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근대 동양화의 거두 현초 이유태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展
기 간 : 2016.10.25-11.5.
장 소 : 이화여자대학교 이화아트센터
“특히 이번에 보인 진채세필의 화사한 「모단」 두 폭은 그의 수업역정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주목된다. 남화풍으로 대충 윤곽만 그어버리는 요즘 풍조에서는 보기 어려운 작품이다.”(『중앙일보』, 1972. 12. 6.)
현초 이유태(玄艸 李惟台, 1916-1999)가 1971년에 이화여대 동양화과 교수이자 미술대학 학장으로 있으면서 인사동에 화실을 마련하고 1년 넘게 그린 그림으로 이듬해 겨울에 열었던 개인전을 소개한 글이다. ‘진채세필’이라 한 그의 작품은, 광복 이후 왜색 논의에서 자유롭기 위해 대다수 동양화가들이 택한 수묵 세계로의 침잠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채색화 방법 자체가 왜색이라고도 오도되고 있던 당대에 그는 분명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화사함을 간직한 목단을 보여주었나고 신문기사는 전한다.
진한 향기가 배어나오는 색채를 꽃밭에서 화면으로 고스란히 옮겨왔을 번한 꽃의 자태는 이번 전시 작품의 한 귀퉁이에서도 만날 수 있다. 1944년 작 〈화음〉의 화면 왼쪽에는 거칠고 둔탁하여 화병이라기보다는 화분에 가까운 도자기에 희고 붉은 꽃이 흐드러져 있다. 원근법이나 위치로 보아 꽃은 화면 전체에서 가장 전면에, 다음은 여인, 피아노 순이다. 아름다운 여인과 꽃의 조화는 피아노로 상징되는데 그 싱싱함과 생명력, 아름다움이라는 통속적인 속성의 비유에도 불구하고 의심할 바 없는 것은 그의 화면이 정갈하면서 품격이 있다는 점이다.
이유태 <화음 和音> 화선지에 먹, 채색, 210×148.5cm, 194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동시대 남성작가들이 표현해내는 여인상과 그의 여인상들은 거리가 있다. 화면 속 여인들은 관음증을 만족시켜주는 수동적 존재임에도 부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유태의 화면 속 여인들의 시선은 주체적이다. 〈화음〉의 그녀는 꽃이 아니라 꽃을 쳐다보는 존재이다. 〈화음〉과 짝을 이루는 〈탐구〉에서도 실험실 속 그녀는 관객의 시선에 눈을 맞춘다. 그리고 〈화음〉에서처럼〈탐구〉에서도 전면 우측 하단의 토끼에서부터 탁자, 여인, 다시 키 작은 장 그리고 후면의 2단 장 위의 시험관 등을 배치시켜 우측 하단에서부터 좌측 상단으로 시선을 흐르게 하여 공간감을 부여하고 있다. 게다가 시험관 안에는 각기 다른 양의 액체가 담긴 것을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리로 만든 기구의 반짝이는 반사광을 통해 형광등이 켜진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정확한 데생과 묘사는 동양화를 ‘과학적인’ 서양화와 견주어 손색없어 보이게 한다.
이유태 <탐구 探究> 화선지에 먹, 채색, 212×153cm, 1944,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깔끔하고도 밝은 화면은 그의 인물들이 차가운 지성의 소유자로서 구질구질한 사회의 더러운 점은 티끌만치도 갖지 않은 존재처럼 보이게 한다. 물론 그러한 화면이 이유태의 성정을 반영하는 것임은 동시대를 산 이경성에 의해서도 증언된다.
“온화한 성품에 조선적 선비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이유태에게 자극과 과격은 금물이었다. 정신의 균형을 잃지 않는 중용의 길만이 오직 그의 생활의 신조였다.”
여성은 남성적 욕망에 의해 소비되는 이미지가 아니라 시대의 모습을 상징하는 하나의 언어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의 스승 이당 김은호가 보여준 미인도들과도 거리가 있다.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유태가 그림의 길에 들어선 것은 1935년 이당 김은호에게서 사사하고서부터로 알려져 있다. 그는 1937년에 일본의 제국미술학교에 유학을 가서 가와사키 류이치에게서 배웠지만, 이미 형성된 자신의 세계를 지속하는 데로 나아갔다. 일본화를 공부하였지만 일본식 일본화가 아닌 김은호의 전통적 필법에 기반을 두고 조형화하여 나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 전반에서 일본화적인 색감보다는 친숙한 김은호풍의 세계를 만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후소회 활동 등 김은호의 제자로서 역할을 하였지만 모더니스트로서 동양화 화폭 속에 고정된 인물화를 동시대의 생생한 것으로 만들었다. 앞서 두 작품도 그러하지만 1942년 작 〈초장〉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전통을 소재로 하되 여인들은 당대의 여인을 선택하여 관념화 하였던 것이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신부의 모습은 〈영니삼대-지, 감, 정〉에서 다시 재현되지만, 당대성을 잃지 않은 고전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탐미적 시선이라 규정할 수 있다. 단정한 이목구비에 정갈한 차림의 여인들은 전통의 여신이 현재화한 것임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물론 이번 전시에서 〈지, 감, 정〉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근대의 이념을 동양화로 재해석한 이유태의 〈지, 감, 정〉은 그의 〈화음〉과 〈탐구〉 연작 앞에서 반추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게다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총독상을 비롯한 수상의 영예는 그가 민족의식에서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니었음을 확인시켜준다.
그는 철저히 작품 안에서 미를 찾는 당대 지식인의 한 유형이었으며, 그것을 합리화한 작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화면 앞에서 부드러운 채색의 도도한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스승 김은호를 비롯하여 문하에서 함께 성장한 김기창, 장우성과 달리 그가 그림을 통해 영달을 꿈꾼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감각하는 미 자체의 표현에 주력한 결과일 것이다. 그의 화면에 존재하는 조선의 여인들은 당대인들이었지만 작가의 사회적 욕망을 은유하는 몰모트가 아니라 그가 느끼는 미의 발현체로 존재했던 것이다.
광복 후 1947년부터 그는 1979년 정년퇴임에 이르기까지 학교에 몸담으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작품은 변화하였다. 젊은 날 채색화를 보여주는 다람쥐의 세밀한 묘사에만 머물지 않고 또한 인물화에 정통하였으며 산수도 그에게 있어 다른 영역이 아니었다. 애초에 산수화 또한 잘 그렸던 것이다.
이유태 <산 山> 화선지에 수묵담채, 65.2×137.8cm, 1950,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1960년대 이후 그의 산수화는 정갈하며 세밀한 인물화처럼 구축적이며 단단한 화면을 제시한다. 남화적이라 일컫는 먹의 운용에 맡기는 산수화가 아니라 일일이 붓에 의해 재생된 화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워둠으로써 드러낸 달, 손대지 않음으로써 부각된 설경이라는 전통의 방식을 고수하는 그의 화면이지만 정갈하고 예리한 무엇인가가 거기에는 있다. 그것은 아마도 대상에 대한 정확한 묘사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어느 것 하나 흐트러지지 않게 위치시켜 하나의 자연을 이루게 하는 것, 그것은 산수화가 선비의 이상향이자 윤리적 세계의 반영이었던 것처럼 그의 화면은 그렇게 정신으로 운용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있게 하는 그 창조적 포치야말로 그의 산수화가 다른 동시대 작가들 것과는 달라 보이게 하는 요소이다.
이번 전시에는 이유태라는 이름을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초상화 〈퇴계 이황 표준영정〉도 출품되어 있다. 유약하고 깐깐해 보이는 이황을 표현해낸 것이라고 비판받는 이 초상화는 실은 당대 학자들이 생각하는 유학자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책만 읽고 앉아 세상을 바라보는 유약한 몸 안에 깃든 우주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당대 유학자에 대한 인식이었던 것이다. 그 또한 이황을 그러한 인물로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초상화의 방식으로 유복을 입고 복두를 쓴 모습을 나타낸 그의 초상화는 화폐에도 적용되었다. 이율곡이나 신사임당 등은 다시 그린 그림으로 사용하였는데 퇴계 이황이 그려진 천원짜리는 이유태의 그림을 그대로 재연한 것이었으니, 표준영정의 의미를 잘 살린 사례로서도 기록될 일이다. 그런데 이 또한 작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루어진 일이니 그는 유독 유복한 작가 중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이유태 <퇴계 이황 선생 영정 退溪 李滉 先生 影幀> 비단에 채색, 120×84cm, 1974, 한국은행 소장
게다가 이번 ‘탄신100주년전’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니 더욱 의미가 깊다. 전시실 반은 스승 이유태의 작품과 아카이브로 채우고 나머지 반은 이유태의 제자와 그 제자의 제자들의 작품을 전시하여 사승관계를 명확히 하고 있으니, 근래 보기 드문 모습이기도 하다. 스승을 기억하는 제자들의 달뜬 언어들 속에서 잘 맞는 양복에 정제된 표정의 모더니스트의 동양화가의 위상을 새삼 가늠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림으로만 만나던 이유태의 세계가 구축된 과정 그리고 그의 인간됨을 이 크지 않은 전시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마도 스승에 대한 제자들의 경모의 빛 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