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선인들의 마음, 보물이 되다 –新國寶寶物展 2014~2016
장 소 :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장 중근세관
기 간 : 2017.5.13.(토)~2017.7.9.(일)
글/ 김진녕
2014~2016년에 새롭게 지정된 국보와 보물을 소개하는 <선인들의 마음, 보물이 되다 신국보보물전 2014~2016>이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청 공동 주최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동산분과)를 거쳐 새로 지정된 121건의 국보와 보물 중 50건이 문화유산이 선보이는 자리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등 국공립기관기관, 대학, 성보문화재단 등 개인소장가 28곳에서 출품을 협조해 한자리에서 새롭게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있다.
1.
이번 전시에서 오백나한도와 수월관음도 등 국내에 몇 점 안남은 고려 불화와 고려 철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먼저 고려 철불을 보자.
2015년 4월에 보물 제1873호로 지정된 원주 학성동 철조약사여래좌상은 국립춘천박물관의 소장품이다.
이 철조약사여래좌상은 일제강점기까지 강원도 원주시 학성동(읍옥평) 들판에 방치되어 있던 다섯 구의 철불 가운데 하나다. 이 중 3구는 동일한 양식을 지닌 편단우견의 철불좌상이며, 나머지 2구 중 하나가 바로 이 철조약사불좌상이다. 3구의 편단우견 철불 좌상과 이 철조약사불좌상, 철조아미타불 좌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본관 9976)은 모두 원주 본부면 읍옥평(邑玉坪, 옥뜰)에서 발견된 것인데, 읍옥평은 지금의 학성동 일대에 해당하며 원주천 인근에 위치해 있다.
원주 학성동 철조약사여래좌상. 국립춘천박물관
2015년 동산문화재 분과위원회 회의록에 대한 평가를 보자.
“철조약사불 좌상은 등신대에 가깝고(높이 109cm, 무릎 폭 76cm, 무릎 높이 17.5cm), 전체적으로 사람과 비슷한 안정된 신체 비례와 단아한 형태미를 보여주고 있다. 보존상태가 양호한 나말여초기의 불상으로 철불의 제작기법 뿐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약사여래의 도상을 알려주며 원주지역에서 유행했던 조각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특히 오른손을 가슴까지 들어 손에 약기(藥器)를 받들고 있는 약기인을 취한 유일한 철불이라는 점, 철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분할선이 보이지 않고 표면이 매끈하게 처리되어 있어 밀납주조법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작품이라서 조각사적 의의가 있다.
정수리 부분에 솟은 육계는 다른 고려 철불에 비해 낮게 표현되어 있다. 갸름한 얼굴형에 온화하고 부드러운 표정의 상호, 가늘고 긴 목 등에서 철원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상 등 9세기를 풍미했던 현실적 사실주의 경향을 뚜렷하게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시대적 요소와 지역적 요소를 가미하여 색다른 불상 양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즉 어깨에 표현된 불꽃처럼 표현된 주름이라든가 오른 발목에 표현된 독특한 잔물결의 띠주름과 외매듭으로 묶어 나팔처럼 늘어뜨린 가사 끈의 표현, 꼬불꼬불 거리며 무릎 아래로 늘어뜨린 부채살 주름 등에서 시대적, 지역적 특색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다.
철조약사불좌상과 원주 봉산동 석불좌상의 경우처럼 약합을 가슴까지 올려들고 있다거나 왼쪽 어깨위의 세모꼴로 접힌 가사 주름이 표현된 점은 1085년 지광국사 현묘탑 옥개석의 불좌상과 동일한 형식이어서 지광국사 현묘탑과 시기적으로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물결모양의 가사 주름은 1020년 현화사 칠층석탑 부조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이 철조약사불좌상의 조성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철조 약사여래좌상의 머리 부분
이 철조약사여래좌상이 전시된 장소 입구는 고려실이다. 바로 이 입구 앞에 또 하나의 고려시대 철불이 전시돼 있다. 철조 아미타불 좌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 철조 아미타불좌상은 철조 약사불 좌상처럼 철조 아미타불 좌상도 원주 학성동에서 출토됐다. 이 두 철불은 닮은 듯 다르다.
철조아미타불의 머리 숱(나발)은 마치 모자처럼 무성하고 구렛나루가 내려와 있고 육계도 더 높고 목주름(삼도)의 표현도 간략화됐다.
눈썹이 버드나무잎처럼 날렵하고 휘어져있게 표현돼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광대나 콧망울이 좌우하는 코의 인상은 두 철불이 다르다. 다만 그로 인한 인간적인 풍모는 공통적이다.
(좌)아미타불과 (우)약사여래의 머리 부분 옆모습
두 철불의 상호는 경주 남산 석굴암의 본존불에서 보는듯한 완벽히 이상화된 부처의 얼굴이라기 보다는 한국 땅 어딘가에 살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다. 이 불상의 제작 시기가 라말여초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시대 청년의 얼굴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철조약사불 좌상의 얼굴이 좀 더 콧망울이 크고 상대적으로 광대가 도드라지지 않는 펑퍼짐한 남방계 얼굴이라면 철조아미타불 좌상은 콧망울이 발달하지 않은 대신 길이가 긴 북방계 스타일의 코다. 이런 소박하고 평범한 인간적인 분위기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이나 조선시대의 획일화된 불상에서 느낄 수 없는 종류다.
이 불사를 담당한 장인들이 불상을 조성할 때마다 얼굴을 표현할 때 특정 인물을 두고 모델링을 한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이 불상이 발견된 원주라는 지역도 이 철조불상의 드러나지 않는 이력을 상상하게 만든다.
고속도로와 철도, 비행기로 이어져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이 된 21세기의 한국에서 지리적 격차는 별의미가 없지만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포장도로가 전혀 없었던 19세기 이전의 한국에서 수로는 물자의 대량 수송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했고 수로와 평야를 낀 지역은 예외없이 큰 지역거점으로 활용됐다.
학성동은 원주천 인근이고, 원주천은 남한강 수계의 일부다. 한반도에서 철의 생산지로 유명했던 충주는 원주와 남한강 수계로 연결된 곳이다.
원주는 남한강 물길을 따라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통한다. 이런 이유로 특히 고려전기 원주는 불교 및 정치적인 면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기록에는 고려전기, 이곳 원주와 관련된 왕사, 국사가 4명이나 있으며, 원주 일대의 세곡을 모아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개경으로 운반하는 흥원창(興原(元)倉)이 있었던 곳이라고 전한다. 또 왕실에 딸을 시집보내고 때로는 고려왕실과 대립했다는 원주 원씨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고려라는 시스템의 특징이 지방 호족의 득세이고, 원주는 그 거점 도시 중 하나였다는 이야기다.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곳에 재화가 쉽게 쌓이고 이 재화를 지배하는 세력이 형성되면 그 잉여의 경제력으로 문화가 생긴다. 라말여초, 고려시대 초기 원주 지역 호족이 쌓은 잉여의 경제력은 대형 불사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 일부가 지금 우리가 보는 원주 학성동 출토 고려 철불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장인들은 개성적인 표현을 철불에 담았다. 마치 각 지역에 발호하는 호족세력이 모두 달랐던 것처럼. 고려 왕조의 창업자 왕건이 지역호족과 통혼해 수십명의 왕비를 두었다는 기록은 왕건이 호색한이라기 보다는 통일신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건설한 왕건이 지방호족을 고려라는 시스템으로 통합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보는 게 맞고, 그만큼 신라의 통일 이후 꾸준히 지방 호족이 성장했다는 반증으로 읽힌다. 그리고 고려 왕조는 건국 이후 내내 지방 호족과 세력 싸움에 시달렸고 조선이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제 국가 출현의 명분이 됐다.
이렇게 ‘고려’라는 시스템을 바라보면 각 지역 세력권마다 다른 개성의 표출은 필연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려 초기에 제작된 불상을 통해 모두 다르게 표현돼 있어, 생동감을 느끼는 청년 고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
비로자나불의 뒷모습
이런 고려 청년의 얼굴은 국립중앙박물관 3층 불교 조각실에서 더 많이 만나볼 수 있다.
3층 층계에서 바라다 보이는 라말여초로 표시된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휘영청 반달처럼 굽은 관습화된 눈썹 표현을 빼면 완벽하게 현대미남의 두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미남불이다.
제작연대가 10세기로 표시된 포천 출토의 <철조 불 좌상>도 눈 길이보다 눈썹 길이가 짧고 상호가 길죽한 매우 개성적인 고려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다.
제작연대가 10세기로 표시된 포천 출토의 <철조 불 좌상>도 눈 길이보다 눈썹 길이가 짧고 상호가 길죽한 매우 개성적인 고려 청년의 얼굴을 하고 있다.
머리만 남은 철조 불두 두 점도 모두 턱의 표현이나 콧망울, 눈썹까지 모두 제각각의 표현을 담고 있어 실제의 고려 청년 얼굴로 모델링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이런 개성적인 얼굴 표현은 서산 보원사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남북국시대 말기(8~9세기)의 대형 철불이 갖고 있는 ‘원만한’ 상호표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포천출토 철조 불 좌상
2.
이번 전시는 국내외 통틀어 160점 정도만 전하는 고려불화를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개성 넘치는 고려 장인의 표현력은 오백나한도와 수월관음도에서 다시 확인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중인 5점의 오백나한도는 보물 제1883호로 일괄지정되었고 십육나한도중 현승훈 회장 소유의 제7가리가존자는 제1882-1호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유의 제15 아벌다존자는 제1882-2호로 보물지정됐다.
이번 전시는 보물지정된 오백나한도와 십육나한도를 모두 한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기회다.
고려 수월관음도는 국내외에 40여 점이 남아있고 그 중 국내에 있는 것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품(보물 제926호), 아모레퍼시픽미술관(보물 제1426호), 우학문화재단(보물 제1286호) 소장품 석 점이었다.
그러다 최근 두 점이 추가됐다.
지난해 윤동한 회장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고려 수월관음도(화면 크기 91×43㎝, 견본채색, 14세기 중엽)와 성보문화재단 소유의 고려 수월관음도(화면 크기 103.5×53.0cm, 견본채색, 고려 후기 14세기)가 그것이다.
고려 수월관음도(보물 1903호)
윤동한 회장의 기증품은 기증 직후인 지난해 10월 일반 전시를 하고 현재 보존 처리 중이고 성보문화재단 소유의 수월관음도는 지난 2010년 10월 성보측이 개인 소장자로부터 구입한 뒤 보존 처리가 끝난 작품이다.
성보문화재단 소유의 수월관음도는 2016년 7월1일자로 보물 제1903호로 지정됐다. 국내에 보물 지정된 수월관음도가 4점으로 늘어난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해 동산문화재 분과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달았다.
“이 그림은 관음보살이 바위 위에 약간 오른쪽을 향하여 반가좌하고, 오른손 앞쪽에는 정병, 화면을 향하여 왼쪽 아래에는 선재동자, 등 뒤 쪽에는 대나무가 묘사된 고려불화 전형의 수월관음도상이다. 당초원문, 소극적인 베일 마엽문의 표현 등에서 형식화 경향이 엿보여 제작 시기는 14세기 중반으로 짐작된다.
그림 중 대나무, 눈썹과 콧수염, 정병 등 안료가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고 두광의 일부와 화면을 향하여 오른쪽 바위 부분 등에 보견을 하였고, 양손으로 잡고 있는 염주 역시 후보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현존 고려 수월관음도의 대부분이 오랜 세월을 지내오면서 상당한 화면 손상과 그에 따른 수복잡업을 거쳐 왔음을 염두에 두고 볼 때, 더구나 이 그림의 본존은 물론 선재동자의 형상이 매우 명료하고 수월관음도상의 구성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음을 고려할 때 부분적인 안료의 박락과 보견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전체적으로 화면에 손상이 있어 아쉽기는 하지만 원래의 모습을 그다지 잃고 있지는 않다. 수리 및 복원을 거쳐 화면이 안정화되어 있다. 많은 부분에 발생된 안료박락 흔적은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처리하여 원본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 것임. 따라서 현재의 화면 상태는 양호하고 수월관음도가 갖고 있는 특징적 요소들 또한 비교적 잘 드러나 있으므로 국가문화재(보물)로 지정 관리하는 것을 고려해 볼만하다.”
수월관음도 부분
그림 속에 눈에 띄는 부분은 선재동자이다.
국내에 있는 수월관음도 중 성보문화재단 소장의 수월관음도 속 선재동자의 존재감이 가장 뚜렸해 보인다.
측면을 보고 있는 관음보살이 보타락가산 금강바위 위에 반가좌로 앉아 보살도가 무엇인지를 청문하는 선재동자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다. 청문하는 선재동자는 예의바르게 무릎을 반쯤 구부려 합장하고 관음보살을 우러러 보고 있다.
통통한 볼에 붉은 빛이 도는 선재의 얼굴은 아이의 얼굴이다. 머리카락은 두 가닥으로 땋아 붉은색 띠로 묶었고, 붉은색 천의와 주름이 잡힌 바지를 입었고 허리띠를 맸다.
관음보살을 올려다보는 선재의 푸른빛이 감도는 무구한 눈동자는 16세기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아기 천사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런 선재동자의 모습은 지난 가을 공개된 윤동한 회장 기증본 수월관음도 속 선재동자와 여러모로 비교가 된다. 또렸한 이목구비를 지닌 윤동한 기증본 속 선재동자는 발걸음도 훨씬 더 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고 심지어 시선은 어찌된 일인지 관음보살 대신 화면 밖 관람객에게 한눈을 팔고 있다.
보존처리가 끝나면 더 확실한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윤동한 기증본 속 선재동자와 성보문화재단 소장품 속의 선재동자의 묘사는 양식화된 수월관음도 속에서 표정과 시선, 몸짓의 구체적인 구현을 통해서 작가와 시대의 자의식이 조금이나마 드러나는 부분이란 점에서 흥미로운 대목이다.
3.
보는 이에게 시대에 대한 상상을 증폭하게 하는 작품은 2009년 서울 청진동 235-1번지에서 출토된 백자 항아리 석 점이다. 이 백자 항아리 석 점은 2016년 7월 보물 제1905호로 일괄 지정됐다.
조선백자 항아리는 외형상 몸체의 무게 중심이 어깨 부분에 있고 비교적 장신인 입호立壺와 무게 중심이 몸체 중앙에 있어 둥글게 보이는 원호圓壺로 크게 나뉘는데, 청진동에서 출토된 항아리 3점은 조선 전기 항아리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입호 형태가 두 점, 원호 형태가 한 점이다. 입호는 각각 높이가 35.5cm으로 갖지만 바닥 지름이 15.2cm과 16cm으로 차이가 난다. 원호는 높이가 28, 바닥지름이 13.3cm이다.
이런 형태의 백자호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약간 더 크고 당당한 작품이 있다.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의 기록을 보자.
백자호 15-16세기, 중구 남대문로 발견 (신수 2587, 2586)
“백자호 A,B형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2가 출토의 백자호(36.8cm)와 유사하며 그 예가 드문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중구 남대문로 2가에서 발견된 양질의 백자호 2점, 입호(신수2587) 1범과 원호(신수2586) 1점이 있다. 이 중 입호는 높이 36.8cm으로 청진동 출토 항아리보다 크나, 청진동 백자호 3점의 경우 출토지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에 비해 그 가치가 탁월하다 할 수 있다.”
출토지가 확실해서 청진동 출토 백자호가 가치가 더 있다는 것이다.
그럼 출토지 청진동 235-1번지에 대해 알아보자.
청진동 백자항아리 출토 모습
청진동은 조선시내 내내 유흥가였다. 광화문 네거리부터 종로 방향은 조선시대 내내 ‘구름처럼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운종가(雲從街)라고 불리우던 다운타운이었다. 지금도 상점과 술집이 밀집해있지만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그 유서깊은 다운타운, 살림집 밀집 지역이 아닌 곳에서 건물 기초 부분에 잘생기고 당당한 순백자 석 점이 묻혀졌을까. 전문가들은 이 작품을 조선 초기인 15~16세기에 관요에서 만들어진 양질의 백자로 판정하고 있다. 만들어진 직후부터 당대의 위세품이었다는 얘기다.
두 점의 입호 중 ‘일부 표면에 죽은깨와 같은 여러개의 점이 관찰’되는 입호에는 ‘2/3선 아래에는 음식물이 베어나온 얼룩진 현상이 관찰된다’고 한다. 관상용이 아닌 실생활에 쓰였던 그릇이란 얘기다.
조선 백자가 본격적인 관람용 컬렉션의 대상이 된 것은 일제 강점기 한반도로 이주한 왜인들의 수집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때 활동한 고미술상이 남긴 기록을 보면 백자를 ‘부엌용 기물’이라고 해서 꺼렸다는 일부 조선인 컬렉터의 반응이 남아있다.
누가 왜, 이 기물을 땅에 묻었을까.
재미있는 점은 이 235-1번지의 20세기 역사다.
지금 235-1번지에는 KT의 신사옥으로 쓰이는 콘크리트와 철골, 유리가 결합된 빌딩이 들어서 있다. 지금 형태로 재개발이 되기 전 이 곳은 청진동 피맛골로 불리는 곳의 안쪽 골목이었다.
그 안쪽 동네에는 대개 허름한 한옥을 개조한 상점이 있었고 유일하게 번듯한 건물이 하나 있었다. 그게 유진기업의 본사이고 235-1번지였다. 유진기업은 이 곳에서 청진동 재개발 사업을 주도하다 2008년 6월 청진동 자회사를 GS건설에 매각하고 빠져나갔고 그 재개발 조합이 지은 게 바로 오늘의 KT신사옥이다.
당시 유진기업 역시 재개발 사업을 위해 청진동 235-1번지를 사들인 것이라 본사건물은 지하를 파지 않고 드라이비트같은 간편한 자재로 마감한 2층 건물을 지었다.
유진이 이땅을 사기 전 청진동 235-1번지는 1958년부터 2004년까지 ‘장원’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으로 활용되던 곳이다. 장원은 3공화국 시절 공식적인 정치의 장소로 활용되던 유명한 요정이다.
광화문 라인 뒤편이던 청진동 일대의 한옥이 한국전쟁 때 부서졌다는 기록은 없다. 장원도 기존 한옥을 그대로 활용하다 2004년 필동으로 영업장을 옮기면서 이땅을 매각했다. 청진동 235-1번지를 사들인 유진은 그 땅을 파지않고 모델하우스같은 건물을 지어 재개발 사업을 진행했다. 터파기 공사를 하지 않았기에 땅 속에 남아있던 백자 석 점이 2009년 재개발을 위해 지표 조사 중 땅 밖으로 얼굴을 내밀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당당하게 잘생긴 백자 항아리 석 점은 언제 땅 속에 묻힌 것일까.
15~16세기 만들어진 직후에 한 두 번 쓰이다가 뭍힌 것일까? 청진동 일대는 그때도 번화가였으니 껴뭍거리로 뭍혔을리도 없을 것이고 이 집을 갖고 있던 이가 귀하게 보관한다고 뭍었을 것이다. 이 정도 크기의 기물을 음식 그릇으로 쓰는 집안이라면 왕실 일가나 고위직 공무원을 지낸 세도가였을텐데 그런 이가 운종가 앞에 살림집이 있었을까? 조선 중기 이후 이 지역이 번화가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원소유자의 손을 떠나서 컬렉션의 대상이 되던 어느 시기에 땅에 뭍힌 것은 아닐까?
이 건물이 한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것은 3공화국 정치인의 핫플레이스였던 장원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50년 가까이 영업했던 장원의 주인은 이 기물의 존재를 몰랐을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어쨌든 지표 조사도 없던 시절 이 터를 샀던 기업이 재개발 사업권 매각에만 관심이 있어서 기초공사를 하는 건물을 짓지 않고 터파기 공사없이 가능한 ‘임시 건물’만 지었기에 이 기물이 세상구경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