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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상력의 연금술사, 권옥연의 미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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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정(한국근현대미술사)

전시명 : <권옥연 회고전>
장 소 :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기 간 : 2015.12.11(금)~2016.01.24(일)

차분한 청회색의 풍부한 질감과 신비한 형태들. 권옥연의 회화하면 금새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그의 그림은 인간의 의식 저 아래서 피어 오르는 꿈의 세계 같기도 하고, 애타게 염원하는 그리움의 풍경 같기도 하다. 사물의 낮고 미세한 흔들림과 그로 인해 번져가는 몽환적 상상이 펼쳐지는 세계이다. 그래서 권옥연의 격조 높은 회화는 인간의 감정 가장 근원적인 부분에 와 닿는다. 


권옥연의 몽환적 상상의 세계는 1950년대 화업의 초기부터 2011년 영면하기까지 끊임없이 변주되었다. 화면 가득한 슬프고 여린 감성은 사실 권옥연이 커다란 체구의 북방 출신 미술가라는 사실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함경남도 함흥 남문리의 유서 깊은 가문에서 태어난 권옥연의 원래 꿈은 바이올리니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로, 애초 음악가를 꿈꾸었던 권옥연이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서울 제2고등보통학교(1938년부터는 경복고등학교) 시절 미술교사 사토 구니오(佐藤 邦雄, 1897-1945) 선생의 이끌림이 컸다. 이대원(李大源, 1921-2005), 장욱진(張旭鎭, 1917-1990)과 같은 선배 화가들에게서도 공통으로 나오는 진술이지만, 사토 선생은 진보적 자유주의자로서 화가를 꿈꾸는 많은 조선의 학생들에게 야수주의와 입체주의를 가르치며 그들의 꿈을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세대적으로나 양식적으로 권옥연은 한국 현대미술에서 중간지대에 있는 듯하다. 권옥연 미술이 한국 화단에서 이례적이라고 할 때, 그 독자성의 핵심은 무엇인가?


권옥연, 월광, 캔버스에 유채, 160.5 x 154


푸른색을 기조로 한 권옥연의 무채색 화면은 대단히 세련되고 격조가 있어 그 자체의 회화성도 풍부하지만, 무엇보다 관람자들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켜 아득한 추억으로 이끌어가는 마술적 힘이 있다. 권옥연의 회화는 선과 형태나 색채로 ‘구성’되었다기보다는, 인간의 의식이 흐르는 몽상의 ‘과정’과 원초적 무의식의 세계를 시각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의 신화학자 뒤랑(Gilbert Durand)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권옥연 회화는 제욱시스의 ‘재현 representation’의 거울이나 피그말리온의 ‘표현 expression’의 거울이 아닌, ‘나르키소스의 거울’. 즉 상상력의 거울을 사용하여 세계를 비춰보고 있었던 것이다. 풍부한 암시와 비유, 비약과 생략이 살아 숨 쉬며 끊임없이 몽상을 유발하는 의식의 상상계. 철학자 바슐라르(Gaston Bachelard)는 상상력은 인간의 삶을 구성하고 지탱하는 근본적인 힘”이라고 하였다. 20세기 한국 현대미술가들의 화업을 살펴보건대, 그리움과 관능이라는 인간의 원초적 환상에 그만큼 충실하게 몰입했던 화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권옥연의 미술 세계는 예외적으로 추상성이라는 모더니즘 미학이나 한국적 정체성이라는 익숙한 동서문화 융합론의 범주를 벗어나 탈 근대적 영역을 향하고 있었다.


권옥연, Progress, 1962, 캔버스에 유채, 81 x 115


권옥연은 195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접한 전후 앵포르멜(Informel)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세계 2차대전 이후의 반(反)문명 정서를 반영하였던 장 포트리에(Jean Fautrier, 1898-1964)의 <인질>과 같은 거칠고 잔혹한 느낌과는 달리 권옥연의 회화는 오래된 퇴적물의 흔적처럼 풍부하고 운치가 있다. 권옥연의 관심은 단발마의 고통이 아니라 오래된 것들이 불러 일으키는 정서적 뉘앙스였던 것이다. 게다가 귀국 후 권옥연의 화면에는 토기나 목기, 청동기, 마을의 오래된 장승이나 한옥의 일부와 같은 목조 건물과 같은 익숙한 토속적 이미지들이 들어오며 더욱 다채로워졌다. 토속적인 그림 속 오브제들은 건축적인 구조물처럼 확대되어 화면을 가득 채우기도 하고, 기이하게 마치 원시 부족의 제의에 쓰이는 샤먼의 방울이나 종처럼 보이기도 했다. 당시 이러한 소재의 변화는 권옥연이 이즈음부터 몰두했던 골동품 수집과 관련이 있었다. 특히 권옥연은 전통 고건축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경기도 남양주시의 금곡에 옛 궁집을 보존하고, 전국에서 고택을 허문다는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달려가 건물을 해체한 후 그곳으로 옮겨와 복원하였다. 궁궐을 복원하고 한옥의 가치를 다시 되살리는 일들이 2000년대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상기해 보면, 옛 것에 대한 권옥연의 관심과 오래된 것을 알아보는 그의 심미안이 시대를 훌쩍 앞서가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권옥연, Fabulous Statue, 1970, 캔버스에 유채, 192 x 164.5


1970년대 권옥연이 회화는 또 다른 변화를 맞는다. 얇고 매끄럽게 처리된 화면은 물이 흐르듯 공기가 숨 쉬듯 더없이 유동적이다. 짙푸른 하늘에는 나비가 너울거리고 신비한 흰 달이 둥실 떠올랐다. 사랑의 감정으로 충만한 초현실적 풍경화였다. 1960년대 거칠게 메말랐던 토양이 수분을 머금고 갑자기 만개한 것 같은 풍경. 이러한 원초적인 풍경화의 관능적 연상 작용을 더 고조시키는 것은 여성 누드와 한껏 부풀어 오른 만월의 이미지였다.


권옥연, 무제, 1980년대, 캔버스에 유채, 162 x 227.5


권옥연은 그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지루할 때면 여인초상을 그리곤 했다. 그렇게 그린 인물화는 권옥연의 머릿속에 있는 환상이 빚어낸 가상의 인물일 때가 많았다. 그가 그린 여성 외모의 특징은 분명하다. 귀여운 들창코에 풍성한 머리, 짙은 피부의 톤, 아직 소녀 티를 벗지 못한 청순한 모습이다. 때로는 수줍게 몸을 가리는가 하면, 때로는 관능적인 자세로 유혹하는 여인들이다. 여인은 그에게 있어 어떤 집요한 향수와 같은 것으로, 반복해서 거듭하는 소묘의 흔적들은 그 열망의 집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사실 파리에 체불했던 많은 미술가가 있었지만, 권옥연처럼 평생 에콜 드 파리의 정서가 물씬 풍기는 그림을 그린 미술가는 많지 않다. 누구나 공감하듯 그가 토속적 소재를 다루더라도 그 효과는 늘 이국적이었다. 그의 미술세계는 본질적으로 ‘파리’라는 도시로 상징되는 유럽 모더니즘의 미학에 닻을 내리고 있었고, 그 열망은 이국적 여인으로 의인화되고 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권옥연이 평생 집착했던 여인상은, 아시아라는 지역의 미술가가 쉽게 성취할 수 없었던 중심을 향한 욕망의 기호였다.



권옥연, 누드, 1962, 캔버스에 유채, 84 x 104



일본 유학의 마지막 세대이기도 한 권옥연은 해방 이후 어떤 사조나 단체 활동에 크게 연관됨 없이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환상의 세계를 펼쳐 나갔다. 당당한 겉모습 안에 숨어 있는 권옥연의 자아는 때로는 성장하지 않은 소년처럼 순진하고, 때로는 그가 그린 상상의 소녀처럼 내밀하다.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라는 별명답게 더없이 부드러운 그의 성정에 대해서 부인 이병복은 “그이는 만년 다섯 살 소년이었다,”며 그리움 섞인 푸념을 하곤 한다. 이러한 아름다운 서정은 화가가 캔버스의 질료와 형상에 집중하며 평생을 쉼 없이 매진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성취였다. 권옥연의 미술세계는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유례 없이 풍부한 회화소(繪畫素)였다.





* 『권옥연』 (가나문화재단, 2015)에 실린 글 발췌

김미정(한국근현대미술사)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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