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진녕(미술칼럼니스트)
경기도 남양주의 모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돌조각의 방법-김성복/오채현 전> 전시장을 들어서자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 흔하게 접해서 기시감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화강암의 미덕을 복권시켜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1층 전시장 입구에는 2미터가 넘는 김성복의 <바람이 불어도 가야한다>와 오채현의 <해피 타이거>가 세워져 있었고, 1층 실내 전시장에는 김성복의 <바람이 불어도 가야 한다> 시리즈와 능묘석수(陵墓石獸)의 호랑이를 닮은 <신화>시리즈가 전시되어 있다.
김성복 <바람이 불어도 가야 한다> 260x120x210cm, 화강석, 2016
김성복 <바람이 불어도 가야 한다> 75x15x15cm, 붉은사암, 2009
김성복 <신화 3>
김성복 작가는 이번 전시에 화강암과 사암, 오석, 대리석 등 다양한 돌을 사용한 작품을 냈다. 전시 작품 중 눈길을 끄는 것은 능묘석수의 호랑이상을 모티브로 삼은 듯 보이는 <신화> 시리즈였다. 능묘에 놓인 호랑이 상은 능묘의 수호자로서 벽사(辟邪)의 역할이 주어졌을 테인데 김성복의 호랑이는 능묘의 석수에 대한 일대일 이식이 아니라 더 해학적이고 현대적인 해석이붙어있는 느낌이다. 호랑이 머리에 올려진 소도구(사모관대와 족두리)는 ‘혼례’라는 의식에 매달려있는 욕망을 상징하는 기호로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김성복의 모든 호랑이는 웃는 낯에 도깨비 방망이를 닮은 강력한 꼬리를 잔뜩 치켜 세우고 있다. 21세기에 통용되는 고양이 꼬리 언어 사전을 보면 꼬리가 바짝 세워진 것은 친근함과 만족의 상태를 나타내는 뜻이고, 꼬리털을 바짝 세워 부풀린 상태로 꼬리를 치켜 든 것은 화가 나있다는 뜻이라고 한다. 웃는 낯이지만 꼬리가 유난히 두텁고 바짝 서있는 김성복의 호랑이는 화가 난 상태일까, 만족한 상태일까?
이번 전시의 기획자인 조은정 미술평론가는 “김성복의 호랑이는 벽사의 의미를 떠나 욕망과 결합한다. 꼬리에 도깨비 방망이를 단 호랑이는 2층, 3층이 되어 이중 삼중의 욕망이 결합하고 두 개, 세 개의 꼬리가 달려 극대화를 향해 달린다. 그렇다면 김성복의 호랑이는 기복(祈福)일까? 그는 자신의 호랑이를 <신화>라 이름 지었다. 롤랑 바르트는 ‘어떤 사물에 점점 이야기를 붙여서 눈사람처럼 확대되어 가는 상황’을 신화라고 했다. 예술이 우리 삶의 반추를 도모하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김성복의 호랑이는 이제 현대인의 멈추지 않는 욕망에 대한 경고로서 자리잡는다”고 설명했다.
지하 1층 전시장으로 내려가면 ‘낯익은 새로움’의 또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오채현의 <해피 타이거>와 불상 시리즈.
의무 교육과정을 이수할 때 교과서에 등장한 경주의 석굴암 불상 도판과 서양의 밀로의 비너스로 대표되는 매끈하고 정교한 대리석 조각 도판을 보면서 우리 조상은 왜 대리석 조각같이 화려하고 매끈한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이게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 환경과 문화, 취향의 차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학교를 벗어난 뒷날의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대리석은 한반도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고 입자가 굵고 단단한 화강암은 한반도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지만 돌을 이용한 장식물 가공에는 돈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생태계의 정점에 있는 지배계층의 권력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영광을 기리는데 쓸 장식재를 어떤 형태로 얼만큼이나 쓸지 결정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에 앞서 문화와 종교, 자본력 등 경제사회적인 요소에 좌우되기 마련인 것이다.
문화재 목록을 보면 한반도에서 화강암을 소재로 한 대형 조각품이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까지는 넘쳐났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까지는 철불같은 금속 소재의 불상 조각과 석불 조성이 공존했지만 유교를 앞세운 정교일치 시대였던 조선에선 불교가 마이너리티로 전락하면서 왕실 부녀자의 사적인 후원을 제외하고는 경제적 잉여물의 투입이 미미했다. 이는 고려시대까지 한반도에서 당대의 경제력과 문화력의 표상이 되던 불교미술이 하위문화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조선 문화의 우선 순위에서 탈락한 불교 조각은 조선이 망하고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최근까지 조선조 어디쯤에서 박제된 잔뜩 쪼그라진 입술에 목이 굽고 보관을 쓴 ‘전통’으로 만물상에 군림해 왔다.
오채현 작가의 돌조각은 이 박제된 전통에 균열을 내고 당대의 일부와 조응하고 있는듯 보인다.
민화에서 보던 해학적인 표정의 호랑이에게 현대 목판화의 투박한 선을 입히고 평면성을 강조한 화강암의 육체를 부여한 오채현의 작업은 전통과 현대의 요소를 골라 결합시켜 작가의 이름을 새겨넣은 창작으로 보인다.
양면불이 취하고 있는 오른손 검지를 뻗어 뺨에 댄 손갖춤(手印)은 반가사유상을 닮은 듯도 하지만 가슴에 안은 호랑이는 전래의 불상에는 없던 형태이다. 절집의 호랑이는 대개 산신각에서 산신과 함께 등장하지 부처와 함께 하지는 않는다. 기름한 듯 보이는 전체적인 형상이나 두툼한 눈두덩은 북제나 북주의 영향을 받은 불상을 연상시키지만 포동한 뺨이나 미소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강역에서 발견된 석불과 닮아 있다.
그는 전래의 장르적 규칙에서 자유로운 그의 작품에 <염원>이나 <행복한 부다>같은 이름표를 달았다.
오채현, <해피부다 happy buddha>, 56x27x72cm, 화강석, 2016
지하 1층 출구에서 모란미술관 안뜰로 나서면 2미터가 안팎의 대형 <해피 타이거> 석 점이 기다리고 있다. 이 해피 타이거의 미소에 현혹되면 안뜰 가장자리 나무 밑에 놓인 4미터에 육박하는 비로자나불을 지나칠 수도 있다. 이 불상은 대구 동화사의 비로자나불좌상(863년 조성)을 떠올리게 하지만 경주 남산에서 발견된 무수한 석불 가운데 하나를 모셔온 것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자연스럽고 무심해 보인다. 돌을 떼 낸 자리를 가리지 않고 작품의 한 부분으로 활용한 이 석불은 그로인해 완벽한 경배의 대상으로 조성된 과거의 불상이 아닌 현대의 작품임을 드러내고 있다.
오채현 <해피 타이거>
김성복과 오채현의 작업이 전통의 재현이나 반복에 그쳤다면 현대미술의 전시 공간인 화이트 큐브 안으로 들어올 이유를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조은정 미술평론가는 “김성복과 오채현의 작품은 전통으로만 해석되고 키치적 감각으로 소비되던 호랑이 조각을 현대미술의 담론 안에서 재해석하고 그 장을 확장시키는 것은 전통을 현대미술의 영역으로 확정시키는 노력이다. 인간 형상과 부처의 형상이 시공을 초월하고 도상을 은근히 넘어서 드러나는 경계를 넘는 형태는 일견 친근함으로 인지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장인적 노고와 익숙한 형태성이 이들의 작품을 미술관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이들 작품이 자리한 위치는 세계화와 글로벌리즘에 잠식된 현대미술의 정체성을 전통에 둠으로써 균열될 수밖에 없는 현대성과 동시대성을 극복하는 시도에 있다. 그리고 전통이라는 위대한 나무의 뿌리에서 발원하여 가지로 올라 통일된 세계를 보이는 것이 아닌 곳에 있다. 이들의 전략은 리좀의 구조이다. 익숙한 벽사의 호랑이에 전통의 해학을 넘어서 욕망을 결합하고 단청장엄(丹靑莊嚴)을 통해 사람 자체, 그 육체가 사원(temple)임을 그 안에 정신의 부처가 모셔져 있음을 일러준다.”
여기서 ‘리좀(rhizome)’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안한 현대철학용어로 한 철학사전은 이 말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줄기가 마치 뿌리처럼 땅 속으로 파고들어 난맥(亂脈)을 이룬 것으로, 뿌리와 줄기의 구별이 사실상 모호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형(arborescence)과 대비시켜 리좀 개념을 제기한다. 수목이 계통화하고 위계화하는 방식임에 비하여, 리좀을 제기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이 지닌 통일되거나 위계화되지 않은 복수성과 이질발생, 그리고 새로운 접속과 창조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한다.’(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이 전시를 기획한 조은정 평론가가 두 작가의 작업을 한데 묶어 전시하면서 ‘리좀의 구조’라 부른 것은 전통의 한 갈래이던 호랑이나 불상을 가져와 오늘날 대중의 욕망에 대응하는 새로운 형태의 창조 작업을 한다는 맥락으로 이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