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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대를 살아낸다는 것의 의미-<시대의 선각자, 나혜석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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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기간 : 2016. 4. 28.- 8. 21.
전시장소 :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전 시 명 : 시대의 선각자, 나혜석을 만나다
글 : 조은정(미술평론가)

  120년 전에 수원에서 탄생한 한 아이는 총명하였고 그림도 잘 그려 성장한 후에 화가가 되었고 문재(文才)도 뛰어나 소설도 남겼다. 근대 문화계 천재로 손꼽혔을 이 인재는 누구나 안다. 하지만 화가라는 그의 작품 양식도 확언하기 어렵고 세상에 그의 작품이라고 알려진 것들도 명성에 비하면 경악스러울 정도로 적은 수이다. 그 인물의 이름은 나혜석이며 우리는 그를 “조선 남정네 심사는 이상하외다” 혹은 “이혼고백서” 등의 연상 단어로 소환한다.


  화사한 4월에 있었던 미술관에서의 전시 개막식을 나혜석이 보았다면 기꺼이 미소를 지어 보였을 것이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막내며느리와 손주들은 나혜석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역력했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장인 수원 사람들 또한 나혜석이 수원 사람임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부정한 여인이라 낙인 찍혀 끝없이 추락하였고 가족들에게 외면당하였으며 결국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 그녀는 남편 김우영과 사이에 난 첫 딸의 이름을 김나열이라 하였던 ‘여인’이었다. 남편의 성에 자신의 성과 이름자를 합한 것이라니, 얼마나 선구적인 안목을 지녔는지 굳이 확인할 필요조차 없게 한다.



  이 전시는 그러한 여성운동가로서의 면모, 화가로서의 면모 그리고 무엇보다 나혜석의 인간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였다. 집안 어느 구석에서, 하지만 소중히 보존되던 나혜석의 개인 앨범과 친필 편지를 펼쳐놓음으로써 근대기 한 자락을 찬란하게 비추었던 한 예술가의 실재 그 모습을 조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집안에 소장하고 있던 〈자화상〉, 〈김우영초상〉을 미술관에 기증함으로써 이루어진 전시인지라 ‘화해(和解)’나 ‘귀가(歸家)’ 같은 단어들을 연상하게도 된다. 여성에 대해 억압적인 사회에서 스캔들 속에서 살아간 이혼한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나혜석을 지운 과정을 지켜본 조카가 한자리에서 나혜석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 뚜렷이 존재하는 인간 나혜석은 가족들에게는 아물 수 없는 상처와도 같았을 것이다. 이 전시는 그 상처의 봉합이자 집안 내 나혜석의 완벽한 복권의 의식과도 같아 보였다. 그동안 나혜석에 대한 대규모 전시가 있어왔지만 이 전시에서는 최초로 만나본 적 없는 며느리의 손에서 그 오랜 세월 보존되어온 나혜석이 손수 사진을 꽂았던 그의 앨범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전시는 3개의 영역으로 구분되었다. 1부 〈혼돈의 시대 나혜석을 만나다〉는 나혜석 개인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공간이다. 나혜석의 앨범과 그 안에 꽂혀 있는 사진들은 학습과정과 가족관계와 그의 친구들을 보여준다. 또한 그동안의 나혜석에 대한 연구결과물들을 배치하여 나혜석이란 인물을 고찰하게 한다. 





  2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다〉는 화가로서 면모와 의식을 일깨우는 사회활동 그리고 독립운동가의 모습 등 나혜석의 활동을 보여준다. 근대기 계몽의식을 담은 신문과 잡지에 게재하였던 삽화를 통해 나혜석의 의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작은 인쇄물들을 깨끗하고도 크게 확대하여 보여주어 삽화의 의미뿐만 아니라 작가의 필치와 사인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나혜석의 유화작품으로 알려진 〈자화상〉과 〈김우영초상〉은 유족의 기증으로 미술관에 영구소장되어 명실공히 나혜석의 작품을 미술관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전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리움소장 〈화령전작약〉과 습작기의 작품으로 알려진 〈누드〉 등 자주 접할 수 없는 나혜석의 유화를 볼 수 있다.   


나혜석,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72x59cm, 1928 무렵


나혜석, 김우영의 초상, 캔버스에 유채, 63.5x55cm, 1928 무렵


  3부 〈자유를 위한 여정을 떠나다〉에서는 나혜석의 사회에 대한 “대담한 주장”과 활동을 볼 수 있다. 편지와 연하장,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아카이브 형식으로 전시하여 발표 당시 모습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활달하고 세련된 글씨체 속에서 그의 자기 수련을, 주의 주장에 예민하던 그 시대에 펼쳐낸 여성을 위한 다수한 발언들에서는 선각자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현존하는 작품이 많지 않고 그나마도 진위감정에서 자유롭지 않기에 나혜석 작품의 편년은 큰 의미가 없다. 첫 개인전에서 이십 여 점 이상 거래되었다고 하였고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였으니 그의 작품은 당대 부와 권력을 지닌 자 혹은 눈이 조금 높은 이들의 집에서는 술자리 자랑거리안주였을 것이다. 그 많던 “여류명사” 나혜석의 작품은 어디로 갔을까? 연구자들은 한군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인 수탈이나 전쟁에서의 파괴 이외에도 아마도 나혜석의 사회적 위상이 추락하던 그때에 ‘부정한 여자의 그림’이라며 멸실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의 작품이 평가받은 위치는 작품의 내용이 아니라 작가의 위치였던 셈이다. 하기야 아직 서양화가 신문물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던 때이니 그럴 수 있다.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 유명인의 신문물, 신학문의 힘으로 여성의 권위를 말하는 ‘새로운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새로움이 자신들이 설정한 영역을 벗어날 때는 ‘악(惡)’이 되었고 그 악의 주체가 생산한 작품은 수장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시장 안에서 만나는 그 규정된 악은 일제에 항거하였고, 지식인 여성의 고달픔 삶을 드러냈으며 여성도 몸과 마음 모두를 자신의 것으로 인지하고 주체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인간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 사회적 악으로 규정되었던 그 모습은 선각자 혹은 선구자로 추앙되고 있다. 물론 여성주의에 대한 연구가 포석을 깔아준 덕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작(眞作)조차 확인할 수 없는 그림들을 두고 어찌 그의 사상의 행위적 증거로 드러낼 수 있을까. 그래서 여전히 나혜석이란 한 인간은 화가의 모습을 한 시대의 사상가로 인지되는 것이다. 화가이자 미술비평가, 소설가, 교육자 등등의 많은 활동 중에서 그가 남긴 말은 세월이 흘러 그가 살았던 그 사회의 여성들에게 들어와 맘을 요동치게 한다. 누구 하나 이 사회의 구성원인 여성은 잠재적 악녀가 아닐 수 없음을 재삼 확인하는 것이다.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나혜석, 「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5. 2.)               
글/사진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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