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유영국, 절대와 자유〉
장 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기 간 : 2016.11.4-2017.3.1.
아침 7시 기상, 8시부터 11시 30분까지 작업, 점심 식사 후 2시부터 6시까지 작업. 유영국의 철두철미한 작업에의 집중은 그보다 먼저 세상을 살다 간 세잔느의 하루와 같아 보인다. 그것은 또 지독한 사유의 상징인 칸트의 일상과도 닮아 있다. 지독한 노동, 시간과 몸이 함께 녹아든 화면의 장소성은 그들로 하여금 원근법을 벗어난 세계에 이르게 하였다. 세잔느의 생트빅투아르 산이 이른 지점, 유영국의 산이 펼쳐진 그곳을 일러 우리는 ‘예술이 자연과 동등한 지위’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산 Mountain, 1957,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00x81cm, 개인
산 Mountain, 1968,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129×129cm, 개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의 〈유영국, 절대와 자유〉는 포스터로 대해오던 유영국의 작품을 코앞에 들이밀음으로써 감각하게 하고, 빠져들게 한다. 이 전시는 유영국 생전뿐만 아니라 그동안의 전시 중 가장 인상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유영국은 시공을 초월한 연애담이라거나 기행과 같은 천재적인 화가 하면 연상하게 되는 드라마틱한 지점이 없을 뿐 아니라 요절(夭折)작가도 아니다. 그 ‘이야기 없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은 관람자로 하여금 그가 전시를 관람하는 그 공간마저 잊어버리게 하는 작가라는 것을 새삼스레 일러준 때문이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변월룡, 이중섭에 이어 유영국을 보여줌으로써 이해 가능한 다양한 지점을 열어준 때문이기도 하다. 이야깃거리 많은 화가 이중섭 뒤에 과묵한 유영국을 보여준 것은 이른바 ‘신의 한수’이다. 추상이란 본디 그런 것임을 감각하게 하지 않는가.
전시는 유영국(劉永國, 1916-2002)의 생애를 구분하는 연대기적 틀로 구성되었다. 도쿄유학(1935-1943), 추상을 연구하며 단체활동을 한 시기(1943-1959), 짧은 시기이지만 집중적으로 자연연구를 한 시기(1960-1964) 그리고 스스로 화면에 이리저리 해본다던 조형실험의 시기(1965-1970) 그리고 ‘자연과 함께’라는 부제의 생애의 뒷부분이자 완숙기라 할 수 있는 시기(1970-1990년대)가 그것이다.
모던의 모습들
전시는 그의 자녀가 재현한 일본에서 체류하던 젊은 시절의 작품에서 시작한다. 베니어판을 잘라 구성한 그의 화면은 러시아 구성주의를 상기시키며, 일본화단에 불어온 모더니즘 바람의 중심에서 그 또한 호흡하였음을 확인시킨다. 김환기의 〈론도〉와 더불어 그의 이 부조(浮彫)형 회화가 없었다면 한국의 모더니즘은 6.25전쟁과의 연계 안에서만 이해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이경성이 “해방 후 보리수 다방에서 있었던 전시회에 유영국의 작품이 사진자료로 전시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간결한 직선에 의한 구성주의적 작품으로 매우 신선한 느낌을 받았었다.”라고 한 그 사진을 작가의 조언을 받아 재현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시간을 넘어 재현된 화면 앞에서 ‘과묵해서 좋았다’는 몬드리안에 대한 유영국의 예찬을 듣는다. 1940년에 제작한 〈작품〉 두 점에서도 구성과 분할의 원리에 대한 그의 분석적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풍부한 색채와 물감의 깊이는 이후 그가 진행할 회화 세계의 방향을 지시하고 있음도 유의할 일이다.
작품404-C Work 404-C, 1940(유리지 재제작 Reproduced by Yoo Lizzy 2003), 혼합재료 Mixed media, 48 × 40cm,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작품 Work, 1940,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46x37.5cm, 유영국미술문화재단
베니어판이라는 건축자재의 사용은 흑백도판으로 이미지가 확산되었을 일본화단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을 터이다. 2회 《자유전》에서의 수상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는 《자유전》에 사진을 출품하기도 했는데, 이번 전시에서도 그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아카이브가 아닌 작품으로서 근대기 화가의 사진을 보는 일은 흔치 않다. 그의 범상치 않은 사진기는 그가 울진의 부잣집 자제였음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일제강점기 일본유학생의 다양성은 ‘예술이 학문의 제왕’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결과였음을 확인시킨다. 석탑과 건물 등 그의 눈에 포착된 사물들이 달라 보이는 것은 사진전문가가 많지 않던 당대에 오리엔탈사진학교에서 정식으로 습득한 앵글의 결과이다. 그것은 새로운 시각을 갖기 위한 근대의 눈이자 문화재로서 표상이 아니라 순수한 조형의 눈에 포착된 구형, 직육면체 등 형태의 조합이었으며 독자적인 추상 드로잉이었다. 그리고 또한 추상화가의 사진은 자유로운 사상의 발현체인 추상미술에 대한 군국주의의 탄압에 대한 반항의 도구였다.
<사진 No.3>, 1942, 제6회 <미술창작가협회전> 출품기념 엽서
자유미술가협회는 '자유'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1940년 6월부터 협회명을 미술창작가협회로 변경하였다. 유영국은 42년 6회전에 사진 작품을 출품하였다.
광복과 신사실파 그리고 50년미술협회
1943년 귀국한 유영국은 이듬해 결혼하였고 광복이 될 때까지 ‘어부’가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으므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이었으며, 그의 이러한 태도는 생계를 저버리고 탐닉의 세계로 빠져든 대개의 화가들과 다른 점이다. 이지적이라고 할 이러한 태도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가정 경영방식과도 상통한다. 세상에 대한 책임감, 그것은 화가가 짊어져야 할 숙명이자 갈등의 근원인데 유영국은 그것을 이겨낸 보기드문 작가였다. 어부, 양조장 경영자 그리고 교수라는 직업을 가졌지만 한 번도 화가가 아닌 적이 없었고 화가가 되기 위해 그것을 모두 내려놓은 또한 보기 드문 작가였다.
1948년 유영국은 《신사실파전》에 참여하였다. 유영국의 전언에 따르면 “신사실파란 이름은 김환기 씨가 붙인 것으로 추상을 하더라도 모든 형태는 사실이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1947년에 김환기 기획으로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이 1948년 12월 7일부터 14일까지 화신화랑에서 연 전시였다. 유영국은 이때 〈회화〉라는 작품 10점을 출품하였으니 추상계열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9년, 장욱진이 참여하여 4인이 된 2회전에서 유영국은 〈직선있는 구도A〉 〈직선있는 구도B〉 〈직선있는 구도C〉 〈직선있는 구도D〉 〈회화A〉 〈회화 B〉 〈회화C〉 〈회화D〉 〈회화E〉 〈회화F〉 등 10점을 출품하였다. 역시 명제는 추상을 지향하고 있지만 ‘신사실’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반응하여 꽃이나 달과 같은 형상이 은유된 화면을 보이기도 했다. 다시 이중섭과 백영수가 참여하고 이규상은 빠진 3회전에서 유영국은 〈산맥(山脈)〉 〈나무〉 〈해변에서A〉 〈해변에서B〉 등 4점을 출품하였다. 자연을 상징하는 명제가 붙은 것도 ‘사실’에 대한 시비를 자연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는 중도의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이념의 공간에서 ‘사실’이란 외형의 형식이 아님을 주장하는 것으로서 새로운 사실이란 추상만은 아니었음을 자연의 모습을 재현하기도 하고 전통을 실험적으로 주제로 삼거나 구성 자체를 내용으로 하는 경향 등 다채로운 출품작의 성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해방공간에서 발아하여 전쟁을 거치며 꽃피운 미술단체로서 당시 사회현상을 반영한 자연과 전통 그리고 탈속의 세계를 추구함으로써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제2회 《신사실파 미술전》리플렛
김환기의 유학 등으로 유명뮤실해진 《신사실파》에의 참여와 더불어 기억해야 할 단체는 ‘50년미술협회’이다. 유영국은 이때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박고석에 따르면 ‘순수한 미술활동주체로서 협회의 구성원이 1950년 봄 동경 화단이나 조선미전에서 활동하였거나 월남한 이들로 당시 현역 중에서 비교적 알려져 있는 작가들이 이데올로기와 경향을 떠나서 순수 미술인의 결집을 외치면서 발족한 단체’였다. 최순우도 50년미술협회의 설립취지는 적극적인 예술정신에 의거하여 미술가가 대동단결함으로써 각자 예술의 자유로운 발전과 새로운 민족미술의 앙양을 도모하는 데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50년미술협회는 미술동맹 등 좌익계열의 미술단체가 순수한 예술의 창조보다는 정치적 공작을 일삼는다는 명목으로 당국에 의하여 불법화 내지 해산되었던 시기에 결성되었다. 이 협회에서는 유영국과 김환기, 남관, 김영주, 김병기, 박고석, 이봉상 등이 중심이었다. 그리고 전쟁으로 시작하지 못한 협회전을 빌미로 미술학부장 장발과 갈등이 시작되었고 유영국은 미술대학교 교수에서 다시 화가로 돌아갔다.
유영국이 추구한 세계는 이후 《현대작가초대전》 출품작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자연을 요소로 한 추상이었고, 이는 이념의 세계를 떠난 순수한 장소, 미술의 이상향인 유토피아적 세계에 대한 염원이었다.
유영국이 추구한 세계는 이후 《현대작가초대전》 출품작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자연을 요소로 한 추상이었고, 이는 이념의 세계를 떠난 순수한 장소, 미술의 이상향인 유토피아적 세계에 대한 염원이었다.
재현의 일루전과 유토피아
유영국의 화면은 절대적인 순수조형의 세계에서 자연의 세계로 그리고 다시 조형의 세계로 변모하지만 그것은 정반합의 모습을 띤다. 그의 말년의 추상은 자연을 담은 추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전에 비해 표면의 물감층이 얇고 도획적인 그 화면의 이미지들은 초기의 절대적 화면과 닮아 있다.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하며 구축해온 자기의지와 재현의 세계를 떠나야만 했을 때, 나 역시 일종의 소심증으로 몹시 주저하고 번민해야 했다. 그러나 곧 대상으로부터의 해방이 가져다 주는 만족감은 나를 감성 이외에는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먼 사막으로 인도했으며, 이내 감각은 내 삶의 본질 자체가 되어 버렸다. 내가 전시한 사각형은 빈 사각형이 아니었으며 대상의 부재에 대한 의식의 표출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대상과 그 재현이 곧 감수성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으며 의도라던가 재현의 결과란 얼마나 거짓될 수 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말레비치, 『비대상의 세계』, 1927.)
대상을 벗어난 순수 조형의 세계에 대한 청년기의 학습은 귀국 후 자연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구조화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재현의 일루전이 아니라 원근법이 사라짐 섬광같은 희열의 순간에 대한 재현이었기에 풍경은 풍경이되 심적 풍경의 틀로 요약될 것이다. 세계와 질서에 대한 이해, 사물과 사물의 관계 그리고 사물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탐구는 고기를 잡는 어부의 그물에서, 양조장의 발효하는 효모의 향기 속에서 길러지고 발화하였다.
작품 Work, 1994, 캔버스에 유채, 66x91cm, 개인
화면의 푸른색은 그가 어부라는 사실을 모르고도 바다라고 인지될 수도 있고 단지 둥글고 네모난 조형적 실험이라고 보아도 그리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화면에 넘치는 분홍색이 노을이라고, 그 불가능한 자연의 신비를 극대화한 감상이라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가장 끝까지 밀어부친 감정의 세계, 극대화한 그곳에서 만난 풍부한 색채는 회화의 유토피아, 추상의 세계에서 허용되는 짜릿한 도구인 때문이다.
“드로잉과 색채는 다르지 않다. 우리가 칠할 때, 우리는 그린다. 색채가 조화를 이룰수록 드로잉은 정확해진다. 색채가 가장 풍부할 때, 형식은 가장 완벽하다.”(세잔느)
자연에 충실했던 세잔느는 1902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화가 자신의 시점을 통해 만들어진 변화는 그가 재현한 자연에 새로운 감흥을 준다. 그는 화가로서 아직 그려지지 않은 것을 표현한다. 그는 절대적 감각으로 그것을 회화로 재현한다. 즉 실재가 아닌 어떤 것, 그것은 더 이상 직접적인 모방이 아니다.” 예술은 자신이 재구성할 수 있는 대상임을 밝힌 것이고 추상의 내면으로 들어섰음을 말하는 것이다. 과묵한 유영국의 아래와 같은 말도 같은 뜻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산은 내 앞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