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김진열 전
전시기간 : 2016.9.28 - 10.12
전시장소 : 서울 나무화랑
글 :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김진열은 오래 전부터 그만의 낯선 방법론을 보여주었다. 종이를 두텁게 붙여나가서 만든 화면에 날카로운 함석조각, 철망, 천조각 등을 절단하고 붙여나간 것이 이미 80년대 초기의 작업들이었다. 그는 비교적 두툼한 종이를 여러 장 겹쳐놓거나 뭉쳐놓은 후 그것을 부정형으로 뜯거나 부착해나가면서 화면을 만들었다.
거칠고 단단하고 그러면서도 여러 종이들이 머금고 있는 사연이 중층적으로 포개어져 있는 그런 화면이다. 그는 체질적 요소로서 자르고 재구성하고 붙이는 양식들을 선호한다. 그러한 작업의 방법론은 다양한 사연을 지닌 사람들의 애환과 삶의 굴곡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데 적합해 보인다.
땅과 하늘을 이어가니Trees between Blue and Land, Mixed Media & Acrylic, 91cm×116.5cm, 2016
작가는 그런 방법을 빌어 이 땅의 소나무도 표현했다. 그의 소나무 작업은 평면위에서 펼쳐지지만 정형화된 화면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탈(脫)평면화되어 공간으로 확장되어 뻗어나간다. 이른바 부정형의 틀은 화면이자 동시에 프레임이 된다.
그의 작업은 또한 매우 경제적이다. 그는 캔버스라는 기존의 고착화된 틀을 거부하고 관습적이고 습관적, 관례적 미술어법을 지운다. 각종 우편물, 특히 팜프렛 등을 모은 후 이를 두텁게 붙여 만든 단단한 지지대를 화면으로 삼아 그 위에 형상을 얹힌다. 여기서 여러 재료는 단순히 사물의 외형을 재현하거나 표현의 연출적 효과나 장식성의 차원에서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인상, 느낌, 감정 등의 정확한 떠냄에 호응하는 것들이다.
그는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자신의 느낌의 총체를 반죽해가는 편에 속한다. 조각적 배려와 회화적 배려가 공존하는 작업이다.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여러 소나무를 소재로 한 이 작업은 땅에서 혹은 근접해서 바라본 소나무의 몸체만을 집중적으로 가시화하고 있다. 그림을 보는 관자의 눈과 몸이 오로지 저 소나무의 몸체에 부딪쳐 튕겨나갈 것 같다.
새삼 우리는 소나무의 몸통, 그 외피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껍질 그리고 소나무가 직립해서 하늘로 치솟아 오로는 형태에 집중한다. 마치 내 몸이 소나무가 되어 위로 올라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형국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낸 각 소나무의 생김새와 형태를, 나아가 그 역사와 사연과 자연의 온갖 풍상을 이겨낸 불굴이 정신들을 호명하고 있는 듯하다.
어찌 보면 자신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소나무들을 전시장에 다시 불러 모아 환생시키고 그들을 위안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에게 소나무는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한 소중한 존재였을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한국인들에게 전통과 문화의 상징물이다. 전통이란 심상의 기억을 통해서 환생한다. 그것은 구체적인 물질과 대상을 통해 드러난다.
비록 그 시간대를 경험하거나 체득하지 못했어도 선조들의 삶이 이루어졌던 이 땅의 모든 것에 은닉된 것들을 산 자들은 절로 깨우친다. 문화유전자는 이렇게 인체 내부의 피에 의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바깥에 있는 사물과 풍경과의 접촉에서 유전되고 전파될 수도 있다. 사물과 풍경의 기억이나 체험을 통해서 문화의 정체성은 세록세록 만들어진다. 두터워진다.
이어령의 표현처럼 한국인은 한국인의 생활 속에서 만난 여러 가지 사물이나 도구, 풍경을 통해서 그 문화유전자를 만들어왔고 그것이 유전되고 있다. 그 대표적 존재가 바로 소나무다.
나는 영월 솔 고개 소나무, 장릉의 소나무, 해남 군청 앞마당에 있는 소나무 등을 잊지 못한다. 지방 여러 곳에서 무척 많은 소나무를 보았다. 어쩌면 내게 여행이란 소나무를 보러 다니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국 작가 중에서 소나무를 일품으로 그리는 이들이 여럿 있는데 김진열의 이 소나무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