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미술사가들이 사랑한 질그릇과 무낙관그림 - 윤용이, 유홍준, 이태호 교수 소장품
기 간 : 2017.1.16-2017.2.15
장 소 : 리홀아트갤러리
글/ 김진녕
1.
질그릇은 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근 만년 동안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쓰고 있는 그릇이다. 하지만 자기가 발명된 이래 딱히 비싸거나 귀한 대접을 받고 있지는 않다. 무낙관 그림은 말하자면 작가의 서명-족보가 규명되지 않는 익명의 그림이다. 고미술품이라고 해도 ‘환금성’이라는 자본주의 불멸의 가치에 호응하기 위해선 결격사유다.
‘웃방 큰애기’처럼 홀대받던 이 질그릇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 “회화성이 빼어난 무낙관 그림의 발견을 흙에서 옥을 고르는 일만큼 즐거워하던” 세 명의 미술사가가 정년퇴임을 기념해 <미술사가들이 사랑한 질그릇과 무낙관 그림전>을 열었다.
2.
전시된 질그릇은 한반도에서 일어난 도기 발전사를 한 눈에 보여준다.
보다 높은 온도의 불을 다룰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해야 더 튼튼하고 가벼운 그릇을 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연질 도기보다 경질 도기의 굽는 온도가 높고, 도기보다 자기가 굽는 온도가 더 높다.
초기 도기는 노천 가마에서 구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나 신라 시대의 토기에도 현재도 베트남 등에서는 노천가마가 쓰이는데 대략 800~900도까지 구울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질그릇, 즉 오지그릇은 900~1100도 사이에서 구워진다. 자기는 1300도 이상에서 구워내야 한다, 옹기장이 이현배는 “1100도 이상으로 불을 올리기 위해선 가마 구조도 달라야 하고, 불을 고온으로 유지하는 정교한 기술도 필요했다. 도자 역사를 놓고 보면 문명의 도약”이라고 말했다.
인류의 그릇 역사에서 이 문명의 도약, 자기 생산이라는 점프가 10세기 전후해서 일어나는데 성공한 나라는 한국과 중국, 베트남뿐이었다. 일본은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의 도공을 집단 납치한 뒤에야 이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고 산업혁명을 거치고도 유럽은 일본의 자기를 수입해 썼다.
<질그릇과 무낙관그림>전에는 도기에서 자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등장한 초기 청자에 대한 짐작을 할 수 있는 질그릇 매병이 등장한다.
옹기장이 이현배는 초기청자에 대해 “흙 구성이 옹기와 비슷해 일본쪽에선 초기 청자를 도기로 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에 발굴되는 초기 청자 가마터를 보면 자기를 만드는 가마터에서 반드시 나오는 수비(水飛)장이 없는 것도 초기 청자가 옹기 만들 때 쓰는 질흙을 썼기 때문이란 것이다. 자기는 질흙으로 만드는 질그릇과는 다른 성분의 사토(沙土)를 채취해 이를 잘게 부수고 물에 가라앉혀 고운 흙가루를 쓴다. 이런 작업을 수비라고 한다. 이를테면 일종의 침전조가 수비장인 것. 수비장이 없다는 얘기는 질그릇을 만드는 질흙 중 상대적으로 고운흙을 갖고 침전과정없이 그대로 그릇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전시에 나온 질그릇 매병은 청자 매병과는 형태가 같지만 더 두텁고 단단해 보이고 색은 그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검어지고 윤택이 돈다. 이현배는 “청자를 구우려면 가마 안에서 1100도 이상의 온도를 유지하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삼국시대 가마터가 수송용 배처럼 넓적하다면 초기 청자 가마터는 전투형 배처럼 날렵하다. 공기흐름을 빠르게 해 같은 양의 땔감으로도 가마안 온도를 더 높이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고온을 다루는 기술을 확보하니 질그릇도 상대적으로 강해졌다. 연을 높은 온도에서 깊게 먹이는 기술도 확보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아한 먹빛의 고려매병이 중세 하이테크 혁명의 흔적을 품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전시품은 가야와 신라에서 쓰인 질그릇 잔이다.
어찌된 이유인지 전래의 찻잔이라고 하면 손바닥으로 감아서 쥐는 찻잔부터 연상한다. 오늘날 일상에서 쓰이는 손잡이 고리가 달린 찻잔은 으레 19세기 이후 서양의 전래품으로 여긴다.
하지만 가야와 신라의 질그릇 잔은 이런 생각이 편견임을 알린다. 물잔에 손가락을 끼워서 사용할 수 있는 투과형 손잡이를 달 생각을 가야인이나 신라인도 했다. 다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런 풍습이 이후 한반도에서 사라졌을 뿐이다.
이번 전시에는 요즘으로 치면 머그잔, 에스프레소잔, 피처 잔으로 분류할 수 있는 다양한 크기의 손잡이 달린 질그릇 잔이 등장하고 있다. 가야인은 이 잔을 어떤 용도로 썼을까. 전해내려오는 ‘설’ 중에는 금관가야의 수로왕 부인 허씨가 아유타국(인도)에서 올 때 차나무 씨를 가져와 한반도에 차 문화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은 질그릇 물잔이 20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3.
전시에 나온 질그릇에 비해 무낙관 그림의 양은 적다. 24점이다.
미술사가에게 무낙관 그림은 화풍과 붓터치, 글귀, 지질을 통해 퍼즐을 꿰맞추는 전문가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면 일반 관람객도 알아볼 수 있는 소소한 재미도 있다.
무낙관 비로봉도
겸재 <비로봉도>
비로봉도를 그린 무낙관 그림은 겸재의 비로봉도를 단박에 떠올리게 하지만 비로봉 정상에 갓을 쓴 세 명의 인물과 시중드는 이 두 명이 경치를 보면서 손짓 발짓하는 소란스러움까지 그려 넣었다. 이태호 교수는 “양필법의 중향성 바위 봉우리 표현과 미점의 토산 비로봉을 대비시킨 점은 서툰 솜씨이긴 해도 겸재 정선의 화풍을 따른, 문인화가 도암 신학원의 그림을 꼭 닮아 있다. 겸재화풍을 따른 미숙한 표현과 비로봉 위의 탐승객들로 보아 신학권의 금강산 화첩에서 분리된 듯하다”는 의견을 냈다.
매해 늦여름이면 국립중앙박물관 회화실에 등장하는 이계호와 최석환의 포도 그림을 연상시키는 두 점의 포도 그림도 등장했다. 이 교수는 한 점은 “탄력있는 곡선이 위에서 아래로 활처럼 뻗어 내린 넝쿨과 그 구성이 시원스러워” 이계호의 포도 그림 같고 또 한 점은 “느슨한 담묵의 잎사귀와 농묵의 포도송이 표현이” 최석환의 포도 그림을 닮았다고 도록에 적었다.
매해 늦여름이면 국립중앙박물관 회화실에 등장하는 이계호와 최석환의 포도 그림을 연상시키는 두 점의 포도 그림도 등장했다. 이 교수는 한 점은 “탄력있는 곡선이 위에서 아래로 활처럼 뻗어 내린 넝쿨과 그 구성이 시원스러워” 이계호의 포도 그림 같고 또 한 점은 “느슨한 담묵의 잎사귀와 농묵의 포도송이 표현이” 최석환의 포도 그림을 닮았다고 도록에 적었다.
이계호 포도 그림 추정
이계호의 그림으로 여겨지는 포도 그림이 전시돼 있다.
이계호 <포도도>
이번 전시에는 귀여운 고양이 그림이 한 점 등장했다. 고양이 그림은 장수와 관직 진출을 나타낸다고 하여 조선 후기에 유행한 그림이다. 이 19세기 조선에서 그려진 고양이는 눈이 크고 쳐져있고 두상이 크다. 요즘 인기있는 품종인 페르시안 고양이와 닮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하묘도> (덕수1415)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양이 그림 중 오원 장승업의 19세기 말 작품 <화조영모도>(동원 3329)나 17세기 작품인 작자 미상의 <유하묘도>(덕수1415)에 등장하는 고양이의 모습과 차이가 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고양이 그림이 토작화한 길고양이를 닮았다고 한다면 작자 미상의 무낙관전에 나온 고양이 그림은 배경을 빼고 캐릭터만 보면 최신 인기 묘종 화보를 보는 것 같다. 19세기의 이 익명의 화가는 어떻게 한반도에서 페르시안종을 보고 그림을 그렸을까.
우연인지 페르시안종 고양이는 신라와 연결된 ‘전설’에 등장한다. 페르시아의 구전 서사집 쿠쉬나메에 페르시아 왕자와 신라 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둘 사이의 사랑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바로 이 페르시안종 고양이다.
‘설’은 판타지의 영역이기도 하고, 도장과 서명이 없는 무낙관 그림은 이력이 사라져 ‘설’의 세계에 반쯤 걸치게 된다. 이를 추정해 미술사에 복원시키는 것은 미술사가의 역할이고 그와 상관없이 그림 보는 즐거움은 관람자의 몫이다.
‘설’은 판타지의 영역이기도 하고, 도장과 서명이 없는 무낙관 그림은 이력이 사라져 ‘설’의 세계에 반쯤 걸치게 된다. 이를 추정해 미술사에 복원시키는 것은 미술사가의 역할이고 그와 상관없이 그림 보는 즐거움은 관람자의 몫이다.
이태호 교수는 “현대화 못지않게 옛 그림의 단아한 세련미가 현대성으로 자연스레 다가오는 경우도 다반사다. 전통 수묵화는 눈맛을 익히고 높여주는 사랑할만한 그림들이 여전히 많다. 옛 그림은 지금 우리 곁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고 도록에 적었다.
4.
서울 성북동 리홀 아트갤러리에서 2월15일까지 이어지는 <질그릇과 무낙관 그림>전은 가야, 신라, 고려, 조선의 질그릇 80여 점과 조선 시대의 무낙관 그림 20여 점 등 100점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 전시를 만든 세 명의 미술사가는 명지대 미술사학과를 세운 윤용이 유홍준 이태호 석좌교수다. 이태호 교수가 정년퇴임하면서 모두 정년을 맞은 이들이 그들만의 방식으로 평생의 업을 기념하는 전시를 만든 것이다. 이들은 도록 서문에 “원칙적으로 미술사가는 미술품을 구입하지 않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것은 미술품을 상품적 가치로 환산하는 세속적 손익에 물들면 학문을 그르치게 된다는 경고다. 우리가 구입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우리 미술품에 대한 애정의 표현이었으며 한편으로는 한국미술사의 사각지대를 밝혀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기도 했다”고 밝혔다.
흑유소병(오른쪽) 고려, 13세기
이태호 교수가 그린 <흑유소병>
전시품에는 화가이기도 한 이태호 교수가 자신의 소장품이기도 한 13세기 고려 흑유 소병과 가야시대 손잡이 달린 잔을 그린 그림이 함께 걸려있다.
사랑하고 아끼니 그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