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세한도, 추사의 또 다른 자화상
기 간: 2015.11.21.-2016.2.28.
장 소: 서귀포시 제주추사관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 준 <세한도(歲寒圖)>는 그의 제주 유배 생활 후반을 리는 작품이다. 이 시기는 그의 서예와 회화에서 가장 큰 변화가 시작되는 때이다. 일반적으로 한 화가의 대표 작품이 주로 생애 말년에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한도>가 그의 대표작이라고 말하기에는 시기상으로 약간 이른 감이 있다. 그럼에도 <세한도>는 김정희가 서거하기 한두 해 전에 그렸을 <불이선란(不二禪蘭)>과 함께 그를 대표하는 회화가 되었다. 이유는 무엇보다 그림의 제작 동기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상적은 유배 중인 스승에게 북경에서 간행된 새로운 서적을 보내주었고 북경의 학술과 예술 동향을 알려 주며, 변함없는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김정희는 그런 제자의 마음에 대한 자신의 고마움을 전하고자 1844년 여름경에 <세한도>를 그리고 이를 한번 감상하라는 글을 썼다. 그림의 옆에 있는 글에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글귀를 들어 계절과 상관없이 한 결 같이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에 이상적을 비유하였다.
조선시대에 스승은 존경의 대상이자 준엄함 그 자체였을 테인데, 스승이 제자에게 이런 마음을 글로 나타냈다는 것은 제자의 입장에서 볼 때 최고의 찬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제작 동기만으로 <세한도>에 지금과 같은 명성이 부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림에는 사제 간의 굳건한 믿음을 상징적이고 함축적으로 구현하였기에 가능했다.
김정희는 자신의 처지를 나타내고자 아무런 배경을 넣지 않았다. 그래서 그림 속 풍경은 더욱 황량하고 소슬해 보이는데, 이는 당시 제주의 척박한 환경이나 그의 정치적인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더군다나 투시도법을 사용하지 않아 마치 웅크린 듯 어색해 보이는 가옥은 세찬 정치 풍파 속에서 권력과 영화가 신기루처럼 날아가 버리고, 이제는 남쪽 끝자락 섬에서 힘든 삶을 지탱하고 있는 늙은 선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노송(老松)과 곧게 뻗은 소나무, 그리고 반대편의 잣나무 두 그루가 집을 감싸고 있다. 결국 그림의 구성은 추운 세월을 견디고 있는 힘없고 초췌한 스승과 이를 돌보려는 제자의 모습을 연상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세한도>는 이상적에게 전해졌다. 그는 스승의 그림과 글을 받아 보고는 스승의 마음에 감복하여 그림을 앞에 두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윽고 그는 작품을 북경에 가져가 청(淸) 문사17명의 글을 받기에 이르렀다. <세한도>를 감상한 문사 중에 소주(蘇州)의 명문 가문 출신인 반희보(潘希甫)는 “한 폭의 운림(雲林)의 필치, 만리 뱃길 따라 건너왔네”라고 읊었다.
운림은 재산을 청산한 뒤 이곳저곳을 유람하고 은둔 생활을 하였던 원나라 예찬(倪瓚, 1301~1374)의 호이다. 그는 산수화를 마른 붓으로 먹을 찍어 종이를 쓸 듯이 그렸기에 굉장히 거친 필치를 보여주며 이는 황량하고 소슬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더구나 먹 아끼기를 금처럼 하였기에(惜墨如金) 그의 회화는 결벽에 가까운 미감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작품에 인물을 그려 넣지 않았는데, 그래서 더욱 적막감이 흐를 정도이다.
이후 예찬은 동아시아 화가들이 지향하는 문인화가가 되었고, 이런 식의 화풍을 두고 흔히‘ 예찬풍(倪瓚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반희보가 <세한도>를 그렇게 읊었던 이유는 예찬풍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김정희는 짙은 먹을 종종 사용하여 서예적인 필선을 사용하였으니 청 문사들의 마음을 더욱 붙잡았을 것이다.
<세한도>를 유명하게 만든 또 다른 사건은 17명에 달하는 청 문사의 제발이다. 이 중에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한도>에 붙여져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 이들은 하나같이 추사 김정희에 대한 안타까움과 스승과 제자가 서로에 대해 갖는 굳건한 믿음을 칭송하였다. 청 문사들의 제발은 <세한도>에 바로 붙여지거나 혹은 후대에 붙여지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런 많은 제발은 역대 명작에서나 볼 수 있기에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기에 충분했다. 이로써 <세한도>는 조선과 청 문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작품이 되어 갔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한도>에는 또 하나의 사연이 만들어 졌는데, 이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그림에 걸맞은 명사들이었다. <세한도>는 어느 시기에 이상적의 품을 떠나 그의 제자였던 김병선(金秉善)과 그의 아들인 김준학(金準學, 1859~?)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이후에는 민씨 집안의 수장이 되었다는 일설이 전한다. 그 후 어찌된 일인지 김정희 연구의 첫 장을 연 일본학자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 수장품이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3~1981)은 후지츠카를 끈질기게 설득하였고, 결국 일본인 학자는 이에 감복하여 <세한도>를 내주게 된다. 몇 년 뒤 일본의 후지츠카 집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되었으니, 손재형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세한도>는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세한도>의 입수과정을 독립과 민족계몽에 앞장을 섰던 오세창(吳世昌, 1864~1953) 등에게 알리자 이들은 경탄하며 <세한도>에 글을 추가하였다. 이런 명작의 이동이라는 극적인 사연은 <세한도>에 신화와 같은 줄거리를 얹혀 주어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문인화로 만들어주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세상의 명작은 작품성만으로도 얽힌 사연만으로도 되지 않는다. <세한도>는 명작이 되기에 충분한 두 가지를 갖춘 작품이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동참한 자들은 당연히 김정희와 이상적을 먼저 꼽아야 하며, 17인의 청 학자와 최소 4인의 개항기조선 문사, 그리고 1인의 일본 학자가 있다. 나아가 오늘날 세한도 앞에 선 우리들도 동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