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서울지역 왕실발원 불화전
장 소 : 서울 불교중앙박물관
기 간 : 2017.2.1 - 3.31
글/ 김진녕
1.
서울 수송동 불교중앙박물관에서 <서울지역 왕실발원 불화전>이 열리고 있다.
조선 왕실의 후원을 받던 서울 성북구의 흥천사와 서울 은평구 수국사에 조성된 불화와 불상이 전시되고 있다. 이중 조선이 망하기 직전인 1907년에 조성된 수국사의 감로도와 조선 왕실이 일본 귀족의 하나로 편입된 1939년에 조성된 감로도는 여러모로 차이점이 커서 눈길을 끈다.
2.
불교 의식에 쓰이는 종교화인 감로도(甘露圖)는 그림으로 그린 부처의 설법이다. 망자의 영혼이 고통을 벗어나 보다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도록 불보살에게 음식을 공양해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천도하는 의식을 담고 있다. 이런 양식의 불화는 불교가 흥했던 동아시아 삼국 중 유독 조선에서만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림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고 상단은 산 사람이 생각하기에 죽은이의 영혼, 고혼(孤魂)이 갈 수 있는 최상의 곳인 극락이 묘사되어 있고, 중단에는 고혼을 극락으로 보내기 위한 불교 의식인 천도재 현장을 재단을 중심으로 화면에 옮겨놓았다. 고혼의 극락행을 바라는 이들이 마련한 음식이 상에 놓여져 있고 의식을 행하는 승려, 그리고 이 떠들썩한 잔치(퍼포먼스)를 구경하는 관중이 그려져있다.
하단에는 망자가 현생에서 겪었을 법한 고통과 죽음의 순간이 전시돼 있다. 눈여겨 볼 점은 이 하단부의 묘사에 감로도 제작 당대의 생활상이 담겨져 있다는 점이다.
<감로를 베풀어 아귀를 구함> 조선, 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에지마 고도 기증)
3.
조선시대의 감로도 중 전하는 작품은 70여 점으로 1580년에 제작된 일본 개인소장 감로도가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18~19세기의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2010년 11월 일본 교토의 류간지(龍岸寺)의 주지 에지마 고도(江島孝導) 씨가 그동안 사찰에서 소장해오던 조선시대 감로도 1점을 기증받은 뒤에야 비로서 16세기 감로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류간지에서 기증한 16세기 감로도에는 그 시대에 있을법한 횡액인 호랑이에 물려죽거나 전쟁에서 죽는 장면이 들어있다.
원광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곡사 등촉계 발원 감로도(1764년)에는 중생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에서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난다. 호환(虎患)에 의한 비명횡사(非命橫死)는 그대로지만 전쟁 장면에서 총이 등장한다.
16세기 이후 200년간 조선반도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
조선을 거의 멸망 직전으로 몰고간 임진왜란(1592~98년)과 병자호란(1636~37년)이 불과 30여 년을 간격으로 연달아 터지고 수많은 조선인이 비명횡사를 당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총을 선보였고, 병자호란 때는 조선군도 총으로 무장했다.
두 번의 침략전쟁에 대한 당시 조선인의 경험과 기억이 얼마나 강렬하고 끔찍했는지는 감로도의 구성 요소 변화로 짐작할 수 있다. 비명횡사 케이스로 전쟁에서 총맞아 죽는 장면이 들어간 것이다.
<대곡사 등촉계 발원 감로도> 조선, 1764년, 원광대학교박물관
4.
감로도 도상의 또한번의 터닝 포인트는 조선이 정조의 치세로 짧은 봄을 누리고 급격히 쇠약해지던 19세기 전후다.
김정희 교수(원광대 고고 미술사학과)는 2016년에 발표한 <감로도 도상의 기원과 전개>라는 논문에서 감로도 도상의 변화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17~18세기 중반에는 환란과 형벌장면이 대폭 증가했고 재물을 쌓아놓고 죽는 장면, 침을 잘못 맞아 죽는 장면, 간통죄, 참수형 등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 증가했다.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에는 앞 시기에 유행했던 환란이나 형벌의 주제는 거의 사라지고 서당과 기생, 궁궐장면 등 시정풍속이 새롭게 등장한 점이 주목된다.
감로도에서 하단장면이 가장 확대되고 다양해진 것은 19세기 후반 이후이다. 이 시기에는 하단이 화면의 1/2~1/3 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아졌다. 수목으로 분할된 공간 안에는 소를 이용하여 밭갈이하는 장면을 비롯하여, 대장간에서 풀무질을 하고 쇠를 두드리는 장면, 엿장수·쌀장수·포목장수·주막풍경·어물장수·닭장수·과일장수 등 장마당에서의 각종 상행위 등 다양한 장면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18세기에 현실감 있게 묘사되던 전투장면은 매우 관념적인 형태로 변화하여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삽도나 민화의 전쟁장면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변화하였고, 굿 장면 역시 제물을 성대하게 차려놓고 굿을 치루는 모습이 마치 현장을 스케치하듯 묘사되었다. 이밖에 한량과 기녀, 연희집단, 유랑예능인, 우바새 등의 모습이 대폭 늘어났는데, 이는 19세기에 새로 나타난 여가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임란과 호란이 끝난지 100년이 넘어가고 정조의 치세로 살림에 윤기가 돌자 당대의 조선인들의 머리 속에서 끔찍했던 왜란과 호란의 기억도 점차 희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대신 이들에게는 매일같이 마주하는 북적거리는 저잣거리의 삶과 쾌락, 그리고 그 쾌락을 누리기 위해 치러야 하는 고통이 더 큰 관심사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국사 감로도> 1907년
5.
1907년에 조성된 수국사 감로도는 망하기 전 조선왕실의 위세를 보여준다. 선은 단정하고 색은 화려하다. 하단에 펼쳐진 중생들의 삶에 대한 묘사는 과거와 사뭇 다르다. 호랑이에 쫓길지언정 물려죽지는 않고, 현생의 죄로 고통받는 장면의 묘사는 간략해진다. 대신 광대놀음을 구경하거나 기생의 공연을 보며 즐거워하고 바둑을 두며 소일하는 ‘살아있는 날의 즐거움’을 공들여 묘사하고 있다. ‘달콤한 내세’에 대한 기원은 기본이고 당대의 행실에 의한 두려움 보다는 현세의 즐거움을 더 강조하고 있다.
<수국사 감로도> 부분. 유교적 질서 아래에서 꿈꾼 달콤한 내세
수국사 감로도보다 불과 30여 년 뒤에 그려진 흥천사 감로도는 시대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화면에 갓을 쓰거나 도포를 입은 유교적 질서에 지탱하던 지배계급이 보이지 않는다. 달콤한 내세를 약속해줄 수 있는 승려계급과 의례에 참여하거나 구경하는 이들만 등장한다. 왜정시대를 살아가는 1930년대 중생의 삶과 시대상이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당대의 체제 변화와 시절 풍경을 적극 반영한 풍속화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흥천사 감로도>
화면 가운데 자리잡은 재단에 흔히 보이던 종이로 만든 모란 대신 장미꽃이 꼽혀있다. 천도재를 구경하는 인파에는 중절모를 쓴 남자와 빨간 투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커플이 등장한다. 산이나 나무로 구획져 들어가던 이승의 여러 장면이 사진 꼴라쥬처럼 등장한다. 서양식 건물과 로터리가 묘사되고, 코끼리가 등장하는 서커스를 구경하고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모던 라이프의 즐거움, 일제가 주도한 ‘대동아 전쟁’의 장면이 등장하지만 이 장면은 현생의 고통이 아닌 전쟁 독려 포스터처럼 보인다. 전쟁의 희생자나 호환 피해자는 따로 작게 그려져 있다.
흥천사 감로도 조성 작업에 참여한 불화승 보응 문성과 남산 병문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 사회의 풍경을 적극적 끌어들여 당대의 타임캡슐을 남겼다.
학자들은 흥천사 감로도뿐만 아니라 18~19세기 감로도에 강조된 춤추고 연주하고 노래하는 예인 집단과 관중 묘사에서 조선시대 연희집단의 변화상이나 불교 무용, 복식, 미용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료를 캐내고 있다고 한다.
<흥천사 감로도> 부분. 모던라이프의 등장과 유교적 지배계급의 몰락을 볼 수 있다.
<흥천사 감로도> 부분. 자동차와 식민지 조선 사회의 모습(신사) 등을 볼 수 있다.
20세기의 한국인은 일제강점기에 수십만 명이 유라시아와 미주로 유랑걸식을 떠나 난민이 됐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1백만 명이 넘게 사망했다. 20세기 후반에는 경제와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희생과 발전이 공존했다. 문화와 사회 제도가 20세기 전반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변해버린 20세기 후반 이후 조성된 한국 불화에서 흥천사 감로도처럼 시대적인 변화를 담아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