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박상미전
전시기간 : 2016.6.15.-6.28.
전시장소 : 서울 이화익갤러리
글 :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박상미는 일상 속에 자리한 화분, 식물에 주목했다. 꽃집이나 실내 공간, 복도나 담벼락에 놓인 다기한 화분들은 녹색의 잎과 다채로운 색상의 꽃들을 품고 있다. 어느 날 그것들이 눈에 띄었고 새롭게 다가온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저기 흩어진 시시한 화분들과 익숙한 식물들이 총체적으로 묘한 분위기를 만들며 자신을 사로잡은 것이다. 비로소 그 대상들과 작가의 교감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한갓 평범한 풍경과 사물이 느닷없이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다가오는 것을 체험하는 ‘이상한 일’이다. 이른바 접신이자 사물과의 교감이며 물활론적 상상력이 작동되는 시간이다. 그렇게 해서 사물은 주체가 되어 그것을 바라보는 이와 대등한 존재로 길항한다.
그러한 체험, 다시 말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감지하는 것을 그리는 일이 회화이기도 하다. 자신에게 주었던 인상, 경험, 기이한 만남의 기억, 그 아우라에 도달하려는 제스처 말이다. 따라서 모든 그림은 막막하고 애매한 것을 그리려는 허망한 시도일 수 있다. 단지 자신을 날카롭게 찔렀던 한 순간의 느낌, 감각, 분위기를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정 장소에 무심하게 놓인 화분(혹은 화원과 수족관, 정원 등)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장식과 인테리어의 목적으로 놓인 것들이자 조악한 인위성 속에서 불안하게 자연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놓인 것들이기도 하고 그로부터 벗어난 것들이기도 하다.
작가는 바로 그 이상하게 놓여진, 연출된 자연을 보았다. 본다는 것은, 응시하는 것은 생각이 많아진다는 말이고 그 생각은 결국 작가 개인이 간직한 모든 것들이 마구 뒤엉켜 개입하는 일이다. 그로인해 바라보는 사물의 피부에 달라붙어 만든 일종의 상처들이 종국에 형상화된다. 그림이 된다.
더없이 아름다운가 하면 다소 누추하고 눈물겨운 저 풍경이 말을 건넨다. 도심 속에서 누군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화분 등은 자연으로부터 분리되어 떨어져 나온 ‘의사자연’이자 모조된 자연물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여전히 삭막한 이 불임의 도회지 안에 가까스로 자연의 생명력을 안쓰럽게 간직하고 있는 절박한 신호와도 같다.
작가는 그 모습을 늘 보았고 오래 전부터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시선과 마음을 붙잡고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갑자기 ‘필’이 꽂힌 것이다. 그런 현상을 이른바 ‘아우라’라고도 말한다.
작가는 그 장면을 기록해두었다. 사진으로, 스케치로, 기억으로....그렇게 수집된 장면을 참조해서 풍경을 재구성했다.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된 그림이다. 모든 그림은 결국 한 개인의 감수성이나 감각의 틀 안에서 걸러 나온 또 다른 세계이다.
그것은 있는 세계를 참조했지만 그와는 다른 별도의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세계는 분명 실재하는 외계로부터 파생한 것이다. 미술은 늘 있는 것에 기생하고 그로부터 불거져 나온 흔적이다. 다시 말해 미술은 외부세계와 그 세계를 보고 느끼고 감지하는 한 개인의 육체가 만나서 이룬 ‘이상한 세계상’이다.
박상미의 그림은 장지 위에 먹과 채색이 공존하면서 수묵의 번짐과 납작하고 선명한, 추상적인 색 면의 질감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수묵으로는 전체적인 느낌, 다시 말해 특정 장면에 대한 모종의 감흥을 부려놓는 선에서 구사되고 그 사이에 농도와 채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채롭고 풍요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색상을 채워놓고 있다.
사진과 컴퓨터를 참조해 만들어진 이 화면은 부단히 사진적인 평면성과 디지털 픽셀이미지를 암시하는 한편 실크스크린 기법과 방법론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손으로 그려진 맛과 기계적인 공정의 느낌이 동시에 맴도는가 하면 납작한 평면성을 강조하는 색 면과 먹을 칠한 부위에 다시 오일 콘테로 수직선을 그어나가면서 만들어나간, 단색의 톤과 자글자글한 드로잉의 맛이 어우러진 부분이 낯선 분위기를 자아낸다. 미묘한 감각을 발산한다.
한편 먹 색 안에 은닉된 수직의 선 맛은 태양, 빛으로의 지향성을 지닌 식물의 속성과 의지를 함유하고 있으며 그것들을 보고 인식하는 작가의 몸 의식의 흐름을 운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반면 색으로 단호하게 칠해진 부분은 의도적인 강조, 방점이 놓인 부분이고 박제된 인공의 자연을 상징하는 동시에 손의 맛, 육체성을 의도적으로 휘발시킨다.
작가는 도시 공간 속에 기생하는, 도시화된 식물(자연)의 세계를 수묵과 채색의 이질적인 결합으로 구성하고 있다. 도시라는 공간에 억지로 편입시켜 놓은, 장식물에 불과한 식물/자연을 보여주려는 의도 아래 이루어진 연출이자 맹렬하고 꿋꿋하게 생존을 이어가는 식물의 생명력을 역설적으로 강조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인간은 사라지지만 식물은 영원히 순환하면서 성장할 것이다. 한편 일상에 자리한 온갖 종류의 식물들, 특히 작고 붉은 플라스틱 화분에 담긴 화분들이 빽빽이 진열대에 꽂혀있는 장면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 감시되고 관리되는 식물의 운명을 엿보게 한다. 그 장면은 은연중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존재도 반추하게 된다.
화원의 화분, 수족관의 풀이나 아파트단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이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자연 속의 식물들처럼 마음껏 자라지는 못하지만, 도시라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적응하여 살아가는 식물의 모습은 흡사 인간의 삶과 비슷하기도 하다.
도시 속에서 인간과 같이, 그 속에서 질긴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는 식물들은 인간의 관리와 감시 아래 갇혀있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적응하며 살고 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박상미의 그림에는 자연으로부터 도피한 현대가 어떻게 자연을 다시 삶으로 끌어들이고 있는지를 질문한다. 여기에는 도시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가련한 동경과 연민의 시선이 있다.
박상미의 그림은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포착한 이 식물/자연은 생생한 현실체험들을 직관해서 담담하게 채록한 결과물이다. 이는 또한 동시대의 문화적 시각 환경 속에서 자연 이미지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기도 하다.
도시생활을 하면서 자연을 가까이 하지 못해서 생기는, 자연을 가까이 하고 싶어 하는 그런 욕망들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그 욕망을 실현시켜주는 화원, 화분, 수족관, 정원 등은 사실 진짜와 가짜가 공존하는 공간이며 그 공간은 자연을 관리하는 권력의 보이지 않는 그물망을 보여준다.
따라서 박상미가 그린 식물, 자연은 도시의 주거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식물의 존재의미를 질문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작가의 작업은 여전히 동양화의 오랜 전통과 조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