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일본실 상설전시 <조선통신사가 지나간 길–도카이도 53차>
2017.04.03-
글/ 김진녕
국립중앙박물관의 해외실은 유물 수집이나 전시 규모가 제한적이다.
신안해저유물선 덕에 중국 도자 컬렉션이 국립이라는 이름값을 하고, 이왕직미술관 시절에 모은 컬렉션 덕에 일본실이 정기적인 교체전시를 하는 정도다.
이렇게 가용자원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일본실에 한 가지 주제로 전시를 꾸민 상설전이 등장해 눈길을 끈다. ‘조선통신사’를 주제로 전시를 꾸민 것.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4월3일부터 상설전시관 3층 일본실에서 <조선통신사가 지나간 길–도카이도 53차>라는 주제로 상설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이번에 공개하는 전시품은 도카이도 53차를 다룬 병풍 2점, 조선과 일본간 외교 문서에서 왕이 이름을 쓰는 것을 놓고 외교 분쟁을 벌인 양국의 문신 초상을 담은 족자 2점, 액자 1점, 목판화(우키요에浮世繪) 8점, 그리고 서적 2점으로 총 14점이다.
이번 전시는 조선통신사의 일본 내 이동과정을 기록으로 남긴 임수간의 <동사일기東槎日記>가 전시품간의 주요 연결고리로 활용되고 있다.
1711년(숙종 37년) 왜에 파견된 조선통신사행의 부사(副使) 임수간(任守幹, 1665~1721)은 사행록(使行錄)인 <동사일기>를 남겼다. 이 책에는 임수간이 통과했던 도카이도(東海道)라고 불리는 교토에서 에도까지 역참의 풍경이 들어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 유산인 우키요에는 도카이도 53개 역참(53차)을 담은 게 많고 국립중앙박물관도 이를 소장하고 있다. 여기에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은 신규 소장품으로 <도카이도 53차> 6곡 병풍을 확보했다. 이번 전시에서 우키요에와 금박병풍은 임수간이 글로 남긴 1711년 일본 도카이도의 풍경을 재현하는 시각자료이다.
막부 시대 일본 천황이 살던 교토와 실질적인 일본 지배자인 도쿠가와 막부가 자리잡고 있는 에도(江戶, 현재의 도쿄)를 잇는 길인 도카이도는 예부터 일본 내륙의 주요 통로로 활용된 길이다.
도카이도 53차도 병풍 각169.5×372.1
도카이도 53차도 병풍 부분
에도 막부의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쇼군직 승계 기념차 통신사 파견 요청을 받은 조선 정부는 1711년 규모만 497명에 달하는 역대 최대규모 통신사를 파견하고 단장 격인 정사에 당시 성균관 대사성(정3품)이던 조태억(1675~1728)을, 부사에 임수간을 임명했다.
가노 쓰네노부(狩野常信) <조태억 초상>
당시 조태억의 왜측 파트너는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였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유학자 겸 정치인으로 주자학뿐만 아니라 서양문물에 대한 저서를 남기는 등 일본 근대 역사에서 주요 인물로 다뤄지고 있다. 아라이 하쿠세키가 주도한 왜측 국서에 조선 사회에서는 금기인 조선 국왕(중종)의 실명을 쓰는 바람에 조선측 사신이 국서 개찬을 요구하는 등 실랑이가 벌어졌고 조태억은 귀국 뒤인 1712년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400년 전 한일 외교 관계의 미묘한 마찰을 주도한 당사자인 조태억과 아라이 하쿠세키를 그린 초상화도 이번 전시에 나왔다.
조태억의 초상은 일본 화가 가노 쓰네노부(狩野常信)의 작품. 가노 쓰노네부는 에도 막부 시절 가장 이름높은 화가집단이던 가노파(狩野派)의 한사람이다.
임수간의 <동사일기>에는 1711년 11월8일자에 “관백이 화사(畫師)를 보내어 조복(朝服, 조선의 관복)과 양관(梁冠, 조복에 쓰는 모자)을 그려 가지고 갔다”는 기록과 11월10일자에 “관백이 화사 고천수(古川叟)를 보냈는데 그는 자손 및 제자 10여 인을 거느리고 와서 보고 두어 폭을 그려가지고 갔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조태억의 초상화 왼쪽 아래에 ‘法古印川叟筆’이라는 서명이 보인다. 고천수는 쓰네노부의 호이다. 이 그림이 1711년 조선통신사가 왜를 찾았을 때 그 현장에서 그려진 그림인 것이다.
조태억의 파트너로 당시 조선통신사 영접을 총지휘자인 동시에 조선국왕의 실명을 국서에 거론하는 ‘국휘(國諱)논쟁’을 벌였던 아라이 하쿠세키의 초상은 조태억의 초상보다 100년 뒤에 그려진 작품이다.
박물관측에선 우키요에 작품인 <도카이도 53차>에도 교토에서 에도까지 이르는 53개 역참의 지명을 도표로 설명하고 그 중에 가려뽑은 오쓰, 오카자키, 요시다, 가나야, 하라, 하코네, 가나가와, 시나가와 등 8개의 명소를 담은 우키요에와 8개 지역에 대해 언급한 임수간의 글을 함께 배치했다.
이를테면 임수간의 <동사일기>중 1711년 10월15일자에는 “맑음. 새벽에 망궐례(望闕禮, 왕이 있는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유교의식)를 행하고 해가 뜰 무렵에 하코네(箱根領)을 넘었는데, 영이 너무도 험준하고 상하가 모두 40리나 되었다. 그리고 고개 위에 큰 호수가 있어 둘레가 수십 리나 되는데, 전설에 머리가 아홉인 용이 그 호수 속에 있어 배만 들어가면 문득 침몰되어 돌아오지 못한다고 한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하코네 역참은 도카이도에서 가장 높은 표고 725m에 위치한 역참으로 임수간이 말한 ‘고개 위의 큰 호수’ 아시노 호는 하코네산의 화산 활동으로 3000년 전에 만들어진 호수이다. 21세기의 현대 한국인도 도쿄 관광 여행을 가는 경우 도쿄에서 가장 가까운 온천으로 하코네 투어를 하고 있다.
19세기 우키요에 화가 우타가와 히로시게는 화산활동으로 생긴 악산(岳山) 하코네의 면모와 고산 지대의 푸르른 호수가 어우러진 절경을 다색 목판화에 담았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하코네
우키요에와 같은 제목의 병풍 작품인 <도카이도 53차>은 지난해 하반기에 국립중앙박물관이 신규 구입한 소장품으로 두 점의 6곡 금박 병풍에 에도성부터 후지산까지 도카이도 53개 역참의 풍경을 산수화처럼 담아냈다.
박물관쪽에선 우키요에 전시품에 등장한 8곳의 역참 위치를 병풍 축약본에 설명한 별도의 안내 패널을 설치해 관람객이 우키요에와 금박병풍을 ‘조선통신사의 길’이라는 같은 스토리를 따라 비교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조선통신사가 당시 일본 막부 정권의 위세용 치세이자 막대한 비용을 감내하고라도 해야 되는 일종의 대중 마사지용 ‘3S’ 정책의 하나였음을 보여주는 책도 등장한다. 조선통신사 행렬을 그림과 함께 해설한 일종의 가이드북인 <조선인대행렬기朝鮮人大行列記>(1748년)가 당시 일본에서 발간되기도 한 것, 이 가이드북은 조선통신사가 올 때마다 발행됐다고 한다. 박물관측에서는 말에서 재주를 부리는 마상재(馬上材) 장면을 전시하고 있다. 조선통신사가 일본 학자나 관료, 대중 등 전계층에게 각자의 지적 호기심과 볼거리, 오락 등을 제공하는 특별한 손님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임수간은 <동사일기> 11월2일자에 “도주가 마상재 보기를 원하기에 비장, 역관 각각 두 사람으로 하여금 거느려 보냈더니, 집정 이하 여러 태수들이 모여서 보고 잘한다고 칭찬하더라”라는 기록을 남겼다. 대영박물관이 소장한 일본에서 그린 <조선통신사>(1655년) 그림도 조선통신사의 화려한 행렬을 공들여 묘사하고 있다.
조선인대행렬기 중 마상재 장면
이번 상설전을 기획한 정미연 연구사는 “일본실에 전시된 일본 작품을 볼 때 그게 한국인이 그리거나 한국풍의 영향을 입지 않더라도 우리 역사와 관련된 접점이 있을 수 있다. 도카이도는 일본 역사에서 정치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길이기도 하고 이 길을 다룬 예술작품도 많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길이 우리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역사의 기록에서 잡아 올린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일본실 상설전이 일본의 문화 유산인 우키요에와 금박병품, 도카이도를 조선통신사라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 시각화하는 입체적 접근을 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을 만하다. 다만 그간 회화실에서 수차례 선보이기도 했던 이성린의 <사로승구도(槎路勝區圖)>(덕수2464) 등 조선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우리 쪽의 시각(그림) 자료도 같은 기간에 전시됐다면 좀 더 입체적이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성린은 1748년 통신사의 일행으로 에도에 다녀온 뒤 30장면의 글없는 그림 여행기를 남겼고 이것이 <사로승구도>이다. 1748년 통신사와 동행한 화원 중에는 호생관 최북도 있다.
이성린,《사로승구도》중 <부산>, 1748년, 종이에 엷은 색, 35.2 x 70.3cm 국립중앙박물관
이성린,《사로승구도》중 <6월17일 요시와라 관소에서 본 구름 낀 후지산>, 1748년, 종이에 엷은 색, 35.2×70.3cm,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