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강진 사당리 고려청자
전시기간 : 2015.12.22.-2016.2.21
전시장소 :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사에는 의외의 오해가 더러 감춰져 있다. 고려의 문화와 예술을 대표하는 고려청자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고려청자는 고려의 수준 높은 도자 기술을 말해주며 조선 백자와 나란히 한국의 대표하는 문화재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 가치가 부활한 것은 심하게 말해 반세기 남짓에 불과하다.
무슨 얘기냐고 할지 모르지만 조선시대 5백 년 동안은 ‘고려 청자’라는 말조차 없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가 백자인 까닭도 있겠지만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푸른 비색(秘色)의 청자는 조선에 들어 진즉에 맥이 끊겼기 때문이다. 쓰는 사람이 없을 뿐 더러 본 사람도 없었다. 18세기 후반에 몇몇 문인들 사이에 골동 붐이 일었을 때 무너진 고려 무덤에서 나온 청색 사금파리에 대한 기록이 일부 남아있는 것이 전부라 할 수 있다.
‘고려청자’라 말이 생긴 것은 아쉽게도 구한말 조선 땅을 밟은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섬나라 일본은 바다 건너 대륙에서 전해지는 문화에 대해 본능적으로 뿌리 깊은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다. 14세기 극히 일부의 청자 다완이 일본에 전래됐으나 조선에 들어서 이는 당연히 끊겼다. 그러던 것이 구한말의 침략과 식민지 합병으로 인해 청자의 붐이 일면서 ‘고라이 세지(高麗靑磁)’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붐이라고 해서 고려 무덤을 파헤치는 노략, 약탈에 가까운 것이었다. 1930년대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인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 다쿠미(巧) 형제에 의해 조선의 백자는 물론 청자의 도요지에 대한 최초의 조사가 이뤄졌다. 이때 전국 수백 곳의 도요지가 확인됐다. 하지만 이는 지표상의 확인에 그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1964년 강진군 사당리에 사는 한 촌노가 집 마당에서 나왔다는 청자 사금파리를 가지고 찾아온 것이 20세기 후반 들어 고려청자의 운명적 부활의 시작이 됐다. 사당리의 가마터는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오랜 기간 운영되며 조금씩 자리를 옮겨 오늘날로 보자면 축구장 수십 개 넓이의 산기슭에 펼쳐져 있었다고 전한다.
그중 한 군데에서 1964년에 시작된 발굴은 1977년까지 지속적으로 이뤄지며 조선시대 내낸 잠들어 있었던 고려청자 이야기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무엇보다 사당리 발굴에서의 하이라이트는 고려사에 나오는 ‘청자로 지붕을 이었다’는 기록을 뒷받침해줄 청자 숫막새와 암기와가 다량으로 나온 것이다. 이로서 고려의 수준 높은 문화가 실재했던 역사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또 이로서 고려청자는 명실상부하게 오늘날 한국 문화재의 1, 2위를 대표하는 유산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됐다.
이 사당리의 발굴은 그후 10년 넘게 이뤄지며 10만점 이상의 주요한 파편이 수습됐다. 이들 가운데는 사당리가 말 그대로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걸작의 산실(産室)임을 말해주는 것들이 다수 들어있다. 예를 들어 깨진 참외 모양의 병은 고려인종 무덤에서 출토된 국보 94호인 참외모양 병이 이곳에서 만들어졌음을 말해주는 자료였다.
그렇기는 해도 이 전시는 결국 깨진 사금파리 전시이다. 걸작을 빚어낸 고향의 과거 실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도자기 애호가라면 볼만하다. 역사에는 이면이 있는 법. 국립중앙박물관은 고려청자를 재조명하는 의미에서 이런 작업을 몇 년 전부터 시도해왔다. 그런 점에서 이 전시는 2011년에 열린 부안 유천리 청자 도요지 소개전에 이은 두 번째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