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제목 : 이중섭, 100년의 신화
전시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기간 : 2016.06.03. - 2016.10.03.
30도가 넘는 온도에다가 바닥에서 반사된 햇빛으로 어른거리는 덕수궁 서관의 앞마당이 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기 위해 사람들로 붐빈다. 그들에게 위로가 되는 건 그곳에 선 이들 누구보다 나이가 많을 분수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보다 더 큰 기대감일 터인데, 교과서에서부터 봐오던 국민화가 이중섭 작품을 실물로 좌악 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리로 발길을 옮기게 한 것은 동영상 속 멋진 배우가 이 전시의 오디오 서비스를 위해 준비한 대본을 읽어 내려가다가 결국 눈물을 짓게 하고 만 이중섭의 편지와 그의 애절한 삶에 대한 연민일지도 모른다.
전시는 그의 출생과 교육에서부터 6.25전쟁으로 인한 피난과 가족과의 이별 후 화가로서 일군 작품들과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들과 끔찍한 고독과 가난을 이겨내기 위한 각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서울과 대구에서의 개인전 그리고 죽음과 기억들로 구성된,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른다. 이러한 전시구성이 가능한 것은 전시를 기획, 진행한 김인혜 학예사의 말처럼 기존의 연구성과의 반영이 선행되었기 때문일 것이며 따라서 그간 위작(僞作) 논의에 집중되었던 이중섭 작품을 이른바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장(場)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여 커다란 벽이나 건물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던 이중섭의 꿈을 비록 영상으로나마 실현시켜준 시원한 벽도 그렇고, 네모난 유리 장 안에 진열된 은지화들도 번쩍이는 귀금속으로 제작된 국보나 보물처럼 귀하게 보이게 하였다는 점에서 전시는 매우 신선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장치는 그저 후세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종의 애사(哀詞)와 같은 것이니, 이중섭의 작품은 그것이 아무리 작다 해도 하나 하나 빛나고 구성과 형태가 또렷하게 드러나 마음에 와 박히기 때문이다.
비슷한 형태와 색감에도 불구하고 또 크기가 제법 큰 것이 한 점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모두 이중섭을 못내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가 보여주는 서정성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그의 작품의 힘이 서정성에서만 발원하는 것이라면 또한 이중섭이 이리 기억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거침없는 선의 유희, 평면임에도 불구하고 울퉁불퉁 움직이는 배경과 거침없는 새로운 구성적 시도들, 동양화와 서양화, 그림과 시의 경계를 없앤 화면에서 미에 대한 열망과 탐닉은 누구에게나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리고 원초적인 모든 것들인 천진함과 순수 그리고 열정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정에 충실하고 속임이 없는 그 무구함이 작품 개개에 깃들어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다시 보고 싶었던 몇 작품을 조우하리라는 기대를 넘어서게 한 몇몇 장면들을 만났다. 1939년의 유학시절 그린 〈향도〉는 이중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처음으로 실견하게 된 작품이다. 일본인 화가 아라이 타츠호와 교환하여 가지고 있던 작품을 유족이 보관해오다가 처음으로 공개한 것이다. 젊은 이중섭의 붓질은 자신감 넘치며 자유롭고 물감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라는 하는 양 밀리고 쌓이고 스며든다. 잘생기고 스포츠도 만능인 데다가 마음까지 좋았던 이중섭의 유학생활은 행복했을 것이고, 그 자신감이 그림에서도 배어나온다.
<향도>, 1939, 종이에 유채, 개인
1945년 학교 선후배 사이로 사귀고 있던, 후에 그가 이남덕이라 이름한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는 한국으로 달려왔고 행복한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달을 덜 채우고 태어난 첫애가 결국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나자 관 뚜껑을 열어 어린아이들이 장난치는 모습을 도화지에 그려 실에 꿰어 아이 가슴에 달아주며 혼자 외롭지 말기를 기원한 애잔한 아비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어 얻은 두 아들과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그만 6.25전쟁이 발발하였고 갑작스런 피난으로 부산에 도착하여 다시 제주로 갔다가 부산으로 그리고 아내와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후 통영에서 그림을 그리는 등 이중섭의 사연은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 그리고 6.25전쟁의 소용돌이에서 고난의 세월을 보낸 근대기 여느 화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이중섭이라는 이름과 함께 떠오르는 천재성을 동반한 광기 그리고 불행한 생애 등은 사실 그의 짧은 생애 마지막 어느 순간의 일들이기도 하다.
<애들과 물고기와 게>, 1950년대, 종이에 유채, 개인
해외유학을 시킬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엄친아가 세상 모든 이의 눈물깨나 빼는 대상이 되고 만 것은 6.25전쟁의 무참함 때문이었다. 그 어려운 시기를 함께한 사람들 중 시인 구상(具常, 1919-2004)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중섭이 함께하였던 동시대인들을 다른 눈으로 보고 있을 지도 모른다. 고인이 된 김창실 선화랑 대표의 글에 따르면 〈이중섭상〉을 만들어 달라면서 당시 1억 원이 호가하는 20호짜리 이중섭의 그림을 내민 것도 이중섭의 첫아이 관 뚜껑을 함께 덮었고 무연고자로 처리되었던 이중섭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주었던 친구 중 하나인 시인 구상이었다. 대구에서 구상과 함께 지내던 시절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동촌유원지〉에는 중앙에 고개를 쳐든 이중섭 자신의 모습이 있지만 정작 사인인 ‘ㅈㅜㅇㅅㅓㅂ’이 쓰인 곳은 화면 좌측 하단에 위치하여 유유히 걸어가는 검정개의 몸통 위이다. 마치 개이름처럼 자신의 이름을 위치시킨 그의 자조적인 유머에 짠한 마음이 든다.
<동촌유원지>, 1950년대, 종이에 유채, 개인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안다”는 구절을 새삼 일깨우는 추사의 〈세한도〉처럼 때로는 어려움을 겪어야 사람들 면면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중섭의 수많은 지인들 속에서 그의 그림으로 장난치지 않고 그의 그림으로 치부하지 않은 구상의 우정이 새삼스럽다. 이중섭이 그린 〈구상가족〉은 그 어려운 시절 마음 가득히 친구 이중섭을 아꼈던 구상에 대한 이중섭의 마음이 드러나 있다. 화면 중앙에는 구상이 작은아들에게 자전거를 태워주고 있다. 애비인 구상의 얼굴 가득 미소가 흐르고 아이는 너무 좋아 상기된 얼굴이 태양처럼 붉어졌다. 그 왼쪽으로는 미소를 띤 채 부자(夫子)를 바라보는 그의 부인과 큰아들이 섰고 부인 옆에는 전쟁통에 구상에게 맡겨진 소설가 최태웅의 딸이 뒤돌아 서 있다. 화면 우측에는 툇마루에 걸터앉은 한복을 입은 이중섭이 오른손을 들어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정말 자전거가 멋지구나!” 자신의 아들들에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몇 번이고 약속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두 아들의 애비 이중섭은 그렇게 부러움 가득한 눈으로 화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장거리던 아이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대문을 밀고 나갈 때의 격한 마음의 요동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애비 이중섭의 덧없이 크고 가지런한 손가락으로 이루어진 빈 손을 보고 눈물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얼마나 아이에게 자전거를 태워주는 애비가 되고 싶었을까. 그래서 내게는 바로 이 〈구상가족〉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그림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때마다 이중섭의 부러움, 가족을 향한 절절함이 머리와 가슴을 치고 들어와 목소리를 떨게 하고 코끝이 붉어지는 일은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인 구상의 가족> 32x49.5cm, 종이에 연필 유채, 1955년, 개인
전시장을 헤매듯 이 전시실에서 저 전시실로 1층에서 2층으로 다시 1층으로 오가며 작품을 들여다보다가 왜관의 성베데딕토 수도원을 그린 〈왜관성당 부근〉을 들여다보았다. 독일 성 오틸리엔 수도원의 노베르트 베버 총아빠스가 다녀갔던 곳, 그가 다다랐던 지역인 원산이며 평안도 그리고 왜관에 대해 설명한 6밀리 필름이 눈앞에 떠오르며 인연(因緣)에 대해 생각한다. 연고란 그런 것이고 인간의 관계란 그런 것일 게다. 그래서 어쩌면 이중섭의 작품에서 기다랗게 서로를 이어주는 끈이 수없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카이브실에 커다랗게 인쇄된 흑백사진 속에 그가 앉아 있다. 정면을 향하여 예리한 눈빛을 내뿜는 사진 속 화가의 낡은 신발에 눈이 머문다. 그가 내게 묻는 것 같다. “내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왜 당신들이 읽고 있나요?”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54.11월경, 종이에 펜, 채색, 26.5 x 21.0, 국립현대미술관
한 예술가의 생애를 연구하고 작품을 분석하고 미술사적 위치를 가늠하기 전에 이미 신화가 되어버린 이중섭. 자신이 제정신임을 알리기 위해 그렸다는 자화상의 이중섭과 친구 한묵이 그린 이중섭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앞을 지그시 바라보는 이중섭이 그린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의연하기만 한데 한묵의 스케치북에서는 머리를 감싸쥐고 앉은 폭발적 감정을 주체못하는 누군가가 이중섭이라는 이름으로 앉아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과 가장 절친한 친구라고 말해지는 이가 표현해낸 이중섭. 두 이미지의 간극은 반백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극복해야 할 어떤 것이 되고 만 것 같다.
한묵, <이중섭 초상>, 1954
이 맑은 영혼의 존재는 천상 화가였다. 이중섭의 그림그리기에 대해 구상은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쉼 없는 창작의 욕구와 실행은 그와 동시대를 살아간 근대기 여느 화가에서도 볼 수 없는 엄청난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중섭을 근대기 다른 화가들과 구분짓는 가장 강력한 경계일 것이다.
“판잣집 골방,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여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노동을 하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 또는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충무, 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랑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