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조선 궁중화·민화 걸작-문자도·책거리
전시기간 : 2016.6.11.-8.28
전시장소 :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문자도-충, 신>(8폭 부분) 18세기 종이에 채색 각 72.0x43.0cm 개인
한쪽 끝은 추사 김정희이다. 추사는 말할 것도 없이 당대 최고 석학에 최고 서예가였다. 그의 글씨는 사대부라면 누구나 글자 하나 적힌 종이쪽지라도 서로 갖겠다고 다퉜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추사체를 흉내 내 쓰기조차 했다.
친구 권돈인의 글씨는 추사풍으로 유명하다. 제자 조희룡과 소치 허련은 추사체를 방불케 한다. 경상도 끝자락 거제도 출신의 하동주는 추사체 꼭 빼닮은 글씨를 써서 생계를 유지했다.
<문자도-효,제>(8폭 부분) 19세기 종이에 채색 각 51.5x29.0cm 이헌서예관
그 시절 추사체와는 정반대쪽에 있던 것이 민화이다. 민화는 말 그대로 출처불명이다. 치졸무쌍, 유치무비에 웃지 않고는 못배길 정도이다. 당연히 추사가 말끝마다 강조한 ‘문자향 서권기’와는 전혀 무관하다. 또 추사가 보고 배우라 한 원나라 사람(예찬, 황공망)의 필치는 근처도 가지 않았다.
그런데 대유행을 했다. 당시 한양 사는 한산거사는 광통교 아래 미술시장을 묘사하면서( 「한양가」) 그곳에 질펀한 민화의 세계가 있다고 했다. 백동자도, 요지연도, 곽분양행락도, 경직도, 십장생도 등 각양각색의 병풍이 팔리고 있다고 읊은 것이다.
<문자도-예, 의>(8폭 부분) 19세기 후반 종이에 채색 각 66.0x34.0cm 국립민속박물관
추사체와 민화의 공존은 조선 사회에 ‘계층적으로 서로 다른 취향의 나란히 존재했다’는 사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중인출신 문인 유재건은 양반집 사랑방에 책거리 병풍이 쳐있다고 한 이색적인 보고를 하고 있다.(『이향견문록』) 또 있다. 구한말 사진을 보면 대청마루에 문자도가 함께 찍혀 있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계층적 취향을 넘어 한 집안에서도 나란히 공존하고 있었다.
<문자도-염, 치>(8폭 부분) 종이에 채색 각54.0x35.0cm 동산방화랑
이런 민화의 세계이지만 근대미술사에서는 철저하게 제외됐다. 화가 중심, 실명(實名) 중심의 근대 미술사가 도입되면서 무명(無名), 일명(逸名)으로는 비빌 언덕이 없었다. 근래 들어 회화사에서는 더러 무명 화가의 세계에 대한 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서예 쪽에서는 여전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입만 열면 추사이지만 ‘문자도’ 속의 문자는 한 번도 문자로 여기지 않았다.
문자도가 책거리 그림과 나란히 서예박물관에 초대된 데는 의미가 깊다. 역사적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또 공존의 가치를 복권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실은 현대는 다양한 가치의 인정과 공존이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늦었지만 197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최초 열었던 민예 전시에 비길만한 거사라고 평할 만이다.
<책가도>(8폭 부분) 19세기 종이에 채색 각47.3x30.5cm 개인
이 전시는 내년에 뉴욕 스토니브룩대학교 찰스 B.왕 센터에서의 미국전시가 예정돼 있다고 한다. 한국인이 아닌 외부인의 눈으로 보면 조선 그림과 중국 그림은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 또 추사 글씨도 중국 조지겸(趙之謙), 이병수(伊秉綬)이 쓴 글씨라 해도 그만이다.
그런데 이들 눈에 단번에 조선만의 그림이라고 신기해하는 것이 민화의 세계이다. k 팝의 시대에 원근법을 무시한 채 프리미티브한 표현으로 가득 찬 100년, 150년 전 조선의 민화 세계를 뉴욕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볼지 자못 궁금해진다.(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