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백남준, 서울에서
기 간: 2016. 1. 28 – 4. 3
장 소: 갤러리현대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것이 2006년 1월. 올해 10주기를 맞게 되었다. 미디어아트의 조상격인, 그보다 더 유명한 한국 예술가는 찾아보기 힘들만큼 영향력과 유명세가 있는 작가의 10주기인데 비해 추모 전시는 조용한 분위기이다. 백남준아트센터 외에는 서울의 갤러리현대 정도가 그와의 돈독한 인연을 보여주듯 <백남준, 서울에서> 전을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백남준이 1980년에서 1990년대에 작업했던 작품들이 주로 선보인다. 그의 비디오 조각을 대표할 만한 <존 케이지>(1990), <샬롯 무어만>(1990)과 더불어 2000년 구겐하임 미술관에서의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The Worlds of Nam June Paik》에서 선보였던 <로봇 가족: 할아버지>(1986), <로봇 가족: 할머니>(1986), 1988년 첫 한국 개인전에 나왔던 <선덕여왕> 등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로봇 가족: 할아버지/1986 로봇 가족: 할머니/1986
샬롯 무어만 / 1990
샬롯 무어만(1933-1991)은 아방가르드 첼리스트로, 존 케이지 등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고 1964년부터 백남준의 공연 파트너로서 10여 년 간 플럭서스 공연을 이어갔다. 1967년 샬롯 무어만이 백남준과 반나체로 공연을 감행하다 경찰에 연행되는 일도 있었다. 이 작품은 그와 운명적인 만남을 형상화 하듯, 티비 모니터 얼굴에는 미소띤 모습을 그려넣고, 측면에는 '운명의 바람'이라는 글도 적혀 있다.
전자기기는 그에게 있어 콜라주처럼 캔버스를 대체할 매체로 여겨졌고, 그는 생활과 예술의 표현방식에서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을 투영하는 작품을 다양한 방식으로 구상하고 만들어낸다. 계급적인 불평등, 전쟁과 평화, 자본과 성, 선불교와 동양철학, 동서양의 융합 등 다양한 관심사를 녹여냈다.
독일에 유학 가 있던 백남준이 처음 전자기기를 이용해 실험적인 음악을 시작한 것은 1958년 무렵이다. 당시 독일에는 전위적인 현대음악이 유행하고 있었다. 그가 존 케이지를 만나고 플럭서스와 함께 공연을 하며 퍼포먼스 중심의 예술을 진행하다가, 1962년 텔레비전을 이용한 실험적 작품을 시작하고, 이어서 초기 포터블 카메라를 이용해 비디오아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백남준 작품의 뿌리는 플럭서스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와 관계되어 가장 주목되는 작품은 신관에서 따로 재연 전시되고 있는 <늑대 걸음으로>(1990)이다. 이 작품은 1986년 세상을 떠난 백남준의 예술적 동지였던 요셉 보이스를 추모하며 1990년 갤러리현대 뒷마당에서 행한 굿 형식의 퍼포먼스다. 함께 한국에서 굿판을 벌이자는 약속을 대신하여 백남준 스스로 무당이 되고, 요셉 보이스를 대신하여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독일 농부 모자와 비슷한 중절모들을 배치하고 그와 함께 했던 퍼포먼스에서 쓰인 오브제인 피아노를 제단처럼 설치한 굿판을 벌인 것이다. 1985년 요셉보이스와 백남준의 일본 공연에서 보이스는 흑판 위에 눈 위를 달리는 늑대 그림을 그리고 “Muse” 같은 신호를 적었으며 피아노를 연주하는 백남준 옆에서 늑대의 신음소리를 냈었다. 1960년대 초반 플럭서스를 함께 했던 두 사람에게 형식이 해체된 굿은 매우 적절한 해프닝에 가까웠을 것이다.
한국에서 백남준이라는 예술가는, 방임해서 키운 자식이 사법고시에 패스하고 집에 돌아온 격이다. 한국의 예술계와 백남준은 사실 같은 궤도를 달린 적이 없다. 미국과 일본을 오가는 그의 예술적 행보는 국내에는 외신 보도를 통해 간간히 알려졌고,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전위음악가로, 이후에는 텔레비전을 일부러 고장나게 해서 어지럽게 만드는 전위미술가로 소개됐다. 백남준의 한국 내 첫 전시는 1984년 서울에도 위성생중계되었던 <굿모닝 미스터오웰> 이후가 되어야 가능해진다. 1984년 판화전(원화랑)이후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 <다다익선> 작품을 들여놓고 같은 해 첫 국내 개인전을 열었다.
이미 지구상에는 비디오와 움직이는 시각 미디어를 이용한 예술로 넘쳐난다. 물리학 실험실 속 기계를 예술로 끌어오며 비디오로 추상과 구상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그는 지구상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조국이 해 준것이 없더라도 자랑스러워 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지금 그의 작품에 쓰여진 브라운관 티브이 오실로스코프를 찬찬히 뜯어보니, 그 재료들은 이미 역사 속의 것이 되었다. 재료가 실제로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박물관 속 옛것이고, 1980년대 "저게 도대체 뭔 예술인지" 하던 느낌이 아니라 스타일이 확고한 장르의 첫 모습, 클래식한 작품의 느낌이 되어 버렸다.
테크놀러지, 전자 기술에 대해 무한히 낙관적 태도를 견지했던 백남준이 인공지능이 인간들의 삶의 영역을 넘보는 현재의 상황을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상상력을 장착한 기술의 가능성을 예술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 그의 작품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메시지를 미처 다 해독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이조차 벅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