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2015 뤄양박물관 문물교류전 - 백제 정림사와 북위 영녕사
전시기간 : 2015.11.24.-2016.1.24.
전시장소 : 국립부여박물관
한반도를 지리적 배경으로 하는 한국은 크게 보아 중화 문화권에 속한다. 따라서 문화 역시 대륙의 중심에서 전래되어와 토착화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게 된다. 그런데 이를 조금 삐뚤게 보면 소위 말하는 중심과 변방의 종속관계라는 불편한 인식에 가 닿게 된다. 미술사나 고고학 연구의 초기 단계가 이런 불편한 인식의 확인이라면 심화 단계는 그 극복 논리와 실증적 자료를 제시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백제의 수도 사비성(현 부여)에 세워진 정림사(定林寺)와 남북조 시대 황하 일대를 장악한 선비족의 나라인 북위(北魏)의 수도 낙양을 대표하는 영녕사(永寧寺)의 출토 유물을 비교 소개한 이 전시는 불편함의 인식에서 극복에로의 발전을 실증적으로 제시해준 사례라 할 수 있다.
정림사지 현재 모습(부여군 제공)
일제 때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정림사지는 그 이전까지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다만 절터 한 가운데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이 자신의 공적을 새겨 놓아 평제탑(平濟塔)으로 전하는 탑이 있는 절터로만 알려져 왔다. 이 절터는 해방 이후에도 단속적인 조사가 이뤄졌는데 1983년에 있는 추가 조사에서 절터 남서쪽에 있는 폐(廢)기와 구덩이에서 200점 넘는, 부숴진 소조상(塑造像) 조각들이 발견됐다. 이때만 해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근래 중국과의 문화교류 및 학술자료 교환이 이뤄지면서 북위의 수도 낙양을 대표하는 사찰 영녕사 출토 유물과 유사한 점이 발견된 것이다.
영녕사 목탑과 소조상이 안치된 불감의 위치
낙양 영녕사는 불심이 깊었던 북위 왕실이 조성한 거대 사찰로 그곳에는 당초에 높이 일백 장(一百丈)이나 되는 9층 목탑이 서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탑 내부에는 불상을 모셔놓은 것 외에 예불 행렬과 같은 장면을 흙으로 빚어 만들어 장대하게 장식했다고 전한다. 실제 발굴조사에서는 흙으로 빚어 만든 작은 인물상-문인, 무관, 비천, 공양인- 등이 1,560여점이나 출토됐다. 이 가운데 몇몇 점이 바다 건너 부여의 수도 사비성의 정림사에서 나온 것과 흡사하다는 것이 이 전시의 출발점이다.
영녕사지 출토의 농관을 쓴 인물 소조상 (높이 8.0cm)
중앙에서의 주변부로의 전파를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자료는 농관(籠冠)을 쓴 인물상이다. 농관은 한나라 이후에 남녀가 모두 쓰던 대나무로 관으로 이 농관을 쓴 여인상이 영녕사와 정림사에서 나란히 나온 것이다. 동그스름한 얼굴에 단정한 표정은 소조상제작 인스피레이션이 바다를 건너 부여에까지 전해졌음을 한눈에 짐작케 한다.
정림사지 출토의 농관을 쓴 인물 소조상(높이 6.6cm)
그런데 여기서 그쳐버리면 어딘가 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듯한 느낌만으로 멈추고 말았을 것이다. 부여시대 백제는 비록 고구려에 밀려 천도했지만 내실을 다지며 권토중래를 꿈꾸고 있었다. 그만큼 사회는 역동적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착실한 백제화(百濟化), 즉 토착화가 이뤄진 듯하다. 전시에서 그 흔적으로 인근의 부소산사(扶蘇山寺)지나 익산 제석사지 출토의 백제화된 소조상을 보여준다.
(상,하) 부여 부소산지출토 소조상과 익산 제석사지 출토 조소상
여기까지가 전부가 아니다. 그후 백제화된 소상 기법은 신라와 고구려에 전해졌고 또 바다 건너 멀리 일본에까지 전해졌다. 일본 나라의 가와라데라(川原寺) 절 출토의 소조상은 그 뿌리가 한반도의 백제에 있음을 말해준다.
나라 가와라데라 절 출토 유물들
종속을 넘어선 극복 사례를 작은 남짓한 소조상을 통해 확인한 다음 다시 보아야할 것이 있다. 박물관 본관에 있는 부여 능산리 출토의 백제금동대향로이다. ‘중국제 수입인가’ 아니면 ‘백제화된 향로인가’는 하는 문제는 이 전시 감상자라면 다분히 다른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
(사진은 『백제 정림사와 북위 영녕사』에서 재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