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3일부터 11월 30일까지 89일간 부산시립미술관과 F1963(고려제강 수영공장)에서 열리고 있는 2016 부산비엔날레를 중반 지점에 다녀왔다.
이번 부산비엔날레의 주제는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이다. 비엔날레라는 것이 다양한 종교와 인종, 국적을 가진 예술인(다중지성)들이 모여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토론하는 장소(공론장)이라는 내부 정의를 바탕으로, 현 지구상의 시각 문화가 “혼혈하는(hybridizing)” 중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이에 부합하는 예술작품을 모았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했다.
예년의 본전시와 특별전 형식이 아니라 부산시립미술관에서의 프로젝트 1과 F1963에서의 프로젝트 2가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있다. 프로젝트 1의 제목은 “an/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로 1960-80년대의 자생적 실험미술인 아방가르드를 조망하는 작품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한다. 프로젝트 2의 제목이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이어서 사실상의 본전시 같은 느낌이다.
Project 1. an/other avant-garde, china-japan-korea (부산시립미술관)
한중일 3국 5명의 큐레이터가 70여 작가의 작품을 모아놓았다. 중국의 경우 1976년 문화대혁명 후 북경의 봄, 천안문 사태, 원명원 사태까지 이어진 1995년까지가 범위가 되어, 일련의 저항과 갈등의 흔적을 보여준다. 일본 파트는 히로시마 원폭 이후 80년대 말까지의 전위 예술, 구타이, 모노하, 슈퍼플랫 등 다양한 실험미술을 포함한다. 한국은 70-80년대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이나 민중미술, 단색화의 기저 중에서 주류와 아닌 것들이 뒤섞여있다.
치우즈지에, <문신 2>, C 프린트, 100x80cm, 1996
어린 시절부터 문학, 역사, 철학관련 서적을 광범위하게 탐독하고 전통적인 서예기법을 꾸준히 연습한 치우즈지에는 플럭서스의 영향을 받아 중국현대미술 최초로 관념미술과 사진에 발을 디딘 작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쉬빙, <사례의 전환연구 1>, C 프린트, 42x29.7cm, 1993-1994
쉬빙은 동서양 문화가 말과 문자의 번역을 통해 진정한 소통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작가이다. <사례의 전환연구>에서는 돼지우리 바닥에 각종 역사 및 문화관련 책들이 깔려있고 그 위를 발정기의 수퇘지와 암퇘지가 돌아다닌다. 몸에 영문으로 ‘천서’라는 글귀가 새겨진 수퇘지와 ‘지서’라는 글귀가 새겨진 암퇘지는 교배하게 되고, 동물적 본능과 정신적 생산활동이 전시를 통해 보여질때 관람객들은 이런 난처한 예술적 담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난감할 수 밖에 없다.
에노키 츄, <RPM-1200>, 철, 가변크기, 2006-
에노키 츄는 16세에 고베로 이주한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관적으로 고베를 창작의 거점으로 삼고 활동하는 전위미술가이다.
야나기 유키노리, <헌법 제 9조>, 네온, 전기장치, 1994
아이다 마코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한 기념비>, 골판지, 설치, 2008-
정복수, <바닥화 – 밟아주세요>, 리넨천에 아크릴, 280x980cm, 1981
김동규, <빛기둥>, 천, 염료, 플라스틱 용기, 400x600x50cm, 1974
이강소, <무제-75031>, 나무, 닭, 돗자리, 석회분, 철, 분필, 사진, 끈, 25x350x350cm, 1975
신영성, <코리안 드림>, 벽걸이 선풍기, 510x200x40cm, 1986
아시아의 세 국가 안에서 현대미술이 어떻게 좌충우돌하면서 흘러왔는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면도 있었지만, 제목에 ‘아방가르드’가 포함되는 것이 적절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렇다고 ‘저항’으로 묶을 수도 없고, ‘비주류’로 묶을 수도 없는, 그렇다고 비엔날레에 기대하는 바인, 현재의 시각미술에 이들이 어떤 의미로 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도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전시실 중간에 아카이브라는 이름으로 설명없이 죽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수많은 사진과 서류들은 그중 가장 난해해 보였다.
관객 참여 작품, 낯선 작품, 한중일의 공통점과 차이점, 오랜만에 만난 70년대 작품들, 지진 영향으로 흐트러진 작품 등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은데도 찜찜한 기분은 그 “아방가르드”라는 단어 때문일 것이다. 세 국가에서 아방가르드를 정의하고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아보인다. 큐레이터의 설명과 전시 작품들을 통해서 이해되는 바는 "실험적인" 형식 특성과 "저항적인" 내용 특성이라고 단순화할 수 있을 텐데, 순순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지 않을까 싶었다. 서양에서 온 개념을 넣어 아시아 3국의 현대미술의 한 측면을 뭉뚱그려 보는 것보다는 좀더 섬세한 손길이 필요하다.
Project 2. Hybridizing Earth, Discussing Multitude (F1963, 고려제강 수영공장)
평일에는 셔틀버스를 운영하지 않아서 택시로 20여 분 이동하여 F1963 전시장에 도착했다. 옛 고려제강의 공장을 리모델링한 전시장으로 부산시립미술관보다 대중교통상 외진 편인데도 다양한 연령층, 성별, 국적의 꽤 많은 관객이 흥미롭게 관람을 하고 있었다. 전시장 가득 다양한 스케일과 형식의 작품들이 조화롭게 전시되고 있었다.
리나 베너지, Ethnic and Race braided long hairs and coiled and entwined. Oh how it made and made , ate, ate in shade, slumbered and soiled her reflection to see this faked- nations make me small sweet cakes, 린넨, 글라스, 껍데기, 뿔, 황마 등, 166.5x80x78cm, 2014
폴케르트 드 융, Business As Usual: "The Tower", 스티로폼, 유색 우레탄폼 ,300x100x100cm, 2008
저우원도우,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스테인리스 강철, 전동 와이퍼, 먹, 300x500x500cm, 2015
조아나 라이코프스카, My father never touched me like that, 영상 비디오, 10분52초, 2014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었지만, 혼성, 지구, 다중, 공론 이 네 가지 말들이 역시나 머리 속에서 부딪히고 있어서 순수한 마음의 관람이 어려웠다. 어떤 작품의 경우 이질적인 것을 섞은 조형적 요소를 혼성성이라고 보고 그것 때문에 단순히 선택된 것이 아닌가, 또 이중적인 면을 보여주는 몇몇 작품을 대하면서는 설마 이것을 다중성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하는 의심이 들곤 했던 것이다.
A1 사이즈의 거대한 리플렛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전통과 현대, 인간과 자연, 동양과 서양, 아날로그와 디지털, 자본과 기술의 혼혈로 만들어진 ‘이 풍요롭고 가난한’ 세상의 끝자락이 혼혈하는 지구입니다. 그곳은 자본과 기술로 단순히 환원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인류의 삶이 존재하는 곳이며, 현실과 대립하는 인간의 저항과 탈주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혼혈하는 지구, 다중지성의 공론장’이라는 주제는 이러한 모든 가능성을 논하는 자리입니다. 시장의 비효율성과 인간의 비합리성, 시장과 제도에 종속된 미술의 근원적 취약성 등을 모두 성찰하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자리입니다. 벤야민의 절규처럼 문명의 기록은 동시에 야만의 기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부산 비엔날레도 그렇기를 바랍니다.
개념적으로 뒤섞여버린 모호한 설명이라서가 아니라, 스타일에 치중해서가 아니라, 너무 진부한 느낌이어서 답답하다. 오늘날 아시아 한 구석의 한 도시에서 열리는 비엔날레가 그러한 혼란과 정체(멈춤) 상태를 드러낸다면 그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한 국가의 세 도시에서 동시에 비엔날레를, 각각의 색깔과 개성으로 열기란 이리도 힘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