연의 힘, 녹조로 엄습해온다. 인간 삶을 파괴할 공포스러운 녹조가 에메랄드빛처럼, 물에 초록물감은 타놓은 것처럼 비자연적인 모습이어서 생경한 인공의 세계가 자연과 결합된 것처럼 비치는 것은 믿기 어렵지만 사실적인 풍경이다.
녹조, 물 전면을 덮어버리는 그 강렬한 에너지는 화면 가득히 녹색으로 꿈틀거리며 단일색조로 뒤덮인 화면으로 구현되었다. 녹조 가득한 웅덩이와 하천에서 작가는 현실의 단색화, ‘녹조모노크롬’을 발견하였다고 말한다. 모노크롬 이른바 단색화가 전통과 정신을 상징하는 한국적인 스타일의 그림이라고 한다면 그의 ‘녹조모노크롬’은 자연의 에너지가 화면에 집약되어 꿈틀거리는 자연 자체에 대한 오마주라고도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녹조모노크롬은 그렇게 단색화처럼 표면을 덮었지만, 그것은 또한 녹조라는 미생물의 활동결과를 유추케 함으로써 예술적이고 정신적인 영역에 있는 ‘한 가지 색조’의 권력을 전복시킨다. 작가는 이 강력한 자장에 간섭하여 드넓은 초록에 삐죽이 솟아 있는 붉은 물감 한 자락이 심심찮게 눈에 띄게 함으로써 균열되는 표면, 장력을 넘어서려는 힘의 생성을 노골화한다.
공예적 노고, 지나친 장식의 상징인 금박 액자들은 흔히 꽃무늬 가득히 조각되어 있어 지금의 액자들과 달라 보이기 마련이다. 그가 생산한 녹조모노크롬들을 담은 금박 빈티지 액자들은 “이것은 작품이야”라는 주장의 장치이다. 전통을 담은 금박액자와 모노크롬이라는 미술작품의 생성과 유통에 대한 명쾌한 유비는 권력의 모습을 띠고 권력에 대항한다는 오래된 전략을 구사한다. 우리가 늘상 다시는 당하지 않을 거라면서 또다시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은 오래된 전략이 항상 통용되기 때문이 아니던가.
화면 내부에서 물결치는 녹조, 배어나오는 녹조, 배어들어간 녹조, 질질 흐르는 녹조.... 그렇게 표면적으로 정직성의 녹조 시리즈는 그리기라는 조형언어의 기본에 충실한 화면을 구사한다. 자라나는 잡초 혹은 푸른색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자라나는 생물로 구성된 녹조는 작가의 붓질과 물감의 배합에 따라 캔버스에 정착되어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 정직성의 녹조 시리즈는 그렇게 순수 추상으로서 작가의 에너지가 투사된 화면이자 시간에 조응하는 물질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녹조’라는 명제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작품의 태동은 사회와 부패한 권력에 대한 고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의 자의식에서 자유롭지 않다.
단색조의 화면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그 시대의 이념이다. 그것이 한국적인 것이든 무위자연(無爲自然)이든 혹은 정치적 침묵이든 아니면 순수 물질에 대한 관념이든 그 시대의 이념과 결부되어 있다. 정직성은 이 단조로운 색상을 선택한 화면을 스스로 일러 모노크롬이라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화폭이 시대의 물질과 관념의 표상일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상념을 담은 것임을 천명한다. 그의 화면은 시대의 자연과 물질의 조응관계, 관조의 대상에서부터 생존을 위한 자연과의 사투에 들어섰음을, 분노하는 자연의 에너지를 구현함으로써 경각심을 일깨운다.
교훈적이면서도 사실적인 화면은 녹조라는 초유의 사태가 역사적으로도 매우 희귀한 우리 현대사의 문제임을 또한 직시하게 한다.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도시 강가를 산책하는 사람들과 새로 놓은 다리 위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는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인상주의자들이 도시의 개발과 자연의 변화를 담은 사회적 풍경화가 되게 하였던 것처럼, 정직성은 정치가 자연에 관여한 결과 나타난 우리 시대의 ‘녹조모노크롬’을 드러냄으로써 추상화의 외형을 한 정치적 내면의 풍경화를 생산하였다. 평평한 초록의 화면은 그동안 자연의 상태를 상징하는 색채였으나 녹조의 형광 색채는 엄습하는 공포스러운 녹색이다, 그동안 녹색이라 일컬어온 자연의 그것과는 또 다른 녹색의 자연을 앞에 두고 이 녹색의 녹조모노크롬이 바로 우리 시대의 풍경화임을 인지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매화, 구축적인 유연함의 반권력
화려한 도시의 건축군 사이에 빈약한 자본만을 소유한 계급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탐구를 하던 작가가, 집을 짓기 위한 공사장의 자재들이 쌓여 있는 현장을 구축적으로 드러내던 작가가 새삼스레 꽃, 매화를 그렸을 때 그것은 ‘전통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식상한 구호를 벗어난 지점에 있을 줄 알았다. 그것은 흐드러진 매화를 통한 욕망의 상징도,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꽃이라는 탐춘의 의미, 긴 겨울을 버티어낸 지조의 상징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곳에 자신의 작업실을 열고 살림을 펴고 새로운 구성원과 함께하는 생활에서 온 기분에 기반한 것임은 안다. 밀집된 연립주택과 공사장의 폐자재더미를 지나 가로수를 간질이는 싱그러운 바람을 넘어 매화에 이르렀으니,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응시하는 작가에게 매화 또한 의미가 없을 리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인지는 타자와 사회라는 거울 안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작업실을 가득 채운 매화 그림은 자신의 현재에 대한 인지이자 그를 둘러싼 세계이다. 작가는 매화의 ‘꽃’에 주목한다. 매화가 속한 사군자는 개인을 넘어서 시대의 이념과 사회를 이해하는 지표일 터이다. 그런데 정직성의 매화는 등걸에 내려앉은 세월의 묵중함에도 불구하고 잠시 피어나는 그 작은 꽃망울과 꽃잎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한다. 작가는 꽃을 주목하게 함으로써 꽃의 에너지, 섬광 같은 찰나의 빛, 잠시의 봄이라는 시간을 넘어서 그 현재를 붙잡음으로써 자신의 시대를 은유하고 기록한다.
미술사에서 매화는 관념이다. 준법처럼 엄격한 매화가 정직성의 화면에서는 뚝뚝 떨어지는 물감들로, 사뿐사뿐 바람에 날리는 눈발처럼 붓의 율동에 따라 화면에 정지한다. 붓질 하나로 꽃 한 송이 혹은 한 덩이가 되는 매화는 작가 자신의 파레트를 통해 재생시킨 물감의 에너지, 붓을 통해 전달된 전기신호를 받은 순간 점화된 찬란함이다. 이 작은 덩어리들은 어둠 속에 점등된 크리스마스 트리의 전구보다 빛나며 차가운 도시를 밝히는 루미에르 장식보다 찬란하다. 이 화려한 화면은 붓질의 움직임, 터치 끝에 매달린 파르르한 물감의 미세한 율동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온몸을 휘감은 작가의 제스처가 그대로 투사된 것이 분명한 화면은 저 바닥 깊은 곳에서부터 상승하는 수액이 가지에 닿아 불꽃놀이처럼 꽃망울이 터트려진 순간의 포착에 집중한 결과이다. 우리는 화면의 배경이자 땅바닥인 푸르고 깊은 색채 위에 솟아난 나뭇가지와 꽃잎을 보면서 추운 겨울 내내 보아온 ‘촛불’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미술의 역사는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라고 정의했다. 정직성의 매화는 그래서 미술가의 매화, 그 시대의 매화로 화한다. 화면 위에서 휙휙 휘둘러진 검은 선들은 직선과 적절히 휘어진 선들로 도로를, 피어나는 꽃잎은 개개인의 손에 들려진 촛불을 상징한다. 흐드러진 매화가 존재하지 않는 도시에 가득한 매화꽃은 그래서 시대의 인고와 새로운 봄의 상징이 되고 화가 개인의 시야에 만발한 꽃들이 된다.
아남네시스, 병통에 대한 보고서
금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뉴스에서 말해지는 이 시대에 작가는 스스로의 계급성을 인지하며 살고 있다고 말한다. 급여도 사대보험도 없지만 가끔 소득이 있는 비정규직인 화가 그리고 기혼여성이며 아기 엄마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그림 그리는 시간을 얻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에 사회가 얼마나 비협조적인지, 여성작가로서 사회적 위치가 얼마나 열악한 것인지 새삼 되새겼을 시간들과 분노를 필자는 모르지 않다.
응시와 관조 사이, 관념과 실재 사이, 꽃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꽃이 되는 것, 남에게 보여지는 꽃이 아니라 스스로 꽃이 되는 것, 스스로 인고의 시간을 지나 매화가 되는 것, 그것은 주체적 삶의 회복이자 타자를 넘어서는 일이다. 꽃을 들고 돌아온 작가, 꽃이 공사장의 폐자재보다 훨씬 감각적인 존재인 것이 사실인 것처럼 스스로 꽃임을 인지하는 그 삶의 주체성이, 흐드러진 매화꽃이 낮이든 밤이든 만발할 수 있게 하는 힘일 게다.
아남네시스(anamnesis)의 사전적 의미는 “본인 또는 타인에 의해 관찰되는 환자의 과거 병력의 경과 및 병에 관련된 환경과 체험 등을 말하는 것”이다. 아남네시스는 작업장 한가득 등을 대고 선 정직성의 회화, 녹조와 매화를 바라보며 필자의 머릿속을 맴돌던 단어이다. 가정과 아이를 가진 여성 전문가로서 살아가는 것은 통증을 수반하는 일상을 감수하는 일이다. 게다가 우리 시대는 모두 아프다. 자연마저 아프고 사회도 아프다. 그 참을 수 없는 통증의 신호로 물은 녹조를 쏘아올려 표면에 부착했고 넘치고도 남는 녹조들은 가라앉아 징건한 스프처럼 물의 속성을 비웃는다.
사회적인 통증의 강도는 촛불의 개수로 계량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 수많은 촛불은 희망으로 비유되기도 하지만 조용한 시민들이 촛불을 든 것은 우리 모두가 함께 구성한 사회구조의 어느 부분에 생긴 균열의 통증 때문이다. 그래서 정직성의 녹조와 매화는 우리 삶의 보편적인 통증, 우리의 특별해진 사회 구성원의 병통에 대한 보고서에 다름아니다. 부디 그의 아남네시스가 생기넘치는 삶을 위한 자원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