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돌아온 瓦塼 이우치 컬렉션
전시기간 : 2015.11.10-2016.7.16
전시장소 : 서울 유금와당박물관
글 : 윤철규(아트 라이터)
호고(好古) 취미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 찾아보면 『논어』에 벌써 이 말이 보인다. ‘나는 옛 것을 좋아해(好古) 민첩하게 익혔을 뿐’이라고 한 공자의 말씀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건보다는 옛 제도에 가깝다.
애호고물(愛好古物)적 의미는 북송에서 비롯됐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북송 마지막 황제 휘종은 대단한 호고 취미자였다. 그는 옛 것을 수없이 많이 모았다. 서화도 그렇지만 특히 청동기를 애호했다.
평양출토 귀면와
은나라에서 당에 이르는 청동기 8백여 점 이상 망라해 그림을 그려 넣은 31권짜리 대전집『선화박고도(宣和博古圖)』를 펴냈다. 이렇게 되면 호고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그 자체가 학문이고 연구인 것이다.
경주 보문사지 출토 가릉빈가문迦陵頻伽紋 수막새. 상상의 새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후세 문인, 사대부 사이의 호고 취미는 이쯤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호고 취미라 해도 귀한 서화, 서적, 청동기가 아니라 깨진 기왓장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호고 항목에 기와나 전돌이 더해진 것은 훨씬 뒤다. 청나라 고증학이 번성한 이후이다. 구한말 화가의 그림 가운데 자주 기와가 등장하는 것은 다분히 이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경주 흥륜사지 출토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리듯 그 옛날에 기와 모으는 일로 깨진 기와 값을 올린 사람이 있었다. 교토 출신의 염료도매상 이토 쇼베(伊藤庄兵衛 ?-1946)였다. 그는 기와 이전에 불상 컬렉터였다. 그 중에서도 둥근 금속판 위에 부처를 붙인 이른바 현불(懸佛) 수집 전문가였다.
기와와의 인연은 조부 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조부는 집 주변의 옛 사찰에서 나오는 기와 수집에 취미가 있었는데 이것이 전해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 조선을 다녀온 뒤로 조선 와당의 체계적 수집에 뛰어들었다. 낙랑출토 와당은 닥치는 대로 사 그 때문에 기와 값이 크게 뛰었다고도 했다.
평양출토 낙랑 전돌
이렇게 모은 기와가 1만수천점에 이르렀다. 1931년 교토박물관에 특별 초대돼 전시됐다. 이후 스스로 전시관을 만들어 전시하기도 했다. 대형와당 도록을 만들고자 했으나 이는 전쟁으로 무산되었다. 컬렉션 역시 1944년에 이마이즈미 도시아키(今泉利秋)씨에게 양도됐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진 채 교토 북쪽의 한 신사의 창고 속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컬렉션의 제2부 역시 대단한 호고 취미가에서 시작된다. 의사 이우치 이사오(井內功 1911-1992)는 젊어서부터 옛 기와를 수집했다. 그리고 환상의 컬렉션으로 불린 이토 컬렉션의 존재를 알면서 마침내 1964년 신사 창고에 수백 개의 상자 속에 잠들어 있던 것을 찾아내고 직접 인수한 것이다.
경주 사천왕사지출토 귀면와
그는 체계적 연구를 위해 이우치고문화연구실을 설립했다. 그리고 하나둘씩 명품 와당을 정리해 『조선와전도보(朝鮮瓦塼圖譜)』7권으로 펴냈다. 그런 다음 도록에 실린 와전의 절반인 1082점을 198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남은 절반을 관리하던 그의 아들은 2005년에 영구 보관처로 기와검사로 유명했던 유창종 유금와당박물관 관장에게 인도했다. 유 관장은 70년대 후반 검사시절부터 호고취미가 대단했다. 그가 틈틈이 수집한 기와 180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기도 했다.(2002년) 그리고 나서 이우치 컬렉션을 다시 조우하게 된 그는 그것을 인수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매료됐다. 그래서 그것을 인수하고 나아가 기와전문의 유금와당박물관을 세운 것이다.
통일신라 보상화문 전돌
이 전시는 이우치컬렉션 명품을 새삼 정리해 소개하는 기회이다. 바다를 건너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호고 취미는 염료도매상에서 의사로, 검사로 차례로 이어졌다. 그리고 애호심으로 인해 멀리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에서 낙랑을 더하고 고려, 조선의 기와까지 한 자리에서 남아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