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변월룡(Пен Варлен) 1916~1990
기 간: 2016.03.03 - 2016.05.08
장 소: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3월의 덕수궁, 프러시안블루를 주조로 하여 푸른색이 자유자재로 펼쳐진 현수막이 햇살을 받아 빛난다. “Пен Варлен” 변월룡은 그렇게 뺀 봐를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생각한 조국에 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눈부신 깃발 아래서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떠올리게 된 것은 변월룡이 우리 앞에 그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의 이 모든 상황이 스크린 속 만화영화처럼 한 편의 이야기 구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2004년, 우편으로 배달된 한 권의 책을 펼치기 이전까지는 입을 꼭 다물고 내붙은 숨마저 얼어 목도리에 주렁주렁 매달리는 러시아의 겨울 한복판에 있을지 몰랐다. 또한 그 옛날의 영화를 여전히 간직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살을 에는 강바람에 몸서리치며 레핀대학 도서관의 작은 상자들을 뒤지고 있을지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문영대 선생이 고단한 작업을 했을 것이 분명한 『러시아 한인화가 변월룡과 북한에서 온 편지』는 6.25전쟁 때 북으로 간 화가들의 일상과 그들의 고뇌를 고스란히 전해주었고, 내게는 북한이 전쟁중에도 레핀대학으로 유학생들 보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은 분단 직후 남과 북의 달라진 미술 양식의 진원지를 찾는 연구의 시작을 열어주었다.
책에는 고달픈 생활의 피로를 숨기지 못한 채 창작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한 김용준, 배운성, 문학수 등이 정성껏 눌러쓰고 조탁한 언어로 정중함 그 자체를 담은 편지들이 펼쳐져 있었다. 또 그 책에는 낯선 이름의 변월룡이라는 화가가 애정 가득한 시선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화가들을 동료라는 이름으로 스케치하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태어난 그가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의 산천을 화포에 담은 사진들이 차곡차곡 실려 있었다. 단순한 밑그림에서부터 판화와 유화에 이르기까지 변월룡의 손길은 자유자재였으며 그가 그림으로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변월룡이 알려진 때로부터 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가 열린 것이다. 물론 전북도립미술관의 《한국의 초상미술, 기억을 넘어서》에서 〈최승희 스케치〉를 비롯하여 〈미술사학자 한상진〉, 〈조류학자 원홍구〉, 〈어부 한슈라〉와 동판화로 제작한 〈북한 어부〉 같은 작품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드물게 미술관 벽에 걸리는 일이 있긴 했었다. 고맙게도 문영대 선생이 작품을 출품하여 준 것이었고, 필자는 호기롭게 최승희 스케치 옆에 최승희가 부른 〈이태리정원〉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화면을 설치했었다. 여러 전시실로 이루어진 넓은 미술관에서 그 작은 귀퉁이를 필자는 아주 좋아했다.
사회주의 노동영웅 어부 A.S.한슈라의 초상, 1969, 200x115cm, 캔버스에 유채
하지만 변월룡이 그린 엄청나게 많은 양의 작품을 다 확인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 참을 수 없는 갈증이었다. 일개 연구자의 감정이 그러했으니 변월룡이 생전에 방문하지 못했던 그의 또 하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의 전시를 애타게 기다리던 유족과 그들을 설득하여 전시를 주선한 문영대 선생의 조바심은 오죽했으랴 싶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전시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학예사들이 얼마나 여러 번 기획서를 올리고 논의하고 결정하는 과정이 반복되었을지 상상해보니, 최근의 전시 중에서 이렇듯 시간으로 공을 들인 경우도 없을 것 같다.
1916년 연해주에서 태어난 고려인이 러시아 최고의 미술대학인 레핀대학 교수를 지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변월룡이 얼마나 대단한 기량을 갖춘 화가였는지는 의심할 바 없다. 전통적인 리얼리즘에서부터 자유로운 붓질이 화려한 풍경과 동판화에 이르기까지 그는 많은 양의 작품을 남겼다. 199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지병으로 사망하기 전인 1985년 그는 35년 동안 몸담은 레핀대학을 사직하였다. 눈에 초점이 없고 약간의 치매기가 있는 대학교수를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 러시아에서 종신직인 교수직을 그렇게 떠난 것은 러시아에서는 드문 일일 것이다. 이는 아마도 변월룡에게 계속 저학년의 기초수업만 주던 교내에서 고려인에 대한 차별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변월룡 스스로 좋은 교수로서 남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의 인품에 또한 마음 한 곳이 지긋해진다.
냉전이 종식되기 이전에 활동을 하였던 변월룡의 작품은 분명 러시아 리얼리즘의 영역 안에 있다. 하지만 항상 자신이 한국인임을 잊지 않았던 그였기에 작품세계 또한 다양한 층위에서 고찰될 수 있다. 어쨌든 그 시간들을 젖히고 우리 앞에 펼쳐진 변월룡의 작품은 전체 4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보여진다. ‘1. 레닌그라드 파노라마, 2. 영혼을 담은 초상, 3.평양 기행, 4.디아스포라의 풍경’이 그것이다.
프로파간다적인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은 전형성의 구조를 보여준다. ‘레닌그라드 파노라마’와 ‘디아스포라의 풍경’은 사회주의국가에서 봉사하는 예술의 모습,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국이 건재하다는 생각을 가진 지식인인 이방인이 자신의 생활공간과 이상향으로서의 조국을 그려내는 방식이 상통하고 있다. 반면, 그의 초상화들은 좀더 내밀한 내부세계와 외부계의 접점을 보여준다. 사회주의 이념을 드러내는 군중들의 모습에서와 달리 실내에 위치하고 그의 앞에 선 인물들은, 작가의 대상에 대한 인식에서 재조정되어 자신을 드러낸다. 그는 강렬한 의상의 색으로 대상을 인상지우고 소품으로 직업을, 그리고 얼굴표정을 통하여 성격을 드러낸다. 서재에서 집필중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섬광이 번쩍이는 두 눈과 하얀 종이에 포커스를 두어 이 세계적인 작가의 지성을 보여준다. 그는 아카데미의 동료교수들이나 친구들 혹은 학생들을 모델로 한 초상은 대상에 대한 관찰과 순간의 포착이라는 시점을 보여준다.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초상, 1947, 70x144cm, 캔버스에 유채
같은 초상화이지만 평양에서 만난 초상화들은 깊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대상이 좋아하는 일에 대한 세밀한 묘사에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더 깊이 들여다보아서일 수도 있지만. 예를 들자면 이렇다. 유명한 조류학자이자 원병오 박사의 아버지로 근대기 한국의 조류학을 연 〈조류학자 원홍구〉는 나무에 앉은 딱따구리 박제를 살피는 모습이다. 올리브그린색 상의를 입고 가슴에는 훈장을 달고 있지만 그의 안경 너머 시선은 쓸쓸하기만 하다. 〈미술사학자 한상진〉은 오른손에 연필을 들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어서 사색적인 이념가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다. 둥근 안경을 낀 〈김용준〉은 성혜림이 회고록 『등나무집』에서 1960년대 북한에서 국 끓여 먹으려고 눈씻고 찾아봐도 보기 어려울 정도의 세련미를 갖추고 있었다던 묘사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검정 상의에 흰 셔츠, 짙은 색 넥타이 그리고 황금색 스카프를 걸친 그의 가슴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마치 붉은 장미라도 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손에 든 그림은 감정을 위한 것이든 감상을 위한 것이든 그림을 그리고 싶다던 그의 욕망을 감지케 한다. 그 아련한 눈빛은 변월룡이 얼마나 그를 잘 간파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생각에 잠긴 〈민촌 이기영〉, 허허로운 미소를 짓는 〈한설야〉 그리고 파이프를 문 배운성 스케치 등을 통해 우리는 북을 향해 떠났던 그들의 고뇌를 마주한다.
근원 김용준 초상(Portrait of the art historianKim Yongjoon),1953, 51x70.5cm, 캔버스에 유채
무엇보다 이 전시를 통해 눈여겨볼 것은 아카이브이다. 변월룡에게 보낸 북의 화가들의 편지, 변월룡의 북한 미술계 시찰 보고서 등 1950년대의 북한 미술계를 둘러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이 소개되고 있다. 다양한 인물들의 사진자료와 그들의 기록은 6.25전쟁 이후 화가들에 대한 정보를 보다 다양하게 축적할 수 있게 했다. 근대 이후 우리에게 잊혀져가던 그들의 이름과 작품세계를 다시 불러내 상기시키는 것은 변월룡을 한없이 존경하고 따랐던 화가들의 순수에 대한 그의 답변인 성도 싶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강의 신은 이렇게 말했다. “한 번 만난 건 잊지 못하는 거다.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 뿐이지.” 센이 그랬던 것처럼 뺀 봐를렌이었던 변월룡은 그 다른 세상에서 할아버지대에서부터 기억된 돌아가고 싶은 조국을 꿈꾸며 살았다. 그가 이세상을 떠나고 26년이 흘렀고 전시에 대한 소문이 돈 때로부터 12년인 2016년 봄, 덕수궁에서 그의 현란한 붓질의 향연에 넋을 놓는다. 그의 화구통을 조그맣고 투명한 아크릴 박스 안에 가두지 말고 좀더 열어놓았더라면 좋았을 걸 하면서 말이다. 아마도 그 사소한 것이 맘에 걸리는 것은 화가의 손, 그 땀이 배어 있는 파레트가 든 화구박스가 조국에 돌아갈 날을 기원하며 서성이던 디아스포라 변월룡의 DNA를 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자화상, 1963, 75x60cm, 캔버스에 유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