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4월의 동행
전시기간 : 2016. 4. 16.-6. 26.
전시장소 : 경기도미술관
세월호 2주기인 4월 16일에 개막한 경기도미술관의 전시는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공공미술관이 경찰과 시민이 대치하는 상황을 연출하는 ‘세월호’를 주제로 전시를 기획한 점도 그러하지만 미술의 사회적 기능에 대해 정면으로 발언을 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역사박물관 등 공공미술관과 박물관에서 〈한불수교130주년 기념전시〉가 넘쳐나는 요즈음이기에 경기도미술관의 지역미술관으로서의 행보에 관심이 간다. 또한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기념하는 미술’과 확연히 구별되는 ‘기억하는 미술’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음도 눈여겨볼 일이다.
슬픔과 분노를 예술로 승화하기. 개막식에서 세월호 유족은 예술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미술관에서 말한 것이 무엇인지 이제 알겠다고 했다. 대한민국 누구나 알고 있는 사건, 우리 모두의 상처로 각인된 그 사건은 슬픔과 회환, 그리고 분노로 범벅이 된 채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이 의제화 하였다. 그 엄청난 역사적 소용돌이에서 미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동의 분노와 공포를 날카롭게 직시하면서도 슬픔과 상처를 따뜻하게 보듬어내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사유는 세월호 참사 이후 예술이 무엇을 담아내고 표현할 것인지, 어떻게 모순된 사회와 함께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는 미술관의 기획의 글은 사회 공동의 트라우마에 대한 미술의 성찰을 드러낸다.
참여작가들은 세월호에서 숨을 거둔 단원고 아이들의 방을 사진으로 기록한 〈아이들의 방〉과 같이 그동안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세월호를 생각하는 사진가들’과 하늘나라에서 반짝이고 있을 304개의 별을 보여주어 사망자 304라는 숫자를 기억하게 한 조숙진, 아름다운 산수화가 결코 아름답지 않은 풍경과 슬픔의 공간임을 보여주는 붉은 산수를 그려온 이세현 등 개인과 단체 22개 팀으로 구성되었다.
참여작가들은 세월호에서 숨을 거둔 단원고 아이들의 방을 사진으로 기록한 〈아이들의 방〉과 같이 그동안 세월호를 기억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한 ‘세월호를 생각하는 사진가들’과 하늘나라에서 반짝이고 있을 304개의 별을 보여주어 사망자 304라는 숫자를 기억하게 한 조숙진, 아름다운 산수화가 결코 아름답지 않은 풍경과 슬픔의 공간임을 보여주는 붉은 산수를 그려온 이세현 등 개인과 단체 22개 팀으로 구성되었다.
미술관 앞에서 오므려졌다 퍼졌다 하고 있던 최정화의 검정 연꽃은 개막 이튿날의 강풍으로 그 육중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이탈하고 말았다. 하지만 로비에 놓인 멋진 검정색의 로봇이 일어서려다가 다시 눕고 마는 모습, 반짝이는 반사판에 놓인 반짝이는 왕관들이 올라가다가 다시 내려오고 마는 모습을 보며 어떤 사건 그리고 그에 따른 좌절감을 떠올리지 못할 관객은 없다. 권용주의 미술관 내부 비스듬한 벽체와 불완전한 의자들, 노충현의 비인간적인 공간의 풍경들 앞에서 기울어가는 세월호의 선체를 느끼며 안전하지 못한 사회적 구조를 느낀다.
팽목항으로 달려간 작가들은 그 비현실적인 공간의 경험, 부재와 무기력함을 전시실에 재현하였다. 팽목항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향한 이들의 뒷모습을 그린 박은태의 〈기다리는 사람들〉, 푸른 바다와 흰 텐트, 유가족군상 그리고 ‘거리에 내몰린 유각족’을 그린 서용선, 팽목항의 무심한 바다를 영상으로 보여주는 전수현의 〈대화〉, 팽목항에서 수집한 사소한 물건들을 랩으로 감싸 기념물을 만들고 제단화처럼 3장의 드로잉과 함께 설치한 홍순명의 작업 등이 거기에 속한다.
홍순명, 사소한 기념비, 2015, 캔버스에 유채, 혼합재료, 210x460cm, 210x167cm, 210x285cm, 가변크기
박은태, 기다리는 사람들, 2015, 캔버스에 아크릴, 187x454cm
빈 공간에 팔을 둘러 아이를 안고 싶어하는 아버지, 그의 뒤에서 아버지를 안아주는 딸을 판화로 나타낸 이윤엽의 〈다시 안고 싶다〉, 물이 닿으면 녹는 종이에 〈둘이서 보았던 눈〉이라는 하이쿠를 써 넣어 이제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는 감정을 드러낸 장민승, 속절 없이 다시 피어난 봄날의 개나리, 목련 그리고 벚꽃 등이 너무 찬란해서 잔인한 사월을 보여준 전명은 등은 〈모뉴멘트 제로〉의 김상돈과 함께 ‘부재를 드러내는 실재’를 보여준다.
미디어에 노출된 세월호와 관련된 무작위의 이미지를 통해 이미지의 정치에 대한 논리적 파악을 보여준 강신대, 뭉크의 〈절규〉가 붙어 있는 창 아래 벽에 쓰인 낙서를 보여준 강홍구, 공간을 이분하는 물대포를 통해 역으로 가뭄을 말하는 노순택 그리고 304명의 지원자들이 가운데 손가락에 봉선화 물을 들인 채 기도하는 손을 보여준 조소희의 〈봉선화 기도〉에서 무능한 대처와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사회적 발언으로서 분노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조소희 <봉선화기도304> 2016, 설치, 가변크기
박재동 화백이 그린 아직 세월호에 남아 있는 4명의 아이들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다. 안규철은 2년이 지난 지금쯤 그 아이들이 읽을 수도 있는 책을 그들에게 읽어주었다. 애도라고 하기에는 기도와 같은 이 모든 상황에서 전진경의 울다 잠든 엄마의 얼굴에서 머리카락을 떼 주는 손, 투명한 존재와의 키스를 애써 외면하다가는 왁자지껄하게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최호철의 〈이루지 못한 귀향〉 앞에 섰다. 화면 귀퉁이에 그려진 아이를 안아주는 엄마의 모습이 비친 액자틀 앞에서 참았던 눈물이 뜨겁게 솟구쳤다. 그 아이들이 수학여행에서 돌아왔으면 대학의 새내기가 되었을 것이고 어설픈 화장을 한 사회 초년생일 것이다. 금전적 후원의 방식을 통해 대학을 직업학교로 전락시키고 그러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한 구조조정의 첫 대상이 미술 분야임에 분노하며 애도의 꽃을 교정에 놓았을 지도 모를 그들을 눈물의 막 너머에서 본다. 그래서 플라톤이 “우리는 잘 통치되고 있는 도시에 그-화가나 상상력이 풍부한 시인-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올바르다. 왜냐하면 그는 영혼의 이 부분-감정적인 부분-을 자극하고 강화시킬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이성적인 부분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은 옳다. 화가나 시인은 이렇게 우리를 통곡의 방으로 초대하고 그리고 울게 하여 슬픔을 넘어선 장소에 옮겨놓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