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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잊고 지낸 고려의 생기발랄, 자유분방 -<철, 검은 꽃으로 피어나다 - 철화청자 기획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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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철, 검은 꽃으로 피어나다 - 철화청자 기획특별전
기간: 2017.3.21 - 9.30
장소: 서울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청자라고 하면서 전혀 청자처럼 보이지 않는 도자기가 있다. 형태는 청자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전체가 짙은 갈색이다. 의아하게도 여기에도 청자를 붙여 보통 철화(鐵畵)청자라고 한다. 

 
청자 철화모란당초문 난주(欄柱), 12세기 높이 48.5cm(좌) 48.3cm(우)
 

철화청자를 본격 소개하는 특별전을 계기로 전문가에게 궁금증을 묻는 자리를 만들었다. ‘철화청자의 특징은 무엇이며 왜 청자로 분류되는가’에서부터 시장에서의 평가까지를 물었다. 답을 해준 분은 고미술딜러 경력40년에 법원감정사로도 활동했던 이완식사장이다.(현재 그는 화랑을 운영하고 있지는 않다)

 


청자 철화서과문(西瓜文) 호, 12세기 높이 14.2cm

-철화 청자는 청자 책이나 도록 끝에 몇 점이 섞여 나온다. 갈색 바탕에 검게 보이는 문양이 들어간 것이 대부분이다. 철화라는 말은 어떻게 붙었나? 또 청자와는 무슨 관계인가? 

-철화는 철채(鐵彩) 안료로 그림을 그렸다(畵)는 말이다. 철채는 별도의 안료가 있는 것은 아니다. 철분이 많이 든 자토(赭土), 즉 적색 점토를 물감처럼 쓴 것을 말한다. 이것을 물에 풀어 붓에 찍어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 위에 청자 유약을 입혀 구은 것이다. 청자 유약을 쓴 것도 그렇지만 자기를 만드는 흙도 청자와 마찬가지로 점토이다. 단 청자의 흙 보다 입자가 거칠고 점성이 약한 단점이 있다. 이런 이유로 청자와 같은 계통으로 본다.    


청자 철화유문(柳文) 매병, 12세기 높이25.2cm

- 지금 자토를 찍어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했는데 전시품에는 전체의 갈색 바탕에 희게 문양을 넣은 것도 있다. 이들도 철화라고 하는가.
- 전체가 갈색인 것은 전부 칠한 때문이다. 이것은 문양만 그린 철화와 구분해 철채(鐵彩)청자라고 한다. 흰 문양은 백토를 풀어 그림을 그린 것이다. 원래는 점만 찍던 것-이는 퇴화(堆花)라고 부른다-에서 발전한 것이다.
모두 좋지 않은 태토의 색을 카무플라주하기 위한 것이다. 문양은 그 위에 보인 정성쯤이라고 해도 좋다. 이렇게 그림이 든 갈색청자를 과거 일본컬렉터들은 회고려(繪高麗)라고 불렀다. 


청자 철화초봉문(草蜂文) 유병(油甁), 12세기 8.3cm 

- 철화는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가. 청자와 비슷한 시기인가.

- 청자는 9세기 말이라고 한다. 철화자기는 그보다 늦어 12세기 들어서이다. 원나라 때 하북성 민간가마였던 자주요(磁州窯)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거기서도 질이 좋지 않은 태토(胎土, 도자기 굽는 흙)를 감추기 위해 백토를 바르고 그 위에 철채로 그림을 그렸다.
자주요 철화의 문양은 고려 철화청자에도 보인다. 그 영향을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예를 들어 고려 철화에는 몸통 하단과 어깨에 보이는 곡선의 띠를 두른 것 같은 문양이 있다. 이것은 자주요에도 흔히 보인다. 모란꽃을 덩굴과 함께 그린 모란당초(唐草) 문양도 비슷하다. 


청자 철백화(鐵白畵) 국화문 병, 13세기 높이 17.5~26.1cm 

- 고려의 관요로 알고 있는 강진이나 부안 같은 곳에서도 이런 철화자기도 만들었나?

- 발굴자료를 보면 그곳에서도 만들었다. 그러나 철화자기는 거의 전국적으로 만들었다고 보인다. 알려진 것만 용인, 강릉, 제천, 음성, 부산, 양산, 해남, 영광 등 다양하다. 고려하면 청자가 떠오르지만 이를 극히 제한된 사람만 썼다. 궁중, 왕가, 귀족, 사철 등이다. 그 외 지방호족들이 이 철화청자를 쓴 듯하다. 출토지 외에 옛날 업자들이 한 말이 있다. ‘청자는 지방호족 무덤에서 나오기도 하고 없기도 하지만 철화는 거의 모든 무덤에서 다 나왔다’고 했다. 입이 넓적한 광구병은 그 대표적이다.


청자 철채상감화문 매병, 13세기 높이 29.5cm

- 과거 회고려 시절에 철화청자는 매우 비쌌다고 들었다. 양이 적은 때문인가. 

- 근래까지 철화 청자는 매우 희귀했다. 특히 백토 상감으로 학 문양을 넣은 철화 같은 것은 극히 드물었다. 억대를 호가하는 일도 흔했다. 그러다 90년대 후반 달라졌다. 이제는 비밀도 아니게 됐는데 이때 중국을 거쳐 북한에서 대거 유물이 들어왔다. 시장이란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는 것 아닌가.



청자 철화초문(草文) 병, 12세기 높이 20.2cm

 
- 철화 청자를 보고 있으면 고려청자에서 보던 엄격하고 정세(精細)하다는 느낌이 덜하다. 오히려 분청사기와 같은 분방함이 있다.

- 철화는 최상류층에서 사용한 자기이 아니다. 그런 만큼 자유재량의 폭이 컸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가운데에서도 어떤 틀(문양에 있어)을 지키려고 애를 쓴 것이 있다. 하면 반대로 그 제약을 벗어나 붓질이 거칠고 활달하기 그지없는 것도 있다. 후자에는 다분히 분청사기와 같은 고려서민의 정서가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청자 철화백화(鐵畵白畵)연당초문 주자, 12세기후반 13세기초반 높이 32.3cm

- 개인적인 질문이지만 생전의 윤장섭 회장을 만난 적이 있는가.

-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꼼꼼하고 철저한 면에 대해서는 여러 번 들었다. 이 전시를 봐서 알겠지만 형태면 형태, 문양이면 문양을 가급적 체계적으로 수집하려고 애쓴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 애초에 미술관을 염두에 두고 모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전시는 단순히 철화청자 소개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청자만 알고 있던 고려도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는 계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전시에 관람객이 적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하다. 돌아가신 수집가에게도 면목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수준인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4월20일 목요일 전시장을 찾았을 때 관람객은 필자와 이완식 사장 단 두 사람 뿐이었다. 정리=y씨)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2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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