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진녕
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미술관 동물원>(~8월13일)은 입구에 걸린 현수막부터 팬시하다.
파란 하늘을 바탕으로 기린과 홍학, 호랑이가 귀엽게 고개를 쳐들고 반긴다.
전시장 들머리에는 신비한 느낌을 주는 박찬용 작가의 우상 시리즈가 걸려있어 마치 동물들의 사육제에라도 온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환상성은 이내 가라앉는다. 박찬용 작가의 작품 바로 옆에 걸린 동물원의 우리를 소재로 한 평면 회화 작품 <연극이 끝난 후>가 걸려있다. 동물이 보이지 않고 동물을 ‘사육’하기 위해 기능적으로 만들어 놓은 타이어나 사다리, 그네 같은 물건이 그려진 그의 그림은 동물원의 본질을 앙상하게 드러낸다. 노충현은 동물 대신 호기심과 신기함이라는 감정의 충족을 위해 나들이를 나온 인간의 유희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쓰이는 최소한의 돈을 들인 허름한 조련 장치와 쇠창살을 두른 우리를 그렸다.
노충현 <연극이 끝난 후> 2015 캔버스에 유채 194x260cm
‘동물원’이라는 말에 연관 검색어로 동반하는 ‘나들이’ ‘소풍’을 기대하고 온 아이들 눈에는 뭔가 이상하고 부족한, 심지어는 들뜬 마음에 찬물을 끼얹는 그림이겠지만 아이 손을 잡고 온 학부형 관람객에게는 ‘동물원’의 본질을 들춰내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조나현 학예사는 “동물원이라는 말에서 가볍게 시작하더라도 ‘동물원’을 들여다볼수록 동물원이 품고 있는 무겁고 어두운 속성을 외면하기 힘들다”는 말을 했다. 덧붙여 그는 이번 전시가 “동물에 대한 인간중심적 태도를 비판하는 작품과 동물의 응시를 통해 환기된 인식의 변화를 다루는 작품, 그리고 예술가가 창조해낸 동물과 새로운 종에 관한 담론을 제시하는 작품으로 구성되었다”고 밝혔다.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 전시인 동시에 성인 관람객의 눈높이에서도 해석될 수 있는 담론을 담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시공간은 동물의 팬시한 대형 스티커가 붙어있고 종이 공작 교실도 있다. 반면 미얀마 양곤의 떠돌이 개의 삶과 동물원 우리에 갖혀 먹이와 안전이 보장된 ‘안락한 삶’을 누리는 동물을 찍은 투채널 비디오 작품(이소영의 <너의 영역>과 <제2의 보금자리>), 인간의 의지에 따라 모양을 변형시킨 동물(이동헌 작가의 플라스틱 백 시리즈), 언어권 별로 다르게 표기/흉내내지는 개짖는 소리를 모두 녹음해 금속제 드럼통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동시에 방송하는 사운드 설치 작품(김상진의 <개소리>), 본능적인 인간 욕구의 알고리즘을 동물의 배설욕구에 유머스럽게 표현한 작품(손현욱의 커넥션 시리즈),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대량으로 소비/살해당하는 동물 착취에 대한 의문(이선환의 <데드라인>) 등 동물을 매개로 다양한 담론을 끌어내는 작품이 등장하고 있다.
손현욱 Connection 2015 혼합재료 155x350x60cm
특별히 동물원을 찾지 않는한 현대인이 생활 속에서 동물을 만나는 방법은 두가지다.
하나는 반려 동물이고 하나는 음식으로 가공된 단백질 덩어리다.
국내에도 반려 동물 관련 산업이 조단위로 커질만큼 시장규모가 계속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이도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한 소비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버려지는 반려동물도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트 신선식품 코너에서 가공된 소와 돼지, 닭을 만난다.
그곳에서는 방목 사육된 소와 우리에 갖혀 사육한 소 중 어느게 마블링이 좋은지, 부드러운지를 고민하거나 ‘동물복지’ 마크가 찍힌 계란과 ‘무항생제’ 마크만 붙은 계란의 가격 차이가 3000원이 넘는 것을 두고 선택의 고민이 있을 뿐이다.
<미술관 동물원>전은 동물원에 대한 환상성을 부추기거나 또는 아부하거나, 그 반대로 인간의 흉포함과 육식성을 부정하며 동물 인권을 주장하는 전시는 아니다. 육식하는 동물 인간과 지구 생태계의 최종 포식자 인간이 동물과 맺는 여러 관계에 대한 담론을 조금씩 담고 있다.
정영목 서울대미술관 관장은 “창작과 윤리 사이를 오가는 현대미술 속 동물은 호기심으로 시작된 동물원의 처지와 비슷해 보인다. 작가는 동물을 통해 인간의 폭력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도 하고, 동물을 인간에 대입하여 현대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는 인간의 욕망과 진보의 역사를 담고 있는 담고 있는 동물원을 다양한 시각으로 풀어낸 작가의 작품을 전시했다”고 밝혔다.
박찬용 <가까운 것들의 관계-마주보는 개들> 2003 알루미늄 주물
박찬용 작가 인터뷰 박찬용 작가는 이번 <미술관 동물원> 전시장 들머리에 전시된 <우상>(2013)과 <가까운 것들의 관계-마주보는 개>(2003) 시리즈를 출품했다. 높이 솟은 뿔이나 몸집을 부풀리게 보이는 갈기를 갖춘 들소나 숫양, 사자의 머리가 박제가 되어 인간의 거주 공간 벽에 걸리는 순간 그들의 뿔이나 갈기, 날카로운 이빨은 인간의 위엄을 치장하는 장식재가 된다. 인간은 개량에 계량을 거듭해 맹렬한 폭력성을 갖춘 핏불테리어에게 가시가 박힌 목사리를 채워 자신을 자랑하는데 소비한다. 박찬용이 핏불테리어에게 부여한 순간은 핏불테리어가 한쪽 발을 들고 오줌을 누며 영역 표시를 하는 순간이다. 영역 표시를 하는 순간은 핏불테리어가 얼굴과 이빨로 으르렁거릴지라도 가장 공격에 취약하게 방치된 순간이기도 하다. “동물을 소재로 한 전시는 판타지 월드나 동물도감처럼 기획하고 시작하지만 결국은 인간이 어두운 욕망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동물 조각을 하는 이유를 들어봤다. “투쟁이 숫놈의 역할이다. 동물 사회의 중심은 모계다. 수컷은 싸워서 그 사회에 진입한다. 싸움을 잘해야 먹고 살고 짝짓기를 할 수 있다. 요즘 인간 사회 수컷의 ‘싸움’은 돈을 버는 것이다. 우상 시리즈나 가까운 것들의 관계에서 다루는 것은 폭력이다. 뭐든지, 아름다운 것들이라도, 힘을 갖기 시작하고 위대해지면 나중에 악으로 변질된다. 모든 힘은 주변 대상에게 악으로 군림한다. 우상에는 종교적인 뉘앙스도 들어있다. 원시종교에선 동물의 힘을 갖기 위해, 또는 음식으로서 그 동물을 먹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원했다. 인간은 전체 생태계에서 너무 강한 존재다. 원시 종교를 통해 자연에 대한 금기가 있었다는 점은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종교가 발달하고 종교의 도그마가 강해지면서 인간 이외의 것을 향한 저주가 강해졌다. 백인들이 노예 사냥을 하면서 교황청에 문의했다고 한다, ‘노예가 사람이냐고’. 인간의 자신의 종교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바탕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잔학한 폭력을 일으켰다. 자신과 동질감을 느끼는 집단에는 그런 폭력을 행사하지 않지만, 그 집단 바깥을 향해서는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했다. 개 작업은 199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내가 경남 진해 출신인데 그곳은 군항도시이기도 하고 도사견 싸움이 흔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군 출신이라 그런 쪽 문화가 많이 남아있기도 하고, 진행군항제에서 벚꽃장이 열릴 때 전국 규모로 개싸움이 열렸다. 어릴 때부터 개싸움을 많이 봐서 투견은 익숙했다. 그러다 커서 내가 직접 핏불테리어를 키우기도 했고, 투견장에 가보기도 하고 개 농장에서 투견키우는 사람들과 3년 정도 붙어 놀기도 했다. 그들이 어떻게 싸움개를 만드는지도 보고. 핏불테리어는 겉보기와 달리 병에 약하다. 특히 전문 투견은 전문 투견은 근친교배가 많아서 유전적으로 굉장히 취약하다. 핏불테리어가 단모종이라 더위는 괜찮은데 추위엔 약하다. 겨울에 병 걸리면 그대로 죽는다. 내가 작업실을 파주쪽으로 옮기면서 핏불테리어 키우는 것을 포기했다. 이쪽이 좀 춥다. 전라도나 경상도 등 따뜻한 남도 지방에 싸움개 농장이 많은 게 그런 이유 때문이다. 사실 애완견이 더 불쌍하다. 짖는다고 성대를 없애고 거세시킨다. 이건 고양이 중성화와는 다른 맥락이다. 개에게 옷입히는것도 이상한 문화다. 핏불은 옷을 입혀놓으면 그 옷을 다 뜯어내고 그걸 심지어 먹는다. 개를 작품으로 만들기 시작한 이유도 그런 관점에서 시작됐다. 핏불은 인간의 폭력적인 면을 가장 강하게 반영하는 동물이고, 애완견은 인간의 장난감, 살아있는 장난감이다. 인간이 지구라는 생태계의 특출나게 위대한 존재가 되면서 그 주변에 폭력을 행사했다. 그 피해를 가장 많이 보고 변형되고 기형화된 게 개다. 개의 다양한 품종 중 많은 종류가 개의 기형적인 것을 특질화 시킨 것이다. 심지어 제왕절개를 안하면 새끼를 못낳는 품종도 등장했다. 인간은 이런 잔인함을 사랑으로 치장한다. 평창 알펜시아 콘서트홀 앞에는 설치된 <미친놈, 드디어 날다>는 내가 키우던 ‘탱고’라는 이름의 핏불테리어를 모델로 2000년대 초반에 만든 작품이다. 탱고는 불리보이라는 미국의 유명한 투견의 손주다. 탱고는 교미를 못할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교미를 하는 도중에도 상대를 물어뜯어서 불가능했다. 생후 3개월 정도의 핏불테리어 강아지를 그들끼리 모아놓으면 아침마다 한 마리씩 죽어나갈 정도로 공격적인 품종이다. 탱고의 폭력성을 전투기의 폭력성과 결합시켜서 제작한 게 <미친놈, 드디어 날다>이다. 2001년 미국에서 9.11테러가 나고 폭력성을 비행기와 결합한 작품이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건물이 흘러내리는 작업도 했었는데 자본주의 끝에 대한 이야기였다. 첫 개인전 때 자본주의가 거의 끝에 왔다는 생각으로 작품 제작했었다. KFC 할아버지 몸에 김일성 몸을 달거나 건물이 녹아내리는 등 그런 작품을 선보였었다. 과거에도 그 사회에 가장 파워풀한 존재가 가장 큰 건물의 소유자였다. 왕의 궁궐이나 서양의 성이나 큰 교회가 그런 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가장 많이 버는, 그래서 권력을 가장 많이 가진 사람이 가장 높은 건물을 소유한다. 현대의 고층 건물을 소재로 작업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어떤 특정인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본성이 개의 기형성을 키우고 폭력성을 극대화시킨 품종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욕심이 자기 입맛대로 개라는 생물을 몰고 간 것이다. 원시 종교는 그런 맥락에서 지금의 현대종교보다는 낫다고 본다. 그래서 ‘우상’ 시리즈를 시작한 것이다. 종교와 상업주의가 만난 지금의 ‘현대 종교’가 됐다. 예수가 살아 있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대형 교회를 제일 싫어하지 않았을까? 인간은 싸움개에 인간의 본능을 투영했듯, 신에게도 인간의 폭력성을 투영한다. 인간의 잔학함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해달라고 종교에 요구한다. 미국은 전쟁을 통해 평등한 나라로 출발해 위대한 강국을 표방했다. 그러다가 세계의 경찰을 표방하면서 침략 전쟁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세상이 다 그렇다. 시작은 좋았다 하더라도 권력을 쥐면, 인간의 본성을 아낌없이 발휘한다. 돌이켜 보면 2002년 월드컵 무렵에 ‘각광받는 젊은 작가’였고 2006~2007년 나보다 ‘좀 더’ 젊은 친구 바람이 불면서 나는 ‘중견 작가’ 대열로 편입된 것 같다. 2000년대 초 미술 붐이 불었을 때 보이던 미술판 친구들은 다 어디갔는지 모르겠다. 젊었을 때는 교수는 되고 싶기도 했다. 연금 때문에(웃음). 몇 년 전부터 강의는 없애고 작업에 집중하려고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작품이 팔리는지는 알겠는데... 내 꿈은 돈은 다른데서 벌고, 작업은 작업대로 하고... 그게 꿈이었다. 작품을 팔기 시작하면 소비자의 취향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앞으로 싸움개나 매사냥에 동원되는 매나 독수리처럼 눈을 가리거나 입에 재갈이 물린, 맹렬한 공격성을 인간에게 제압당하고 조종당하는 동물 작업을 이어갈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