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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원박물관의 「근대서예와 사군자」 전시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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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명 : 근대서예와 사군자전
기 간 : 2016.5.27.-7.24
장 소 : 수원 한국서예박물관
글: 황정수(미술 컬럼리스트)

아무리 과학이 발달하여 삶의 편리함이 정신을 지배하는 듯 보여도, 과학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오래 동안 축적된 문화의 힘이다. 특히 예술적 성취는 짧은 시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특별한 영역이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있음을 부러워하고, 좋은 작품을 소유하고 있는 것과 훌륭한 전시회가 열리는 것을 부러워한다. 때로는 그것을 보기 위한 여행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곳을 우리는 ‘문화 선진국’이라 부른다.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나 오르세,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마드리드의 프라도, 뉴욕의 구겐하임, 휘트니 등의 미술관은 항상 우리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도쿄 일본서도박물관


이렇게 부러운 곳이 서양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 도쿄(東京) 타이토구(台東區)의 한 작은 골목에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박물관이 하나 있다. 동양 정신의 정수라 불리는 서예작품을 수집한 특별한 박물관이다. 
이곳은 나카무라 후세츠(中村不折, 1866-1943)라는 일본 근대기의 저명한 서양화가가 40여 년 동안 수집한 서예 작품을 기본으로 하여 1936년에 세운 ‘일본서도박물관(書道博物館)’이다. 이 박물관은 1만6천여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소장품 중에는 중국 은대의 갑골문에서부터 청동기, 와당, 불상, 묘지(墓誌), 문구, 비탁(碑拓), 법첩(法帖), 경문 두루마리, 문인 법서 등 중요문화재 12점과 중요미술품 5점을 포함한 미술사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소장되어 있을 정도로 그 수준은 세계적이다. 
이곳을 찾는 한국인들은 그동안 한국의 우수한 정신성을 논할 때마다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서예가 현재 우리나라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 반성하고 부끄럽게 느끼기도 한다. 
신라 김생(金生, 711-?)으로부터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이야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초극적인 예술 혼 등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현재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반성이다. 그런 면에서 1988년 예술의 전당 서예관이 생긴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은 전시회와 교육이 주로 이루어지는 곳이라 서예만을 전문적으로 모아 보여주는 박물관의 역할을 하는 곳은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2003년 수원에 한국서예박물관이 생긴 것은 불모지에 숲이 들어선 것이나 다름 없다. 중견 서예가 한 사람의 노력으로 시작된 박물관은 많은 어려움도 겪었지만 훗날 좋은 결실을 이룰 뜻 깊은 시작임에는 분명하였다. 


수원박물관 전경


벌써 서예박물관이 설립된 지 13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후 이에 버금갈 다른 서예박물관이 생기지도 않아 이곳에 대한 기대가 큰 것은 여전한 현실이다. 이제는 소장품의 수준도 높아졌고 연구 인력의 인프라도 축적된 만큼 괄목할만한 성과를 나타낼 때가 되었다는 기대감도 있다. 그런 면에서 지난 5월부터 3개월간 있었던 주제를 ‘근대’라는 시기에 맞춘 「근대서예와 사군자」전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먼저 근대기의 전통적인 서예작품을 모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매우 뜻 깊은 의도이다. 조선후기 물밀 듯 밀려오는 열강들의 강점과 함께 많은 서구 문물들이 유입되었다. 미술계도 서구화의 물결에 동참하여 서양화가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일제강점 후에는 일본의 미술까지 한국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점차 한국의 문화계는 서양의 그림과 일본풍의 서화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시대를 잇는 그림은 미술계에서 자리를 잃어가는 형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나마 그림은 일본화 되어 가는 선에서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지만, 서예는 순수한 시각적 예술 형식이 아니라는 이유와 민족정서를 담고 있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술계에서 자리를 잃어가는 참담한 현실을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생겨난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처음에는 동양화, 서양화 등과 함께 서예가 한 부분을 차지했지만, 제11회 전람회부터는 서예 부분을 없애고 사군자는 동양화부로 합치게 함으로써 전통서화 부문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참담한 대접을 받았던 서예의 운명을 다시 되살리겠다는 의도의 전시는 민족적으로도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록을 받아보니 그 규모에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80여점에 달하는 작품과 방대한 도록의 두께에 담당자들의 노고에 머리가 숙여질 정도였다. 그러나 도록을 일견한 후 엄습해오는 개운치 않은 감정은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들었다. 한 때 인기 있었던 연속극의 유행어처럼 “이게 최선이었습니까?”라고 묻고 싶을 만치 눈에 거슬리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전시회의 실물을 보기 위해 박물관을 찾은 필자는 도록에서 느낀 것 이상으로 전시회에 많은 문제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다른 이의 지적을 반가와 하지 않는 우리 학계의 풍토상 전시기간 중에는 비판적인 논의를 제시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제 전시회도 끝나 담당자들의 부담도 줄었을 것임을 고려하여 지난 행사를 반추하며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전시회도록


첫째, 도록 속의 작품 수와 실제 전시하는 작품 간의 차이가 지나치게 차이가 많이 난다. 도록은 전시회의 기록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도록과 전시회의 작품 차이 너무 많이 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다. 도록에는 180여 점이 실려 있는데 실제 전시 작품은 반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은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과 같다. 

차라리 전시관에 맞는 양의 작품을 주제에 맞게 선정하고, 작품 해설을 치밀하게 하는 것이 더욱 효율적인 전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도록이 실리지 않고 전시된 작품 중에 위작으로 의심되는 경우도 문제가 될 수 있고, 전시되지 않았는데 도록에만 실려 작품의 권위가 확보되도록 실리는 경우는 수정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교육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둘째, 전시회의 제목인 ‘근대서예와 사군자’란 용어가 합당한 것인가의 문제도 따져보아야 한다. 또한 주제의 설정과 주제를 대변하는 작가의 선정이 합당한가도 살펴보아야 한다. 근대의 기점 설정에 대해선 역사학 분야에서나 미술사 분야에서 모두 어느 통일된 견해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 번 전시에서는 역사학에서 가장 넓게 보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싹이 나타나고 실학이 일어났던 18세기로 보자는 설”에 입각하여 근대를 설정한 듯 보인다. 이당(怡堂) 조면호(趙冕鎬, 1803-1887),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8-1893)이나  위당(威堂) 신헌(申櫶, 1810-1884), 고람(古藍) 전기(田琦, 1825-1854) 등의 작품이 소개한 것이 그러한 기준을 대변한다. 


조면호 <무량석각(武梁石刻)>



전기 <초요계윤(招搖啓運)>


그러나 이들 몇 사람 외에 동시대 다른 서예가들을 배제한 것을 보면 ‘근대’에 대한 개념 설정이 특별한 기준을 가지고 설정하였는지 의문스럽기도 한다. 더구나 이들은 재래의 문물제도를 버리고 근대적인 서양의 법식을 본받아 새 국가체제를 확립하려던 갑오경장(甲午更張)이 일어난 1894년 이전에 세상을 떠난 이들이어서 ‘근대’라는 개념에 어울리는가 생각하게 한다. 

전시 기획에 맞는 개념설정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한국 미술사에서 근대의 시기 설정은 보통 “한국의 전통미술과 근대미술을 외형적으로 구분 짓는 가장 뚜렷한 기준은 정신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서구화, 즉 작품제작의 논리화를 들 수 있다.”고 한 논제 하에 한국 근대미술의 연대 설정은 개화기를 기점으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면에서 이 번 전시의 주제 설정과 작가 선정은 숙고의 면이 부족한 듯 보인다. 

셋째, 대체적으로 각 작가를 대표하는 우수한 작품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미술 작품에 대한 박물관의 역할은 각 작가의 시기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과 역사적 가치를 보여 줄 수 있는 작품을 수집하여 보여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 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이른바 ‘평작’에 해당하는 것이 대부분이어서 감동을 주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면에서 6월16일부터 10월29일까지 열리는 호림박물관 신사분관의 기획특별전 ‘근대회화의 거장들-서화(書畵)에서 그림으로’전은 타의 모범이 되는 전시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거부였던 호림 윤장섭(1922-2016)의 수장품이라는 것과 회화 중심의 전시라는 차이가 있음을 고려하더라도 수준의 차이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차라리 정품을 전시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면 수원박물관 소장품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살려 기획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비록 미시적 시야의 전시가 되더라도 거대 미술관이 할 수 없는 특수성을 강조한 전시를 하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넷째, 도록 속의 오자·탈자와 편집 실수가 눈에 거슬릴 만큼 많다는 것이다. 시립박물관이라는 공공성을 고려하면 해서는 안 되는 수준의 실수이다. 심지어는 정오표를 만들었음에도 책의 완성도를 이루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략 통독을 하며 오류를 발견하여도 족히 40군데 이상이 발견될 정도이니 일상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경우인 셈이다. 도록은 전시회의 기록이고 미술사의 현장 교과서이기 때문에 가능한 한 오류를 줄여야 한다. 잘못된 기록은 두고두고 연구자들의 잘못을 반복하게 하여 미술사 연구를 오염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더욱이 한문으로 이루어진 서예 작품의 한문 기록은 점차 전문가들이 사라져 가는 현실을 고려하여 더욱 신중히 정리해야 할 것이다.


<도록 정오표>


다섯째, 좋은 전시회의 성패는 작품을 선(選)하는데 있다. 훌륭한 작가라 하더라도 항상 좋은 작품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작품 중에서 좋은 작품을 선별해 내는 것이 전시회의 시작이다. 수작에 속하는 작품을 전시회에 내놓지 못하는 것도 흠이 되는데, 다수의 위작이 전시회에 끼어든다면 이는 전시기획자의 수모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에는 진품으로 보기 어려운 작품을 꽤 여러 점 걸러내지 못했다는 것은 큰 문제이다. 위작으로 단정할 수는 없더라도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작품도 그에 합당한 설명을 달아주어야 하는데 그 점에서도 미비한 면이 많다. 



 
도록 속 민영익 <원정 민영익첩(園丁 閔泳翊帖)>

             

  
민영익의 초기와 후기의 글씨


먼저 눈에 띠는 작품은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의 서예 작품 <원정 민영익첩(園丁 閔泳翊帖)>이다. 이 작품은 이번 전시의 주제인 ‘근대 서예’라는 개념의 중심에 둘만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민영익이란 인물이 근대 개화기의 역동기를 몸소 체험한 주역 중의 한 명이기도 하고,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일본의 예술을 모두 체험한 근대미술의 중심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진품으로 보기에는 글씨의 필력이 민영익의 솜씨와는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민영익은 갑신정변 이후 개화파와의 대립으로 상해에 머물러 지내게 되는 데 이때 오창석(吳昌碩), 포화(蒲華) 등 상해화파 서화가들과 어울리며 그만의 독특한 필치를 만들어낸다. 그의 글씨는 먹을 넉넉히 쓰면서 붓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유연한 선을 만들어낸다. 또한 그의 부드러운 필획 속에는 넉넉함이 있으면서도 강단을 느끼게 하는 힘이 들어가 있다. 외유내강의 모습이 있는 필치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된 작품은 민영익 특유의 필치가 보이지 않는다. 오래 동안 수련을 쌓은 능수의 글씨가 아니라 오랜 학습을 쌓지 못한 이의 솜씨에서 벗어나지 못한 필치이다. 각 글자들의 결구나 글자간의 흐름이 능력 있는 솜씨를 지닌 서예가의 솜씨라 할 수 없다. 

필시 누군가 민영익의 글씨를 모방하여 쓴 것으로 보이며, 결코 그 수준과 격조가 민영익의 것이라 할 수 없다. 민영익은 이렇게 불편한 정도의 글씨를 쓰는 작가가 아니다. 또한 인장의 솜씨나 사용한 인주의 성질도 진품에 쓰인 것과 다르고, 종이에 배어 들어간 인장의 찍혀 있는 상태도 민영익 당대의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다.  

  
전시된 이정직 <경기완엽도>  석정 변해옥 <묵매도> 

        
전시는 되었으나 도록에 실리지 않는 작품 중에서도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 있는데,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이 그렸다는 세칭 ‘왕죽(王竹)’을 그린 <경기완엽도(勁技浣葉圖)>이다. 이 작품은 대나무를 그리는 방식도 이정직의 솜씨가 아니고, 글씨 또한 그의 것이 아니다. 

오로지 인장만이 ‘이정직’으로 되어 있어 수결 ‘석정’과 인장 ‘이정직’이 짝을 이루어 그의 작품임을 증언한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이정직 본래의 작품과는 너무 많은 차이를 보여 보는 이를 당황케 한다. 이정직은 동기창(董其昌)에 기반을 둔 단정한 행서를 주로 쓴다. 위아래로 날렵하면서도 우측에서 좌측으로 유연하게 흐르는 듯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의 대나무 그림도 단정한 글씨와 마찬가지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날렵한 가지와 칼처럼 스미는 듯한 잎을 그린다. 주로 세죽(細竹)을 그리며 두터운 왕죽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런데 <경기완엽도>는 이정직의 대나무 그림과 달리 오히려 대구 출신의 한의사 석정(石亭) 변해옥(卞海玉)의 작품과 너무 유사하여 의아한 마음이 들게 한다. 변해옥은 초년 이름을 변성규(卞成圭)라고도 했는데 그의 본명인 듯하다. 유명한 서양화가 변종하의 부친이기도 하다. 

그는 대구 지역 특유의 전통을 이은 문인화를 주로 그렸다. 대구는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 1862-1935)를 비조로 하여 중국 상해파의 영향을 받은 수묵화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농묵을 주로 하여 활달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작품을 주로 하였다. 이들은 교남서화회를 중심으로 경재(敬齋) 서상하(徐相夏, 1864-1949), 운강(雲岡) 배효원(裵孝源, 1898-1942), 죽농(竹儂) 서동균(徐東均, 1903-1978) 등을 이으며 맥을 이었다. 

변해옥은 이들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호방함을 내세우긴 했지만 거친 붓질과 유연하지 못한 글씨를 배치하여 그리 격조가 높지 못한 수묵화를 주로 그렸다. 그는 남긴 작품이 많아 대구 지역 뿐 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그의 작품을 많이 확인할 수 있다.


이정직 <묵죽도>


이렇게 혼란이 온 데에는 1980, 90년대의 미술계의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시 미술계는 동양화의 전성기라 할 정도로 매우 인기가 있었다. 사람들은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동양화를 거는 것을 고급 취미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당시 사군자를 좋아 했던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 하던 작품 중 경북 출신은 서병오, 서동균의 것이었고, 전북 출신의 작가는 이정직과 벽하(碧下) 조주승(趙周昇, 1854-1935)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항간에 유전하는 이들의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미술계의 관행상 수집가가 많이 찾는데 작품이 귀하면 항상 등장하는 것이 위작이었다. 

1980년대에는 유난히 많은 위작이 만들어졌다. 위작은 완전히 새로 만드는 것이 있고, 유사한 작품을 변조하는 두 가지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작품은 다른 작가의 작품을 변조하는 경우였다. 유사한 형식을 그리는 작가 중에 같은 호를 쓰는 이가 있으면 더욱 쉽게 가품이 만들어졌다. 
 
이정직의 경우는 마침 세상에 돌아다니는 작품 중에 ‘석정(石亭)’이라는 같은 호를 쓰는 사군자 작가가 있어 쉽게 만들어졌다. 더구나 이정직은 작품 속에 ‘석정’이라는 한자의 수결도 잘 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의 수결을 잘 기억하지 못하였다. 위작을 만드는 이들은 ‘석정’이라는 한자 수결만 있고 인장이 없는 작품에 ‘이정직’이란 인장을 찍어 가품을 만들기도 하고, 인장까지 남아 있는 경우는 ‘변해옥’이란 이름의 인장을 지우고 ‘이정직’의 이름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 이 작품도 혹 변해옥의 작품에 이정직의 인장을 찍은 위작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이하응 <낙지론서병(樂至論書屛)>


석파(石坡)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글씨만큼 논란이 많은 것도 드물다. 굴곡 많은 그의 인생만큼 독특한 형식미를 갖춘 그의 글씨는 찾는 이가 많아 많은 인기를 누렸다. 그가 한가히 붓으로 농필하던 야인에서 유력 정치인으로 변신하자 글씨를 쓰거나 난초를 칠 겨를이 많지 못했다. 

작품을 찾는 이들은 많고 작품을 이루지 못하자 시중에 가품이 나돌기도 하였다고 한다. 한편으로 그에게 작품을 구하는 이들에겐 자신의 글씨와 그림을 유사하게 하는 지인들을 시켜 대필을 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작품이 많은 탓인지 그의 작품들은 내용에 따라서 자주 진위 시비에 놓이곤 한다. 

이번에 전시된 <낙지론서병(樂至論書屛)>도 논란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다. 이하응의 다른 작품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의 글씨는 본래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주는 글씨는 아니지만 글자 획의 구성과 획의 살찌고 마르고, 윤기 있고 수척한 대조가 조화를 이룬다. 지나치게 강한듯하지만 격조를 잃지 않는 글씨이다. 


그에 비해 이 작품은 구성미도 초라하고, 글자 간의 조화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전체적으로 당대의 명사가 가져야할 품격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면은 상황에 따라 성격이 다른 작품이 나오는 것과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이하응의 시기별 작품과 대조가 필요한 작품이다. 


이건창 <악양루기(岳陽樓記)>


 


이건창 <유망미정(遊望美亭)>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악양루기(岳陽樓記)>는 앞의 작품들과는 또 다른 논란에 설 수 있는 것이다. 이건창의 작품으로는 보기 드물게 10폭이나 되는 대작이기에 진품으로 확인되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힐 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글씨 어디에도 이건창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 인장 또한 찍혀 있지 않다. 단지 마지막 부분에 ‘영재(甯齋)’라는 호가 적혀 있어 호의 한자가 일치하는 이건창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추정은 때로는 잘못된 결과를 낳는 것을 종종 확인하게 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글씨는 대부분 편지이고 편지에는 주로 “건창(建昌)‘이나 ’이건창(李建昌)‘이라 수결하고 있다. 호를 쓸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영재(寧齋)’라 쓴다. 

현재 그의 완전한 서예 대작 작품은 전하지 않는 것 같다. 그가 전문 서예가처럼 큰 글씨를 쓰며 활동했는지도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이 작품에 쓰린 호인 ‘영재(甯齋)’와 ‘영재(寧齋)’는 서로 통하는 글자이므로 이건창이 이러한 서예 작품을 하였다면 호를 다른 필체로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거만을 가지고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옳지 않다. 이렇게 사용한 다른 용례가 나오고 큰 글씨의 필체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같은 호를 가진 사람의 작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 ‘전 이건창(傳 李建昌)’으로 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전남 화순의 적벽에는 망미정(望美亭)이란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 이건창이 남긴 글씨의 서각이 전한다. 이건창은 서울에서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을 만나러 이곳까지 와서 ‘유망미정(遊望美亭)’이란 제목으로 선비다운 제시 한편을 남겼다. 그런데 이 현판에는 이건창이란 표식으로 호를 쓰고 있는데, ‘영재(甯齋)’로 쓰지 않고 ‘영재(寧齋)’를 사용하고 있다. 글씨 또한 병풍의 글씨와는 다르게 느껴지는 면이 있다. 현판의 글씨이고 정자에 제한 형식의 글씨이지만 병풍의 글씨와는 느낌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서예 작품으로 쓴 것과는 다를 수 있으므로 이에 대한 좀 더 치밀한 연구를 요한다. 

   
의문시 되는 김가진 <행서 칠언시> 김가진 <행서 칠언시>


36쪽에 있는 동농(東農)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의 <행서 칠언시> 또한 진품으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작품이다. 글씨의 흐름도 김가진의 필법과는 거리가 멀며 서명의 글씨 또한 김가진의 다른 작품에서 잘 보이지 않는 방식이다. 인장 또한 일제강점기 당대의 솜씨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작품은 근래에 일본에서 만들어져 들어온 위작의 전형적인 모습과 유사하다. 


김윤식, 김옥균, 김가진, 박기양의 글씨로 전해지는 작품


매우 불편해 보이는 이 작품이 의심 없이 진작으로 채택된 것은 2014년에 수원 박물관에서 열린 <갑신정변-새로운 세상을 꿈꾼 젊은 그들>이란 전시회에 김윤식, 김옥균, 김가진, 박기양이 한 폭에 차례로 글씨를 쓴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이 발견된 이후로 보인다. 

이 작품 속에는 김가진의 새로운 형태의 글씨의 형태가 있는데, 이를 새로운 작품의 발견으로 섣부른 판단을 내린 결과에 기인한 것이다. 네 사람이 차례로 썼다는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이 네 분의 글씨가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글씨와 매우 다른 필치를 보인다는 것이다. 

김윤식의 글씨는 단단하면서도 단속적인 필획을 구사하여 강인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 글씨는 그의 전형적인 필치에 비해 어리숙한 모습이며 수결도 그의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김옥균의 글씨는 일반적인 그의 글씨와 너무 달라 보는 이를 당황케 할 정도이며, 김가진의 글씨 또한 마치 술 마시고 장난이라도 하듯 좌우로 흔들어 재낀 붓질이 생경하다 못해 거북하기조차 하다. 박기양의 글씨 또한 단정한 그의 글씨를 보여주듯 얌전히 썼으나 그의 정형과는 역시 차이가 있다. 이 작품에 사용된 미숙한 솜씨의 인장들은 이러한 의심을 더욱 강하게 한다. 

이들은 당시 사대부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경제적 여유와 문화적 욕구를 잘 조화하며 살아온 인물들로 서예를 함에 있어서도 좋은 재료와 도구를 사용하였다. 서예에서 인장은 매우 중요시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에 쓰린 인장들은 당시 그들의 수준에 비해 솜씨도 떨어지고, 찍혀 있는 인장의 모습도 선명치 못한 것으로 보아 고급 인주를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평소 이들의 작품 속 모습과는 매우 다른 흔적이다. 당시 사회 구조로 보아서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여러 가지를 종합해 볼 때 이작품의 진위에 대해서도 한 번 쯤은 연구하는 마음으로 더듬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제가 가능하다면 이번 도록 속의 독특한 김가진의 글씨는 이 전의 합작 글씨 속의 작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근대기 서예 발전사를 공부하는 기틀을 잡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의문점 해결은 꼭 해야만 하는 필수불가결한 일일 것이다.

41쪽에 소개된 고균(古筠)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의 <행서 칠언시(行書 七言詩)>도 친절한 해설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3일천하를 뒤로 하고 일본으로 망명한 시대의 풍운아였다. 그의 행적은 당시 사람들에게 신화처럼 받아들여져 그의 글씨 또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였다. 그는 단정하면서도 강단이 있고 골기(骨氣) 있는 행서를 잘 썼다. 그는 ‘고균(古筠)’이라는 호를 주로 썼으며, 이 밖에 ‘고우(古愚)’, ‘해남목우자(海南牧牛子)’, ‘고균두타(古筠頭陀)’ 등 여러 가지 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김옥균 <행서 칠언시>

  
도록에 실린 <행서 칠언시>는 그동안 보지 못하던 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면에서 관심을 끄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고백(古柏)’이라는 호를 사용하고 있다. ‘고균’이나 ‘고우’외에 다른 호가 발견된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이를 공식화할 만큼 검증된 것인가에는 의문이 생긴다. 

더구나 ‘고균(古筠)’의 ‘균(筠)’자와 ‘고백(古柏)’의 ‘백(柏)’자가 흘려 썼을 경우에 유사성이 있어 더욱 의심의 눈을 갖게 한다. 더욱이 이 작품에 사용된 인장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그의 인장과 느낌이 달라 이러한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한다. 조금 더 자료 조사를 통한 검증과 이에 따른 설명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의 해설에는 김옥균을 “개화운동가로 활동하였으며, 서화에도 관심이 깊어 행초를 쓴 필적과 그림도 전한다.”라는 인물평을 하고 있는데, 이는 다른 자료에서는 잘 쓰지 않는 평가이다. 그동안 미술사에서는 김옥균을 평가할 때 서예를 잘했다고 하였지만, 그림을 그렸다고는 하지 않고 있었다. 당황스러운 설명에 과문한 필자는 이 말의 근원을 찾아보았다.    


김옥균의 작품으로 전하는 <수묵화 병풍>


김옥균의 그림이 전한다는 말이 나온 것은 2014년 수원박물관에서 진행된 <갑신정변-새로운 세상을 꿈꾼 젊은 그들>이라는 전시회에 김옥균의 그림이라고 전하는 6폭 병풍 2틀이 소개되면서부터이다. 
이 병풍은 김옥균이 일본에서 망명할 당시 후지모토가(藤本家)에 잠시 몸을 의지하였을 때에 거처 제공에 대한 사례로 집주인에게 그려준 것이라고 전하는 작품이다. 수묵을 주로 하여 그린 12폭은 각기 다른 다양한 화재(畵材)를 그린 것이다. 먹을 아껴 연하게 그렸으며, 자연스럽게 농담을 조절한 품격 있는 작품이다. 

비록 최고 수준의 화가의 솜씨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짧은 시간 수련을 해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수준의 작품이다. 더욱이 소재를 취택하는 사고나 화면을 구성하는 조형의식, 붓을 구사하는 방식 등을 보면 전형적인 일본화를 그리는 양식이다. 

과연 김옥균이 이러한 그림을 그렸을까 생각해 볼 일이다. 갑신정변을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한 김옥균이 일본에서 느닷없이 이런 형식의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옥균이 망명할 당시 막역하게 지내며 지원을 받았던 수나가 하지메(須永元, 1868-1942)의 수많은 기록에도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나가 하지메는 김옥균의 돕기 위해 그의 글씨를 받아 지인들에게 팔아 도움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그림을 배우거나 그렸다는 기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이 작품을 김옥균이 그린 작품으로 보는 것은 더욱 많은 검증을 요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 쓰인 화제 글씨는 더욱 이러한 생각을 강하게 한다. 본래 김옥균의 글씨는 강한 필력을 위주로 하는 필치인데, 이 작품의 화제로 쓰인 글씨는 힘을 빼고 가볍게 붓을 놀린 방식이다. 같은 사람의 글씨로 보기에는 서로 다른 면이 심하게 드러난다. 가장 눈에 두드러지게 많은 차이가 나는 곳은 수결 부분이다. ‘김옥균(金玉均)’ 이라 쓴 글씨가 다른 작품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필체이다. 

특히 ‘김(金)’자의 시작하는 부분이 유독 특징적으로 쓰여 있으며, 12폭 모두에 거의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김옥균의 다른 서예 작품 어디에도 같은 방식의 수결 방식은 보이지 않는다. 인장 또한 다른 작품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같은 방식으로 전승되었다는 같은 인장의 서예 작품 <채로환요봉래도(彩露環繞蓬萊島)>와 함께 세밀한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자료가 축적되어 정설로 굳어지면 다시 바로 잡기 어렵다는 것을 되새겨야 한다.      

  


이와 유사한 것이 석운(石雲) 박기양(朴箕陽, 1856-1932)이 오언시를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은 글씨와 인장도 문제 있어 보이려니와 작품을 구성한 방식은 보는 이를 의아하게 만든다. 동양의 서예 작품 구성 방식에 있어 종액의 작품을 구성할 때 먼저 시를 쓰고 이어 인장을 찍고, 후에 왼쪽에 호와 이름을 쓰는 경우는 별로 없다. 당대의 서화 명인 박기양이 이러한 격식에 어긋나는 작품을 했을지 의문이 간다. 

또한 <묵죽 쌍폭>의 경우도 대나무를 그린 필력이 박기양의 솜씨와 어울려 보이지 않고, 인장 또한 박기양이 잘 쓰지 않는 수준이 높지 않은 것이라 의문이 간다. 이러한 예는 박영효, 유길준, 김옥균, 서광범 등 개화기 인물들의 작품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인물들의 위작 글씨에 수도 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미래 후학을 위해서라도 아직 자료도 남아 있고 증언할 사람도 남아 있는 지금 정리해두어야 할 과제이다.


정학교 <설송당묵첩>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 1832-1914)의 첩 <설송당묵첩(雪松堂墨帖)>은 황정견(黃庭堅)의 대자, 우세남(虞世南)의 해서, 미불(米芾)의 행서, 성친왕(成親王)의 행초서 필의(筆意)를 따라 쓴 방작(倣作)을 모아 첩으로 만든 것이다. 

‘설송당묵첩’이라 쓴 제첨과 제첨 속의 인장은 일견 보아도 정학교의 것이 틀림없지만, 필첩 속의 임모한 글씨들은 필획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면이 보여 실물을 통해 내용 전체를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더욱이 마지막에 정학교가 썼다는 “운송실 눈 내린 창 아래에서 성친왕 필법을 방하다. 향수 정학교(仿成親王筆法于雲松室雪牕下 香壽 丁鶴喬)”라 쓴 부분에서는 ‘운송실’이라 당호를 써 표제의 ‘설송실’과 차이가 나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밖에 우석(友石) 황종하(黃宗河, 1887-1952)의 난초 그림은 글씨, 난초 그림, 인장 모두 따져보아야 할 연구 과제이다. 글씨는 일제 강점기에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필체이므로 유사하지만, 황종하의 난초 그림이라는 것이 거의 보이지 않는 화목(畵目)이기에 생경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작품에 쓰인 인장은 황종하의 다른 작품에는 쓰이지 않으며, 일제강점기에 ‘우석(友石)’이라는 같은 별호를 쓴 인물도 여럿 있다는 것도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61쪽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작품 <예서 오언육시>는 각 글자들의 결구가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글자들 간의 구성이 조화롭지 못하다. 예서와 행서의 대비도 어울리지 않고 예서의 글씨 크기와 행서의 글자 크기의 차이가 감상을 방해할 정도이다. 특히 윗부분의 시작되는 세 글자의 글씨들은 초보자의 솜씨처럼 불안한데, 그림뿐만 아니라 글씨도 전문 서예가 못지않아 장승업의 작품에 정학교와 함께 화제까지 썼던 안중식의 솜씨인지 의문시되는 면이 있다. 초년작인지 누군가 베낀 것인지 생각해 볼일이다.  

전시는 되지 않았지만 도록에 실린 중에서도 위작으로 의심되는 작품이 여럿 있다. 91쪽 영운(潁雲) 김용진(金容鎭, 1878-1968)의 초서 글씨는 그의 현전 작품에선 거의 보기 어려운 글씨이며, 이름 인장도 없어 그의 진작임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새롭다고 새로 내놓을 것이 아니라 좀 더 연구를 요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186쪽 동주(東洲) 심인섭(沈寅燮, 1875-1939)의 <하엽도(荷葉圖)>도 129×31.5cm라는 배율의 크기도 맞지 않고, 작품 속의 구성과 인장의 크기와 인장 솜씨도 잘 어울리지 않아 이런 부조화가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따져볼 일이다. 

마지막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연구자의 논고 내용에 담긴 문제점이다. 물론 작가나 작품에 대한 해석은 다분히 주관적이라 비판의 대상이 되기 어렵지만, 상식을 벗어난 해석은 지도적 입장에 있는 학자의 논고로서는 교육적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때론 수정을 위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전시회의 논고 중 이완우의 <우리나라 근대 서예와 사군자>는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작가들의 모습을 인물 사전 나열하듯 통사적으로 정리한 글이다. 그런데 자신의 주 전공인 서예 부분은 인물과 서풍(書風)의 통사적 정리에 별 무리가 없지만, 새로이 글쓰기를 시작한 듯한 사군자에 대한 평가는 기존의 연구 성과에 위배되는 부분이 많아 서로 짚어 보아야 할 부분이 여러 군데 있다. 어떤 부분은 그동안 과거의 연구 성과에 입각하여 미술사를 정립한 이들에게는 의아함에 앞서 놀라움을 주기도 한다.  


나수연의 글씨와 <석란도>


소봉(小蓬) 나수연(羅壽淵, 1861-1926)은 한성영어학교(漢城英語學校)를 졸업하고 남궁억(南宮檍) 등과 함께 <황성신문(皇城新聞)> 발간에 참여한 인물이다. 국권피탈 후에는 서화가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특히 난초를 잘 그렸다. 1918년 이완용 등을 고문으로 삼은 서화협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그는 신문 발간에 관여한 역사적 언론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서화가로서의 족적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예술인이기도 하다. 

그는 ‘나주 나씨’로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나혜석과 같은 집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혜석의 두 오빠인 나홍석(羅弘錫), 나경석(羅景錫, 1890-1959)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때 주고받은 편지의 필치는 당대 어느 명필 못지않은 뛰어난 필치를 보이고 있다. 또한 그는 대원군 이하응의 문하를 출입하였는데, 그의 빼어난 난초 그림은 ‘석파난’을 방불해 자주 그의 그림을 대필하였다고 한다. 

근래에 고서화를 수집하는 사람들은 나수연의 달필과 필력이 뛰어난 난초 그림을 좋아하여 소유하기를 원하는 이가 많았다. 그의 작품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다른 이들의 작품에 비해 가격이 높았다. 
그럼에도 그의 난초 그림과 빼어난 글씨의 필력을 의심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고서화에 정통했던 원로들도 나수연에 대한 평가는 대동소이했다. 그런데 논고의 필자는 그의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국권 침탈 뒤에는 서화가로 활약하여 1918년 서화협회가 결성되자 회원으로 참가했고 1921년부터 협전에 글씨와 문인화를 출품하였다. 석파란을 따르기는 했지만 난엽처리가 번잡하고 묵법이 강해 운치가 떨어지며 글씨도 여기적 수준이다.” 

당시 이하응의 문하에 출입하고 함께 작품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작품을 대필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서너 명 정도 알려져 있는데, 옥경산인(玉磬山人) 윤영기(尹永基), 소호 김응원, 소봉 나수연, 추당(秋堂) 박호병(朴好秉, 1978-1942) 정도가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 ‘여기적 수준’이란 개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어학 용어로서의 개념과 같은 개념으로 쓰였다면, 나수연의 필적과 관련해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가인 것으로 생각된다. 혹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백과사전의 인물 소개에 나오는 “그림은 조선 말기의 보편적 필법으로 주로 묵란(墨蘭)을 즐겨 그렸으나, 여기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설명을 옮겨온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송수면 <매화 대련>


사호(沙湖) 송수면(宋修勉, 1847-1916)은 전라남도 화순(和順)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동복(同福)에 은거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그림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나비그림을 잘 그려 ‘송나비’라는 별명이 붙었다. 시(詩)와 서(書)를 곁들인 사군자에도 능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하였다. 소치 허련의 뒤를 이어 호남 문인화의 수준을 한층 높였다.”는 평을 듣는다. 

물론 지역 작가에 대한 과한 평가를 한 면이 있긴 하지만 호남 지역의 한 시대를 대표할 만큼 다양한 갈래의 작품을 비교적 일정한 수준 이상 그린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논문 속에서의 평가는 지나치게 단호한 어조로 재단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근대 전라지역 서화가의 중심인물로 사호(沙湖) 송수면(宋修勉, 1847-1916)이란 선비화가가 있다. 그는 화순 출신으로 일찍이 진사에 등제하고 동복(同福)에 은거했다. 묵매와 묵죽을 즐기고 꽃과 나비 그림도 잘 그렸는데, 시골 선비의 여기 수준이다.

나수연의 평가에서와 마찬가지로 송수면도 시골 선비의 ‘여기 수준’이다. 서예도 그렇지만 사군자 또한 일정 수준에 오르기는 매우 어려운 형식의 그림이다. 난초나 대나무 한 종류를 그리기도 어렵고, 사군자를 모두 잘 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한다. 

그럼에도 송수면은 사군자는 물론 산수화도 잘하였고, 나비 그림도 잘하여 ‘송나비’라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송수면 이러한 재능은 조카인 염재(念齋) 송태회(宋泰會, 1872-1942)를 가르쳐 화가로 만들었고, 석전(石田) 이희순(李喜淳, 1893-1965)은 나비 그림을 배워 ‘이나비’라 불리게 되었다. 

이후 송수면은 호남 지역의 많은 후예들에게 영향을 끼쳐 많은 전라도 화가들을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도대체 어떤 기준에 두고 송수면을 ‘시골 선비의 여기 수준’이라는 평가를 하였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청나라의 세련되고 화려한 그림에 기준을 두고 평가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이러한 송수면에 대한 왜곡된 평가는 중국의 그림과 한국의 그림이 가지는 양식적 특징에서 오는 것일 뿐이며, ‘아마추어’라는 개념의 ‘여기화가’는 지나친 사대적 평가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오히려 허련 이후 조선만의 독특한 형식의 그림 형식이 정착화 되는 과정에 있는 매우 중요한 화가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된다.


변관식 외 5인 <송매국죽도>

 
변관식 외 5인 <송매국죽도(松梅菊竹圖)>는 필자의 설명대로 “계혜년 초여름에 설송(최규상)형과 함께 지팡이를 나란히 짚고 소정(변관식) 화백을 찾아 유당(김희순) 선생의 처소에 가니 심향(박승무) 화백이 마침 좌석에 있었다. 네 대가가 자리를 함께 하니 기이한 인연이다. 한 폭을 함께 만들어 성대한 일을 적는다. 정당이 짓고 설송이 쓰다.”라는 화제를 가지고 있는 사연 있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공교롭게 매화 그림 옆에 있어야 할 그린 이의 수결이 떨어져 나가 작가를 추정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데 논고의 필자는 화제의 내용상 매화 그림은 설송(雪松) 최규상(崔圭祥, 1891-1956)이 그렸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아마 4대가와 친밀했던 정당(靜堂)의 주선으로 유당(酉堂) 김희순(金熙舜, 1886-1968)이 괴석과 묵죽을 그리고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1899-1976)이 소나무를 그린 뒤 심향(心香) 박승무(朴勝武, 1893-1980)가 국화를 그리고 마지막에 어느 누구가 매화를 그린 듯하다. 종이 바탕이 일부 떨어져 매화를 그린 사람을 확인할 수 없지만, 낙관의 내용으로 보아 설송 최규상이 그린 듯하다.

아무래도 어색한 추론이다. 최규상은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 1875-1953)의 문하로 글씨와 전각을 잘할 뿐 그림을 그렸다는 흔적이 거의 없다. 그에 비해 관료였던 임병억은 효산(曉山) 이광렬(李光烈, 1885-1967)로부터 그림을 배워 화가로서 행세할 만큼 그림 재주를 보였다. 사군자뿐만 아니라 채색 화조에도 능하여 적지 않은 그림을 남겼다. 

더욱이 최규상과 임병억은 매우 가까워 임병억이 그림을 그리고 최규상이 화제를 쓴 합작품을 여럿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보면 이 작품의 매화 그림은 최규상이 아니라 임병억이 그린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태석 등 9인 <단계청상도(丹溪淸賞圖)>


이 글의 합작도에 대한 오류는 이뿐 아니다. 오류 중 절정은 김태석 등 9인이 그린 <단계청상도(丹溪淸賞圖)>이다. 이 작품은 김태석, 김경원, 이상범, 이한복, 이용우, 배렴, 노수현, 최우석, 김영기, 해원(?) 등 10인 합작한 작품이다. 김태석과 이한복이 화제를 쓰고 이 중 아홉 사람이 각기 한 가지 화목을 하나씩 그렸다. 그런데 논고의 뒤 부분에 있는 시각적 설명을 위한 도표에서는 배렴의 이름이 빠져 있고, 작가를 알 수 없었던 죽순을 그린 ‘해원(海園)’이란 이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으로 규명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작품이 1943년 5월에 그려졌다는 것이다. 김규진은 1933년에 세상을 떠나니 죽은 후 10년 후에 그렸거나 10년 전에 미리 그려 놓은 것이 된다. 더욱이 이한복 또한 1940년에 죽은 것으로 해 놓아 그 또한 죽은 3년 후에 그린 셈이 된다. 김규진의 경우는 이름을 잘못 독해해서 생긴 것이며, 이한복은 1944년에 죽은 생몰년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웃질 못할 오류이다.   

이상의 수많은 도록 오류와 위작의 발견은 전적으로 박물관의 사전 준비 미비에서 오는 결과이다. 크게 두 가지 면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생기는 피해가기 어려운 사필귀정이다.
우선 박물관의 전시 준비 기간과 인력 확보의 문제이다. 대개 한국 박물관 전시는 1년 전 이전에 계획이 세워진다지만 실질적으로 준비하는 기간은 6개월이 채 안 된다. 이 기간 동안 작품을 섭외하고 검증하는 작업을 한다. 이후 검증된 작품을 가지고 글을 준비하고 전시장 설계와 함께 도록을 제작한다. 

이러한 준비 기간으로서는 치밀한 준비는 불가능하다. 더욱이 작품의 진위 문제 같이 예민한 문제는 다양한 전문 인력을 꾸며 교차 검증을 해야 하는데, 박물관 사정을 핑계로 때론 전문적이지 못한 일부 기획자의 눈을 빌어 졸속으로 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속성 의식이 이러한 웃지 못 할 전시와 도록을 만드는 원인이 된다.

두 번째로 전문 인력의 부재를 탓하며 박물관의 필요에 의한 인물에 기대어 전시를 꾸려 간데서 온 문제점이다. 미술이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서화동원(書畵同源)’이라 하지만 글씨가 다르고 그림이 다르다. 글씨의 미감을 이해한다고 그림의 조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 상보적인 관계는 있으나 필수불가결한 것은 아니다. 

강세황(姜世晃)이나 김홍도(金弘道)는 서화 어느 한 쪽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이인문(李寅文)이나 장승업(張承業)은 그림은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지만 글씨에는 남들보다 낫지를 못했다. 미술품의 감정이란 것은 더욱 그렇다. 

많은 사람들은 고서화는 한문을 알면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착각을 한다. ‘감정’은 미술의 또 하나의 학문 분야이다. 감정에 관한 책을 읽고, 많은 전시회를 보고, 많은 도록을 본다고 해서 감정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도움이 되겠지만 구분이 쉽지 않은 위작을 구분을 해낼 정도의 감식안을 갖는다는 것은 이러한 공부로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위작을 구분해낼 감식안은 작가에 대한 이해와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심미안을 가진 이가 작품의 생산과 유통 과정을 충분히 이해할 정도의 안목이 갖추어질 때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선에서 수없이 긴장감을 유지하며 구분해내는 학습을 해온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다. 

‘감정’은 ‘또 다른 세계의 학문’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에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위작들이 걸러질 수 있을 것이다. 수원박물관이 사립미술관이 아닌 국가에서 운영하는 시립 미술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좀 더 치밀한 사전 검증이 이루어졌어야 할 것이다.(*) 
  

황정수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9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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