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블랭 리스트Blank List
장 소 : 성북도원
기 간 : 2017. 3. 15- 2017. 3. 28
글/ 김진녕
1.
심승욱 작가는 1972년 생으로 홍익대 조소과를 나와 2005년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SAIC)로 유학을 가서 석사를 따고 뉴욕에서 활동하다 2012년에 귀국해 조각 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서울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예술보다 추한>에 그의 작품 ‘임재와 부재사이’(2015년작), '고립주의의 환상 속에서'(2016년 작) 등 두 점과 드로잉이, 성북도원의 <블랭리스트(Blank list)>전에는 그의 신작 한 점이 전시돼 있고, 3월 말에는 인천아트플랫홈 프리뷰전이, 4월에는 경기도 용인시 포은아트홀에서 전시가 예정돼 있다.
이중 <블랭리스트>전은 그가 기획자이기도 하고 참여작가이기도 하다.
2.
<블랭리스트>전은 지금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의 골, 광장을 가로지르는 불안한 일상’의 한 가운데에 판을 펼치고 있다. 전시 제목인 ‘블랭리스트’부터가 ‘블랙리스트’를 발음하는 한국인의 실제 발음 [블랭리스트]를 차용한 것이다.
김정모 <읍읍읍>
블랭리스트 참여 작가 10명 중 이지양, 김남현, 황문정, 장서영 작가는 지난해 심승욱 작가와 고양레지던시에 함께 입주하면서 서로의 작품에 교감하던 동료 작가다.
이번 전시에 ‘희망 고문’을 출품한 노동식 작가는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던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공허한 제국>전에 함께 참여한 인연으로 만난 작가이고 ‘불타는 읍읍읍’을 출품한 김정모 작가는 고양레지던시에 친구가 입주해 있어서 놀러왔다가 함께 자리를 함께 하면서 알게 된 작가다. 기획전이란 게 단순히 ‘안다’고 해서 함께 작품을 거는 게 아닌만큼 시각이나 문제 의식을 공유해야 하는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사회적 비판 의식을 풀어내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심승욱은 “우리 사회가 문화와 예술을 속박하며 풍자는 공격하고 저항은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 개인이 경험하는 다양한 사회적 한계와 경직성의 실체는 무엇이고 작가가 이런 환경 아래에서 창작하려는 것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췄다”고 덧붙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 전시를 통해 “단순히 우리 눈 앞에 벌어진 블랙리스트 사건의 1차원적인 비판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의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사회적 논의가 성숙하고 폭넓은 수용의 태도가 정착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노동식 <희망고문>
3.
<블랭리스트>전에 등장한 ‘희망고문’을 보자.
수반 위에 뒤집힌 배와 하늘에서 떨어지는 조명탄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솜 조각’으로 유명한 노동식 작가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사고 이후 일주일 동안이나 ‘에어 포켓’을 거론하며 사실상 수수방관한 공권력과 사고 현장 중계를 빌미로 죽음 순간을 생중계한 일종의 스너프 필름 메이커로 대중의 관음증에만 호응한 미디어의 호들갑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다.
이에서 보듯 이번 전시는 딱히 세월호에 초점이 맞춰졌다기 보다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시스템이나 ‘믿음’ 체계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고 있다.
김남현 <콘파인드 원Confined One>
김남현의 <콘파인드 원Confined One> 시리즈는 헬멧 형상의 기묘한 ‘감금 장치’를 시멘트로 만든 작품이다. 김남현은 이 장치가 “특정 관념이나 관습 등을 상징할 수 있는 자세를 고정시키는 마치 고문도구와 같은 형태를 취한”것이라고 정의했다. 이 장치가 얼굴, 손, 발 등이 신체부위를 두루뭉술한 외형으로 가리고 가두어 인간의 개별적인 면모를 제거하며 행위의 전형성을 주체로서의 면모를 상실하고 시스템의 통제마저 내재화되어 통제마저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개인의 모습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남대운 <제왕본기>
‘권력’을 TV연속극에서 배우가 분한 독재자 모습으로 치환한 남대웅의 ‘제왕본기’나 양초로 만들어진 권력의 상장물이 불을 붙이면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김정모의 ‘불타는 읍읍읍’은 검열하는 권력(시스템)의 실체없는 허상을 풍자하고 있다.
심승욱이 출품한 ‘가작 위에 위작’은 완성형의 작품은 아니다. 심승욱은 이 작품과 3D프린터로 완성된 같은 형태의 작품을 짝을 지어야 완성된다고 밝혔지만 이번 전시에는 작은 냄비와 식기를 겹쳐 쌓아 트로피 형태로 만든 작품만 나왔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블랙리스트라는 이름의 자기검열이라는 족쇄는 물론 미술계의 위작 논란, 예술인에게도 옥션이나 레지던시, 비엔날레 참가라는 ‘스펙’을 요구하는 우리 사회의 기이한 취향에 스펙트럼을 들이댔다.
심승욱 <가작 위에 위작>
4.
물론 그는 요즘 우리 미술계가 요구하는 ‘스펙’을 갖춘 작가다.
미국(SAIC)에 유학가서 석사를 마쳤고 현지 화랑 소속으로 뉴욕에서 개인전도 가졌고 고양레지던시 입주작가를 거쳐 올해는 인천아트플랫폼 입주 작가로 활동 중이며, 사치갤러리가 주관하는 2014년 사치&푸르덴셜 아이 어워드 조각 부문 대상을 받은 작가이다.
그가 유학을 떠난 이유는 단순하다. ‘작가로 인정받고 싶었다’는 것이다.
1999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바로 유학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 전해에 발생한 외환 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그는 국내에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 무렵 아는 선배를 따라 당시 화제가 됐던 전시 구경을 갔다. ‘아는 선배’는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그 전시의 ‘전도 유망한’ 감독에게 일행을 소개하며 ‘누구는 예일을, 누구는 칼아츠를, 누구는 시카고를 나온 작가’라고 소개하고 유독 심승욱만은 ‘아는 후배’라고 소개했다. 그때 심승욱은 “그 당시 작업을 하고 있었고 개인전도 했었는데 유학을 갔다오면 작가고, 국내에 있으면 ‘아는 후배’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기에는 그런 게 참 심했다. ‘꼭 유학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2005년 유학 길에 오른 그는 유학이 “돈 낭비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시카고의 유명 큐레이터를 어드바이저로 둘 수 있어서 작품을 하는데 좋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미국에서는 전임 교수보다는 그 학교에 어떤 큐레이터나 작가가 수업에 나오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그의 시카고 시절 어드바이저는 관계미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작품의 사회적 관계를 중요시했다. 그 영향을 받아 그 역시 특정 이슈보다는 작업을 통해 전반적인 인간사회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를 풀어내는 쪽에 집중했다.
그런데 2012년 초 한국에 들어온 이후 미시적 개별적 사안에 대해 통찰하고 발언하는 작업이 늘었다. “한국에 돌아와보니 현실적 얘기를 안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것이다. “작업이라는 게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한국은 정치얘기만 하니까. 심지어 부모를 만나서 밥을 먹더라도 밥상에서 정치 얘기를 한다. 당연히 작업에 반영할 수 밖에 없다.”
SAIC 시절 시카고의 갤러리와 연결돼 전시회를 열어 작품이 솔드 아웃되고 이 갤러리 관장의 추천으로 졸업 뒤 뉴욕 브루클린의 레지던시에도 입주하고 2011년 10월 뉴욕에서 연 개인전이 <스컬프쳐>지나 <아트인아메리카>에도 리뷰가 실렸다.
하지만 그는 2012년 1월 귀국했다.
2009년 태어난 아들을 키우기에는 한국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고 2009년 월스트리트를 강타한 금융위기로 인해 뉴욕 미술계에도 찬바람이 불었고 현지에 진출했던 국내 화랑도 모조리 철수하는 등 그는 선택을 해야했다.
귀국한 그에겐 다시 ‘스펙쌓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하고 2013년까지는 정말 괴로웠다. 일종의 부적응 기간이었다. 아무도 안받아주는 것 같고 공모나 레지던시에 지원만 하면 다 떨어졌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만 있는 걸까’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 함께 유학갔던 아내(금속공예 전공)가 2015년에 대학 전임으로 들어가면서 경제적인 강박에서 일단은 벗어났다. 그러다 2014년에 ‘상금’(사치&푸르덴셜 조각어워드)도 받고 2015년에 고양레지던시에 들어가면서 한숨 돌렸다.”
문제는 그 ‘상금’이 그가 국내에서 활동에서 얻은 경제적 성과의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레지던시를 통해 작업 공간 지원을 받고 국내 미술계의 네트워크를 뚫을 수 있었지만 전임 교원이라는 ‘월급쟁이’보다는 전업 작가라는 ‘자영업자’를 택한 그에게 현실은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그는 내년 이후 다시 ‘미국행’이라는 카드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
5.
그는 요즘 한국 미술계에서 레지던시가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고 했다.
“일단 난지레지던시나 고양레지던시에 입주한 작가는 기획자나 평론가를 만날 기회도 많고 그만큼 전시기회를 잡기가 쉽다. 레지던시 입주 자체가 작가가 자기를 알릴 수 있는 수단이다.
2012년 귀국한 뒤에 아는 작가가 고양레지던시에 들어갔다길래 축하하러갔다가 뒷풀이 자리에도 끼게 됐는데 당연한 것이지만 그 자리에 레지던시 작가들만 있었다. 국외자 입장에선 그게 ‘동창회’나 ‘편가르기’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레지던시 생활을 해보니 그들이 누구를 배척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더라. 작가라는 캐릭터가 대개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닌데다가 레지던시에서 일년 가까이 의견을 나누며 지내다 보면 친해질 수 밖에 없다. 특별히 세를 결집하는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는 젊은층에선 난지레지던시 선호도가 크지만 운영 이력은 고양이 더 길고 둘 다 노하우가 쌓인 기관이다. 수도권 레지던시 프로그램 중 비교적 신생인 인천아트플랫폼은 미술장르를 포함한 다원예술 중심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돼 있다.
내가 경험한 고양레지던시는 역사가 오래 되다 보니 프로그램의 틀이 잡혀있었다. 4월께 프리뷰전, 중반부에 아티스틱 세미나와 국제 교류전, 평론가 매칭 이벤트, 10월 께 오픈스튜디오라고 일종의 성과 전시회 등. 개인적으로는 레지던시를 통해 나보다 어린 작가에게 배울 기회가 많아서 좋았다. 과거에는 연배가 높은 선생에게 배운다고 했는데, 요즘 현대미술은 연배가 어린 작가에게 배우는 게 많다. 내가 개인 스튜디오에만 박혀있었다면 얻을 수 없는 배움이자 기회였다. 그들과의 교류가 꼭 작업에 반영된다기 보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계기로 작동하기에 대화 자체가 도움이 된다. 또 레지던지에 실질적인 장비 지원도 있어서 작업에 대한 완성도도 좋아진다.
사실 우리나라는 레지던시 천국이다. 내가 머물던 브루클린의 레지던시 프로그램(ISPC)의 인도 작가가 나에게 ‘한국이 레지던시의 천국이라는데 가고 싶다’고 말하더라. 지자체별로 레지던시가 굉장히 많아졌고 전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나라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왕이면 국내 레지던시가 좀 더 개방적으로 운영됐으면 한다. 물론 무조건 공평성을 요구할 수는 없지만, 이를테면 나이제한 같은 것은 좀 더 유연하게 대처했으면 한다. 내가 대학다닐 때는 대학원 졸업자 등의 사실상 나이를 몇 살 이상으로 제한하는 자격 요건이 있었는데 내가 유학 다녀왔더니 ‘몇 살 이하’라는 나이 제한이 생겨서 못하던 게 꽤많았다.”
이번 <블랭리스트>는 그가 지난해 10월 고양레지던시의 오픈스튜디오 때 기획했던 <고립에 관한 키워드>전을 발전시킨 기획이다. 그때는 좀 더 넓은 의미의 ‘고립’에 초점을 맞췄고 그 결과물이 서울대미술관에 전시되고 있는 세계 여러나라 정치인의 유명한 연설-대개는 유려한 거짓말-을 자르고 이어붙여 그 정치인의 의도와는 다른 맥락의 연설문을 만든 ‘고립주의의 환상 속에서’라는 작품이었고 이번 전시는 한국이라는 정치적, 지역적 범위를 정해서 기획한 전시다.
20세기 말 미술계에 진입한 심승욱이라는 설치작업을 위주로 하는 작가의 이력에는 이렇게 1998년 외환위기, 2008년 금융위기라는 경제적 격변과 2016년의 촛불혁명과 블랙리스트라는 정치적 문화적 격변, 20세기 말~21세기 초반 ‘국제화 바람’을 탄 한국 미술 생태계가 요구하는 ‘미국 유학 라이센스’와 레지던스 스펙 등 한국이라는 생태계에 일어난 모든 혼란과 욕망, 그에 따른 고민과 선택이 흔적처럼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