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김환기의 선線 · 면面 · 점㸃》
전시기간 : 2015. 12. 4 – 2016. 1. 10.
전시장소 : 현대화랑
1975년 1월에 한국을 방문한 조셉 러브는 “경복궁의 돌을 보면 적당히 깔린 것 같지만 철저한 계산, 논리에서 나온 것이다. 在美 화가였던 고 김환기 씨는 경복궁의 돌을 깐 것 같은 계산에서 우수한 작품을 제작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하였다(『동아일보』 1975. 1. 8.). 흥미로운 사실은 조셉 러브가 앙데팡당전을 둘러보고 이 전시를 언급하기 위하여 전 해에 사망한 김환기를 소환하고 있는 점이다. 그는 한국의 현대작가들의 작품이 ‘원색이 없는 무색(無色)’이었다면서 ‘한국은 대지와 무의식적으로 밀착되어 있고 아직 의식에 눈뜨지 않았다’는 전제 아래 고궁에서는 휘황찬란한 빛이었는데 현대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빛깔이 없어서 옛것과 현대의 갭을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묻고 있다.
화면에 점점이 박힌 불규칙하고도 견고한 형태를 전통의 공간인 경복궁 그리고 자연의 상징인 돌을 이용하여 비유한 것이다. 타자적 시선에서 생성된 관점이지만 ‘경복궁의 바닥돌’로 구정한 김환기의 작은 면으로 구성된 형태에 대한 해석은 실은 1971년 로렌스 캠벨이 『아트뉴스』에 “환기의 최근 대작들은 조그만 빛깔의 단위로 구성되어 네모난 돌들의 띠처럼 캔버스를 덮고 있다”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캠벨이 지시한 ‘네모난 돌들’은 모자이크를 만드는 동방의 타일을 떠올리게 한다. 반짝이며 작고 견고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화면은 견고하며 빛나는 수공(手工)의 세계이다. 그 요소들이 뉴욕에 떨어진 별처럼 김환기를 여느 작가들과 구분하는 시금석이자 작품의 특성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캔버스에 유화, 232x172cm
이번 전시는 김환기의 별처럼 빛나는 작은 돌조각 같은 형태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에 떨어진 것은 아니었음을 한눈에 보여준다. 뉴욕이라는 공간에서 제작한 작품 몇 점만으로도 우리는 그의 작품이 어떻게 세상과 조우하며 의미를 펼쳐내는지 알 수 있다. 이 미묘한 감각의 의미를 죠셉 러브는 무의식이라 지칭한 지도 모르겠다.
전시는 한국 미술계의 지도자급이었던 김환기가 상파울로비엔날에 스스로 출품작가가 되어 떠난 브라질에서부터 미국으로 가 눌러앉은 시점부터 사망하기까지의 화면을 펼쳐내고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해 조그마한 정보라도 지닌 사람은 누구든 그의 마음, 그의 의식을 따라 그림을 이해해갈 수 있다. 그러고 보니 그 무의식이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단위의 집단무의식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화면에 스민 수많은 색과 붓질 사이에서 그의 슬픔과 희망 그리고 구도자적 자세를 발견하는 것은 그의 화면 앞에 선 이들에게는 결코 힘든 일이 아니다.
벽에 걸린 작품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964년 작이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제작한 작품들은 Echo, <메아리>라는 명제를 지니고 있다. 선과 점, 반복되는 형태가 일련의 흐름을 지어내는 화면은 끝없이 펼쳐진 눈밭에서 다른 세상의 연인에게 인사를 전하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잘 지내고 있나요? 난 잘 지내고 있어요.” 영화보다 훨씬 먼저 제작된 그림 앞에서 영화의 한 장면을 상기하는 것은 절대로 대상에게 닿을 수 없는 언어의 울림, 그 진동이 화면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김환기 작품은 그렇게 시처럼 함축적인 말걸기에서 시작된다. 김환기의 ‘말걸기’는 한숨이 들어가고 감탄사가 내뱉어진 변주되고 외쳐대는, 대화를 갈구하는 일종의 메아리이다. 산이 대답하기를 기대하며 외치는 ‘야호’처럼 무의미하지만 내적 갈증을 담은 외침 앞에서 외로웠던 화가 김환기를 본다.
<메아리 Echo> 1964, 캔버스에 유화, 84x169cm
본격적인 추상임을 알리는 <작품work>(1965)이라는 명제 앞에서는 그 색점 위에 놓인 제스처를 발견한다. 지그재그로 교차하고 쌓이는 제스처는 단파(短波)처럼 작용하여 화면 전체를 울린다. 질질 흘러내리고 스며들고 교차하여 상호침범하는 하단과의 색면의 경계에서 경험하는 호흡의 압박을 마대에 문질러댄 붓자국이 선명한 <무제untitled v-66>에서도 경험한다. 답답한 현실에서 포효하는 호랑이처럼 작가의 신체성이 이처럼 극명히 각인되는 화면도 드물 것이다.
<작품 Work> 1965, 캔버스에 유화, 208x156cm
<무제 Untiltled V-66> 1966, 캔버스에 유화, 177.5x126cm
스며듦, 압축, 긴장과 분절의 공간을 지나 1970년의 작품에 이르러 우리는 그의 화면 가득 촘촘히 박힌 작은 돌조각처럼 견고하고 빛나는, 불규칙하지만 네모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가득한 화면을 만난다. 천 위에 박힌 형태들이 빛나는 것은 형태와 배경, 색과 색 사이의 느슨함 때문이다. 이 무한히 확장된 경계가 화면을 빛나게 하고 구조적으로 보이게 한다. 틈, 그 느슨한 틈의 일렁임으로 김환기는 별을 창조하고 땅을 일군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그렇게 창조된 김환기의 영토이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좋은 작품의 힘을 발견하곤 하는데 연전의 국립중앙박물관의 청자들 사이에서 김환기의 이 작품을 조우했을 때가 그러했다. 청색의 향연들 속에서 그의 화면은 깊었고 그 깊이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에서 빛나고 있었다.
<10만개의 점> 1973, 캔버스에 유화, 263 x 205 cm
<10만개의 점>(1973)은 그의 50년대 작품들에서 보인 산의 능선과 호수의 물결 그리고 새와 매화나뭇가지의 추상적 버전이다. 서양의 재료로 동양을, 서양화로 한국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수많은 시도와 일탈을 감내하던 김환기가 이룬 쾌거는 무한한 노동력의 집성이러는 점에서 1974년의 일련의 검정그림으로 넘어가는 것이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그것은 노쇠하여 가는 자신의 신체를 감지한 인간이 동물적 감각으로 느끼는 죽음의 모습이자, 여우도 죽을 때가 되면 동쪽으로 고개를 돌린다는 옛어른의 말씀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시점에 선 작가가 조우한 고국, 고향의 모습이다.
검은 파묵(破墨)들은 이제 더 이상 별이 아니다. 그것은 나무가 되고 집이 되고 길이 되고 그리고 해체되어 바탕이 되고 과수원 울타리가 된다. 그 어딘지 모를 공간에서 길은 너무나 뚜렷하게 빛난다. 그려지지 않아 둥글게 빈 곳은 길과 길이 만난 광장, 기가 뭉쳐 빛나는 ‘응집의 허(虛)’ 그 세상 최초의 카오스, 무궁한 빔, 허(虛)의 실체임을 알게 된다. 그렇게 점을 찍고 선을 그어 세상을 창조한 한 장인이 있었음을 기억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