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제목 : 접속! 21세기 실크로드-2016 한, 중 현대조각 초대전
전시장소 : 주한중국문화원
전시일정 : 2016.11.3-11.26.
한국과 중국이 정식 수교를 한 것은 1992년, 24년만의 중국과 한국의 문화적 관계는 어디쯤일까. 한류로 통칭되는 대중문화 넘어 〈접속! 21세기 실크로드〉는 비교적 크지 않은 전시에도 불구하고 양국의 문화적 교류가 어떤 양상이어야 할까에 대한 논의를 일깨운다.
전시에는 한국과 중국 양국에서 활동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작가적 양식을 이룬 이른바 알려진 중견 조각가들이 참여하였다. 작품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장소로서의 전시 이외에 이들은 또한 한국과 중국의 조각을 연구하는 한 방식을 보여주었다. 실크로드라는 주제 아래 작가들과 이론가 최태만의 연구는 상호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시각 그리고 다르다고 생각한 것을 같은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는 경험 등이 한 장소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가 한국과 중국에서 교차되고 그들이 상호 교류한다는 것은 국가나 민족이라는 개념을 떠나 예술의 문화사적 위치파악이라는 지형도에서는 의미있는 사건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작품들은 중국 현대조각의 특성인 리얼리즘적인 형태와 한국 현대조각의 다양성을 드러낸다. 이들은 실크로드라는 주제를 공유하지만 그 접근법은 개인적인 양식은 물론이려니와 국가별로 다른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경험과 풍토라는 것이 어떻게 조각에서 작용하는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하지만 중국 작가의 작품들이 운반의 문제로 소형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하므로 상상력이 필요한 전시이기도 하다. 실지로 중국의 조소작품은 거대한 크기인데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은 ‘극히 작은’ 형태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에서 성장한 조각은 사회에 위치하는 조각이기에 거대한 환경조형물의 모습을 띠는 것이 그들 조각의 가장 기본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이번 전시를 위해 소형의 작품을 제작하거나 대형 조각의 스케치와 같은 작품을 출품한 중국 작가들의 애로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인체를 기반으로 작품들은 작가별로 인간이라는 대상을 표현하고 해석하는 태도를 비교하여볼 수 있는 자료인 동시에 국가별로 차이점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점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인체는 가장 오래된 연구의 주제이자 형태에 기성관념이 강하게 작용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전체가 부분을 대신한다는 오래된 조형의 표현방식은 중국작가들의 사실적이며 서사적인 작품에서는 드라마틱한 점이 부족한 이유로 선택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국 현대조각의 역사에서 사실적인 표현에 대한 다른 생각을 지닌 경향은 인체의 부분을 통해 추상을 표현해내는 방안에 익숙하게 하였다. 인체를 표현하는 방식, 그 방식 자체가 역사이자 관념임을 양국 작가들의 인체작업 비교를 통하여 확인하는 것이다.
강덕봉의 물음표를 닮은 측면의 인체는 인생에 대한 풀리지 않는 질문, 외디푸스의 비극을 생각나게 한다. 이러한 인체는 일일이 주조한 인물들이 녹아내리듯 서로를 지탱하여 하나의 탑을 이루고 있는 박재형의 〈아름다운 날들〉에 이르러 군중과 개인의 관계에 대해 논의하게 한다. 정현의 바위에 꽂힌 기다란 철근도 시간이 스며든 인간의 육체를 상상케 한다. 책 속에 박힌 인체의 유동하는 이미지 또한 역사의 한 장면으로서 인체를 의미할 것이다. 조숙의와 이종애의 형태 또한 그러한 생명성과 역사성의 의미와 단절된 것은 아니다.
아시아조각연구회장으로 이 전시의 전반을 이끈 신은숙의 작품은 돌의 지역성과 관념에서 전시의 의미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실크로드 지역의 돌 위에 얹은 대리석 형태는 단단하지만 고독하며, 돌에서 우러나오는 무늬마저 승려의 가사자락과 같아서 돌 속에서 구도 여행자를 찾아내 환생시킨 듯하다. 삶과 인간의 생명에 대한 물음은 생명주의 조각이라는 한국 특유의 장르에서 여전히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신체의 전면을 보여주는 작품과 달리 극도로 일부를 선택한 작품들이 있다. 투명한 두 손 안에 다육식물을 감싸안은 황지선의 PLAY는 자연의 힘과 생명성을 상기시킨다. 김형준의 〈명상〉은 인간의 머리 속 파동을 가시화하여 무형의 개념을 구체화하여 보여주었고, 역시 인체의 입 부분만을 표현한 임형준의 〈소리〉는 청각적 감각을 시각화한 것이다. 김하림의 박스 안에 든 작은 통들에 든 머리카락 또한 인체의 일부로서 전체를 나타내는 규격화하고 통제되는 인간의 모습에 대한 은유를 보여준다. 김순임의 〈얼굴8-이옥란〉은 부드러운 소재로 금방 사라질 것만 같은 노년의 생명성을 나타낸다. 반면 얼굴만 표현한 김용래는 테라코타를 선택함으로써 순수한 형태에 담긴 정신의 강렬한 물질화를 나타내고 있다.
중국 작가 허어(何鄂)는 한나라 초서의 대가로서 작가가 활동하는 간수 지역에서 출생한 장지(張芝)를 출품하였다. 그 지역에 섰을법한 대형 조각의 소품은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과 높이 쳐든 붓을 든 손을 통해 그의 고고한 지적 태도를 보여준다. 비교적 곱지만 궈항(郭航)의 If the water도 같은 태도로 보인다. 극적인 상황의 강조를 위해 인격성을 형태에 부여하는 것이다. 동슈빙(董书兵)의 대지에 납작 엎드린 어린아이 형상의 The son of the earth은 천진무구한 대지의 은유로서 어린아이가 엉덩이를 드러낸 채 호흡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작품에 등장하는 인체가 정신의 상징으로 전체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는 여인 나체의 휘어진 몸이 대지와 연결된 장송 타오(张嵩涛)의 AS IS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대지와 신체의 유사성을 은유하는 데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아 보였다. 인체가 지닌 역사성은 또한 현대와 고전, 고전의 정신을 나타내는 데도 적합한 제재로 애용되어 왔다. 바오하이닝(鲍海宁)의 중국 고대 관리의 모습은 양감이 넘치는 우아함이 두부와 신체가 서로 다른 물질에서 상승하는 유사성을 은유한다. 즉 육체와 정신의 상관관계를 음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인체를 통한 감정의 상징, 혹은 정신의 문제는 인샤오펑(殷小峰)의 Repaired People of Chinese Ethnic Group NO.78에서도 확인된다.
현대의 인물은 일상에서 느끼는 교차하는 감정들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시장에 나란히 배치하여 해학적인 의미를 상기시킨 두 조각이 그러했다. 샤오슌(邵旋)의 인물은 놀랍게 반짝이며 부드러운 표면을 지녀서 브론즈로 만든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코피가 나고 울먹이는 인물은 제목 그대로 I cannot bear이지만, 결코 참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상상할 수 없는 인물로 보인다. 현대인의 무력감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 없는 이러한 상황은 초우하이즈(丑怀志)의 I need wings에서도 재연된다. 나체의 남성이 하체를 자신의 옷으로 가린 채 누군가에게 묻는 듯한 표정을 한 그는 영웅이 되지 못한 현대인의 자화상인 것이다.
실크로드라는 주제에 기대어 해석 가능한 작가들의 작품은 유목적이고 삶의 공간을 경계짓는 것에 대한 은유를 보여주기도 한다. 왕즈강(王志刚)은 손가락으로 일일이 떼어 붙인 흙으로 구성된 사자를 닮은 동물과 그의 그림자가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작품을 출품하였다. 힘을 보여주는 작은 형태는 사막의 동물을 상기시키며 장지엔타오(蒋剑韬)의 보라색 Dog는 골조에 흙을 붙여가는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며 작가의 지문을 통해 털과 근육이 나타나는 형태감을 보여준다. 이들 동물은 조형의 요소로 고찰할 수 있지만 보기 드문 그 색감과 무게감을 잃은 형태는 김선구의 〈행복한 행진〉이 보여주는 천리마의 도상이나 하얀 독수리 위에 푸른 낙타가 위치한 박상희의 〈낙타의 꿈-실크로드〉는 이들 동물이 길을 연결하는 상징으로, 강민규 〈알비노〉는 말 그대로 하얀색의 빛나는 동물 형태를 표현하여 ‘길’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스시앙동(石向东)의 The Sea도 실크로드의 상징으로 독해할 수 있을 것이다.
원인종의 철조용접 〈산.수〉는 산과 물, 물과 길 그리하여 생명을 의미하는 오래된 산수화의 의미를 철조로 구현한 동시에 실크로드의 의미를 새긴 것이다. 정대현의 〈공간〉또한 테라코타의 작은 조각들은 열 속에서 생성된 그 색상 그대로 배열되어 지나친 햇빛에 의해 균열된 대지 혹은 벽을 보여준다. 사막의 뜨거운 공기는 신기루처럼 사막을 펼쳐보이는 김태수의 일련의 작업들에서도, 심영철의 회전하는 이미지 속에서도 품어져 나온다. 그 신기루에서 가장 이르고 싶은 고, 집의 모습을 드러낸 최은정의 작품명이 〈희망〉인 것은 절묘하기까지 하다. 그 기나긴 실크로드의 여정에서 이재효의 나무가 보여주는 흔적들은 물길이자 사람 길과도 같다. 이지은의 펼쳐진 화면 속 도자기와 동물은 길과 상품의 교역 그리고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진 고대사회가 시간의 결과임을, 손정은의 〈세라유〉는 이 길고 긴 여정의 결과물이 융합과 혼성임을 은유한다. 오귀원의 〈여기에 있는 것과 저기에 있는 것: 8, 8, 8〉은 조각과 공예의 경계, 그리하여 예술에 대한 물음을 요구하지만 이 전시에서는 정말 삶의 흔적을 비교하는 실크로드 여행지의 어떤 장면들과 같은 생각이 든다. 그렇게 실크로드는 미지의 세계이자 익숙한 공간이 아닐까 추정되는 것이다.
최태만은 전시 서문에서 이렇게 전시명의 의미를 밝혔다.
“접속이 내포하고 있는 함의는 서로의 경험과 지혜를 연결하여 21세기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조각이 무엇인지 찾자는데 있다. 이 전시에 참가하고 있는 예술가들은 따라서 접속의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인적 자산이라고 할 수 있다. 조각은 물질을 기반으로 형태를 표현해야 하므로 물질 자체를 거부할 수 없다. 물질을 껴안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물론 공간과 시간을 가로지를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상상력이다. 이 상상력이 역사에 뿌리를 내린 것일 때 그것으로부터 발생한 작품 속에 구현된 실크로드는 더욱 견고한 현실이 될 것이다.”
이 말은 아시아라는 지역에 거주하는 두 지역의 작가들이 고대사회의 교통로를 확인하고 그 재생이 역사적으로 너무도 당연함을 의식하는 과정임을 일컫는 것이라고도 읽어볼 수 있겠다. 한중 조각가의 교류는 국가적인 혹은 관제적인 문화의 부딪침이 아니라 서로 소통하고 교환하는 실크로드에서 일어난 사건과 같은 것이어야 함을, 모름지기 현대 미술은 그래야 함을 이 조용한 전시장에서 새기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