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기간 : 2016.3.23-5.15
전시장소 : 도쿄국립박물관
글 : 윤철규
푸른 바탕에 흰 줄무늬 유카타(浴衣)를 입은 젊은 여인이 호숫가에 걸터앉아 있다. 한 손은 호숫가 바위를 짚고 다른 손에는 꽃무늬가 그려진 부채를 살짝 쥐었다. 이목구비가 분명한 인상 위에 목을 드러내고 곱게 쓸어 올려 말아 묶은 머리에서 단정함과 기품이 느껴진다.
<호반> 1897년 캔버스에 유채 69.0x84.7cm 도쿄국립박물관
여름철 호숫가 풍경을 있는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이 그림은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일본근대미술의 대표작이다. 아울러 햇빛에 비친 자연의 색채를 있는 그대로 직접 묘사하려는 외광파(外光派)를 일본에 소개한 구로다 세이키(黑田淸輝 1866- 1924)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자화상(베레모)> 1897년 나무판에 유채 36.0x25.3cm 구메(久米)미술관
그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열린 이 전시는 그에게 있어 햇빛에 비친 자연의 모습이란 무엇이며 또 외광 표현 이후 무엇을 더 그림 속에 담고자 했는가를 재조명하는 전시이다. 전시는 유학시대(1884-1893)에서 시작해 귀국후 새로운 미술운동으로 외광파 표현을 소개한 백마회(白馬會)시대(1893-1907)을 거쳐 일본에 아카데미즘을 정착시킨 문전, 제전(文展, 帝展)의 시대(1907-1924)로 짜여져 있다.
라파엘 코랑 <프로레알(花月)> 1886년 캔버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미술관
그는 18살 때 법률을 공부하러 프랑스로 건너갔다. 백부이자 양부는 이때 이미 자작(子爵)이었다. 풍족한 유학생활에서 그의 잠들어있던 그림 솜씨가 살아났고 주변에서는 화가의 길을 권했다. 마침내 그는 부친전상서에 ‘천성으로 좋아하는 바를 따라 그림을 그릴 결심을 했노라’ 알리고 프랑스 아카데미즘대가 라파엘 코랑(Rapael Collin 1850-1916)의 문하에 들어갔다.
<독서> 1891년 캔버스에 유채 98.2x78.8 도쿄국립박물관
양부가 그에게 ‘무엇이 되든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고 한 것처럼 그는 그림으로 전향하면서 ‘일본사람이 그린 서양화로 서양에서 인정받는 것은 물론 새로운 일본화를 창조해낼 것’을 다짐했다.
그레-쉬르-루왕의 농가 처녀를 모델로 한 <여인상(부엌)> 1892년 캔버스에 유채 179.6x114.3cm 도쿄예술대학
그리고 몇해 지나지 않아 살롱전에 낸 <독서>가 프랑스 화가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며 입선을 했다. 그는 코랑 문하 외에, 바르비종만큼 화가들의 야외제작 장소로 유명한 파리 교외 그레-쉬르-루왕(Grez-sur-Loing)에서 빛을 화면속에 그려내는 표현을 숙련했다.
<지·감정(知·感·情)> 1899년 캔버스에 유채 각 180.6x99.8cm 도쿄국립박물관
귀국 후에 새로운 그림을 선보이면서 일약 신파(新派)의 리더가 됐고 이는 외광파 그룹인 백마회(白馬會) 결성을 주도했다. 도쿄미술학교에 서양화과가 설립되면서 첫 번째 교수로 임명되었고 과의 운영을 전적으로 책임졌다. <호반>은 정식 교수임명 직전의 작품이고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은상을 받은 <지·감·정(知·感·情)>은 교수로 다망하던 시절의 작업이다.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를 계기로 현지에서 그린 <나체부인상>은 스승 코랑에게 배운 것처럼 여인의 누드를 통해 추상적 사상과 생각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일본은 전통이었다. 귀국후 이듬해 제6회 백마회에 출품했을 때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그림 하단에 천을 둘러 가려지기도 했다.
<나체부인상> 1901년 캔버스에 유채 116.1x89.3cm 세카이도(靜嘉堂)문고미술관
누드화 제작의 한계에서 그가 새로 추구한 것이 구상화(構想畵)였다. 생각이나 사상을 대화면 속에 녹여내는 것으로 이른바 프랑스 아카데미즘의 일본버전이었다. 또 그는 일본적 내용을 소재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대학교수, 제국미술원 원장, 각종 심사위원(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그리고 양부의 사후 자작 승계와 귀족원 의원 칙선에 따른 정치활동 등으로 만년 그림은 소품에 그친 것이 많다.
<무카시가타리(昔語) 밑그림> 1896년 캔버스에 유채 41.1x63.3 도쿄국립박물관
소개 작품은 구로다 기념관과 작품을 이관 받은 도쿄국립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일본내 각 미술관, 개인소장 등 200여점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에는 유학시절 배운 코랑의 작품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빌려왔다.
구로다는 1896년부터 작고 한 해전인 1923년까지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 교수로 재직한 때문에 그 시절 이곳에 유학한 한국의 초기 서양화가와 무관할 수 없다.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高羲東 1886-1965)는 1909년에서 1915년까지 도쿄미술학교에 유학했다. 『춘곡 고희동』을 쓴 미술평론가 조은정씨는 서양화과 책임자인 구로다는 이 시절 공사(公私) 다망했기 때문으로 실질적 교류는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아침 화장(朝妝)>(전쟁때 소실) 1893년 캔버스에 유채 178.5x98.0cm
두 번째 서양화가인 김관호(金觀鎬 1890-1959) 역시 조금 늦기는 하지만 1911년에서 1916년까지 이곳을 다녔다. 더욱이 그는 수석 졸업자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구로다에 관련된 미술에 관한 일화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고희동이 졸업할 때 김관호와 함께 구로다를 찾아갔던 일이 고희동의 술회와 구로다 일기에 보일 뿐이다.
물론 구로다는 첫 번째, 두 번째 한국인 서양화가를 직접 가르친 지도교수는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구로다가 구축한 일본 아카데미즘의 세례를 받았고 또 그가 펼쳐놓은 외광파의 영향 속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두사람 뿐만 아니다. 이후에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한 김찬영(1912-1917), 이종우(1918-1923), 이제창(1921-1926) 등도 구로다 재직시절 도쿄미술학교를 다녔다.(괄호 속은 재학년도)
그래서 구로다 탄생150주년 기념전은 19세기말 프랑스 유화의 일본 정착이란 점 외에 조선으로의 전파라는 점에서도 다분히 관심을 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