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도자-옛 회암사를 빛내는 美
전시기간 : 2016.6.22-10.9
전시장소 : 경기도 양주회암사지박물관
3천명이나 되는 사람이 한 곳에 살고 있으면 ‘이들이 한 끼에 먹는 쌀의 양이 얼마나 될까’라는 궁금증은 누구나 흔히 해봄직하다. 그런데 이들이 먹는 ‘밥 그릇과 반찬 그릇의 수자는 얼마나 되며 또 무슨 그릇을 썼을까’ 하는 문제가 되면 얘기가 좀더 전문적이 된다.
정비된 회암사지
고려 말의 문인인 이색(1328-1396)은 양주의 회암사는 거찰로서 건물이 269칸에 이르며 3천여 명의 승려가 기거했다고 문집에 썼다. 그런데 이색이 그 글을 쓰면서 보았던 회암사는 그 후 100년도 안되어 훨씬 큰 규모로 확장된다.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1418-1483)가 13년에 걸쳐 사찰을 크게 넓혔다는 것이다.
회암사의 중심 건물이던 보광전 터에서 발굴된 처맛끝 토수(吐首)
이렇게 되면 회암사의 규모는 3천명 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먹고 살았던 사찰이라 할 수있다. 승려나 일반 신자만 있었던 곳이 아니다. 고려때 세워진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인연으로 조선 들어 왕실과 인연이 깊었다.
용무늬 암막새
이성계가 태상왕으로 물러나 함흥으로 가기 전에 회암사에 머물자 태종이 회암사로 가서 태상왕을 알현했고 중국 사신도 회암사에 가서 태상왕을 만났다. 세종 때에는 일본에서 사신으로 온 중이 회암사에 머물다 죽기까지 한 사건이 있었다.
상감분청사기 향완(香碗)
이렇게 왕실과 가깝다 보니 숭유억불을 주장하는 유생들의 반발을 사는 것은 당연했다. 세종때 성균관유생 방운(方雲)이란 사람은 ‘백성들을 먹을 것이 없어 조석을 이어가지 못하는데 중들은 굶어죽는 자가 없다’고 상소하며 회암사를 가리켜 ‘기둥과 지붕이 하늘을 찌르고 주옥과 금으로 꾸민 것이 눈을 부시게 하며 빙 둘린 난간과 커다란 누각이 무려 수백간이나 되다’고 적었다.
백자발(白磁鉢)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회암사에서 당시 사용된 식기류가 단순하게 통일된 잡용기(雜用器)일 수가 없다는 점은 명확하다. 이런 회암사는 중기 당시 대표적 옹호자였던 문정왕후(중종의 비, 1501-1565)가 죽은 뒤 선조 연간 어느 쯤에 불타버렸다.
1997년부터 이뤄진 회암사지 발굴의 내용은 짐작대로 응용도자사의 현장처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 맞추어 여러 종류의 도자기가 사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출토의 관요 도자기 파편
이들 도자기의 종류를 보면 압도적인 수가 음식이든 음료이든 식기에 관련된 것들이다. 그 종류를 보면 고려 말의 상감청자에서 조선초기의 분청사기 그리고 초기에 많이 썼던 순백자가 주로 출토됐다.
특히 고려를 지나 조선에서 번성해 조선초기의 순백자 수가 전체 출토품의 97%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약간의 중국 청화백자류도 있다. 이들이 만일 파편이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오늘날 경매회사에서 명나라 초기의 청화백자로서 진중(珍重)되며 기록적인 값으로 낙찰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이들 중국제 청화백자는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최상류층, 즉 궁중의 고위층이나 종실 관계자 그리고 고위 승려들은 당시에 수입된 식기류를 사용했음을 말해준다.
양주 인근의 지방가마 제작의 도자기파편
실제로 다수가 출토된 순백자류도 크게 나누면 관요에서 제작된 뽀얗고 기품있는 백자와 지방가마에서 제작되어 색이 어둡고 군데군데 잡티가 섞인 백자로 나눌 수 있다. 조선초기 관요은 1467년(세조 13년)에 경기도 광주에 있던 자기소(瓷器所)를 관요로 삼은데서 시작한다. 관요는 그후 유산리, 관음리, 도마리, 번천리 등으로 옮겨 다녔는데 여기서 구워진 관요 식기를 대표하는 대접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굽 바닥에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글자가 써 있는 것이다. 이들은 현재 일부의 무덤 출토품과 관요 가마 주변에서만 출토되었는데 이곳 회암사지에서 대량으로 출토된 것이다.
천지현황 도자기 파편
이런 고급 식기뿐 아니라 흔히 자라병으로 표기되는 이른바 도자기 오강도 나왔다. 이는 관요 제품이 아니라 인근의 지방가마에서 구운 것들이다.
회암사지 출토의 도자기는 관요에서 제작됐든 지방가마에서 구웠든 당시 3천명 이상 되는 절 식구들이 끼니때마다 사용한 식기들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부엌으로 예상되는 전각(현재 위치 미확인)에서 집중적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 곳에 흩어져, 일부는 절 마당으로 추측되는 곳에서도 출토됐다.
회암사지 출토 명초의 청화백자 파편
또 출토품 가운데 불구(佛具) 중 백자는 거의 볼 수 없다. 분청사기로 만든 향로 파편이 나왔을 뿐인데 이 부분의 해석은 식기의 출토지 등에 관한 설명과 함께 앞으로의 연구가 더 필요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추기:
전시도록인 『도자 옛 회암사를 빛내는 美』의 수록논문인 「회암사지출토 조선전기 명문백자의 양상과 특징」(글, 박정민) 주(注)에는 1395년(태조 4년)부터 1565년(명종20년)까지 왕실과 종실에서 회암사에 내보낸 쌀, 곡식, 면포, 땅, 세금감면 등 하사품과 시혜사항 16건이 수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