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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추사 학예의 동반자 유최관 첫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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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황정수(미술사가)

전 시 명 : 정벽 유최관
전시기간 : 2015.10.18.-2015.12.6.
전시장소 : 과천 추사박물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말년을 보낸 과천에 자리 잡은 추사박물관에서는 매우 특별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김정희와 가까이 지내며 학예의 동반자였으나 그동안 호와 이름 등 단편적인 자료만 알려져 있을 뿐 실제적인 면모를 알 수 없었던 정벽(貞碧) 유최관(柳最寬, 1788-1843)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발견되어 기획된 귀한 전시이다. 10여 년 전 과천 인근에 살던 유최관의 후손을 찾아내 오랜 준비 끝에 결실을 맺은 추사박물관 허홍범 학예사의 땀의 결실이다.
 
유최관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공율(公栗)이다. 연경에 갔을 때 옹수곤이 계용(季容)이란 호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호는 정벽(貞碧) 또는 편미산인(編眉山人)을 사용하였다. 그는 김정희가 중국에 다녀 온 2년 후인 1812년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와 함께 북경에 연행을 한다. 이들은 김정희의 소개로 옹방강(翁放綱, 1733년-1818)과 옹수곤(翁樹崑, 1786-1815)을 만났으며, 조선에 돌아와서도 학문적인 교류를 지속한다. 이들은 서로를 '성추하벽(星秋霞碧)'이라 부를 정도로 우정이 남달랐다. 옹수곤과 김정희는 이미 <성추(星秋)>라는 인장을 새겨 사용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며, 유최관은 신위의 제자이니 ‘하벽(霞碧)’이라 할 만하다. 옹수곤은 이들을 잊지 않으려 새로 집을 짓자 <성추하벽지재(星秋霞碧之齋)>라는 편액을 새겨 걸기까지 한다. 200여년 전 문화 예술인들의 국제적인 교류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전시는 유최관 집안의 선조들, 유최관의 연행(燕行), 김정희와 유최관, 유최관과 그의 친구들 등 4부로 나눠 60여점의 유물을 선보인다. 이름으로만 어렴풋이 기억되던 유최관이 보던 책과 자료, 그가 적어 놓은 필적을 확인하는 것은 감춰졌던 역사를 밝히는 일이며, 연행과 관련된 자료와 작품, 김정희와 관련된 유물들을 보는 것은 과거의 고고학적 결핍을 채우는 매우 뜻 깊은 순간이다. 

유최관의 자료가 발견되자 많은 것들이 해결되었다. 집안 족보를 통해서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생몰년을 확인할 수 있었고, 글씨를 잘 썼다고 알려져 있던 그의 글씨가 옹방강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옹방강의 영향을 받았던 김정희의 초년 글씨와 유최관의 글씨가 유사한 면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유최관은 대나무를 잘 그렸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 기획전을 통해 그의 그림은 신위로부터 배웠음을 알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김정희보다 17살, 유최관보다 19살 많은 신위는 이들과 벗이라는 개념보다는 대선배 또는 스승의 위치에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번 유물 중 유최관의 글씨로 전해오는 <선비유인상산김씨행록(先妣孺人商山金氏行錄)>의 글씨나 <정보(학산당인보)>의 필체를 보면 옹방강 글씨의 유흔이 보이며 매우 높은 수준의 솜씨를 보이고 있다. 김정희의 초년 글씨에 비해 날카로움은 덜해 보이나 단정한 구성이나 기세의 넉넉함은 김정희에 못지않음을 보여준다.  
            


유최관 <선비유인상산김씨행록>



유최관 <정보(학산당인보)>

 
연행과 관련된 것으로는 북경까지의 루트를 적은 <연행노정기>, 옹수곤이 유최관에게 보낸 시고 <성추하벽지재>와 <벽낭간관(碧琅玕館)> 편액, 강덕량의 발문이 있는 진한대의 <와당 탁본> 등은 연행 관련 유물로 조선과 청나라 문인의 교류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찬조 출품된 옹방강·옹수곤의 글씨 또한 눈을 즐겁게 하는 좋은 작품이다. 
이들 중 단정한 해서 글씨로 1813년에 쓴 편지 <성추하벽지재(星秋霞碧之齋)>는 ‘성추하벽’ 네 사람의 우정을 잘 보여주는 귀한 자료이다. 네 사람이 만나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부터 새로 집을 짓고 편액을 걸어 놓고 항상 그리워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인간미 가득한 절품의 글씨이다.  

<벽낭간관>은 옹수곤이 유최관의 당호를 지어 보낸 글씨이다. ‘낭간(琅玕)’은 ‘좋은 옥’은 말하는데 유최관의 호 ‘정벽(貞碧)’의 ‘碧’자와 짝을 이루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옹수곤은 녹색 물을 들인 종이에 단정한 글씨로 ‘碧琅玕館’이라 정성스럽게 쓰고 협서를 더하여 유최관에게 보낸다. 옹수곤은 김정희 못지않게 유최관에게도 진한 애정을 느끼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옹수곤 <성추하벽지재>  



옹수곤 <벽낭간관>   


이번 전시의 또 하나의 보람은 유최관이 김정희와 관련된 자료를 여러 점 남겨놓았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형태의 김정희의 친필 글씨 3종은 김정희와 가까웠던 유최관의 위상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자료이다. 

 <박종마정 물반정주(博綜馬鄭 勿畔程朱)>는 그 동안 잘 보지 못하던 김정희의 독특한 필체이다. 내용은 옹방강이 추구한 한송(漢宋) 절충론의 핵심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마융(馬融)과 정현(鄭玄)을 널리 종합하고, 정자와 주자를 배반하지 말라”는 뜻이다. 협서에 쓰여 있는 “담계노인(옹방강)이 경전을 설명하는 요지와 시를 논평하는 비체가 이것에 다 갖추어져 있다. 옛날에 받들어 들은 것을 써서 정벽에게 준다.”는 내용에서 옹방강과 김정희, 김정희와 유최관의 학문적 바탕과 전승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김정희 특유의 기세 넘치고 절묘한 구성을 보여주는 글씨가 아니라 언뜻 생경함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설명키 어려운 비범함과 무게감으로 감상자의 시선을 압도하는 완력을 보여준다. 무뚝뚝하게 또는 무심하게 내려 그은 듯한 묵직한 느낌의 예서 기운이 자신 그토록 역설하던 ‘불계공졸(不計工拙)’ 본래의 모습을 느끼게 한다. 대련 중 한 쪽만 남아 있는 것이 아쉽다. 


<박종마정 물반정주(博綜馬鄭 勿畔程朱)>


<송백인(宋伯仁) 5언시>·<구하(鉤河)·봉괴(奉魁)>는 새로 발굴된 말년에 쓴 글씨이다. 특히 <송백인 5언시>는 유최관의 둘째 아들 유석년(柳錫秊, 1820-1874)에게 써준 글씨라는 특별함이 있다. 시의 내용이 맑고 서정적이어서 그런지 글씨 또한 경쾌하고 리듬이 살아 있다. 글씨의 흐름이 청아한 음악 한편을 듣는 듯 구성지다. 

       山下六七里 山前八九家  산 아래 예닐곱 마을, 산 앞에 여덟 아홉 집. 
       家家淸到骨 只賣水僊花  집마다 말가 뼈에 이르니, 수선화를 팔 뿐이네.

이 두 작품에는 ‘추사(秋史)’라는 호 인장이 찍혀 있는데, 이 인장은 용례가 흔치 않은 것으로 <불이선란(不二禪蘭)>에도 찍혀 있는 인장이다. 이 들 인장들은 찍혀 있는 상태나 인변(印邊)의 파(破)가 조금 차이가 있어 이들을 비교하면 <불이선란>의 제작 시기를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김정희 글씨 중 유난히 큰 작품인 <유천희해(遊天戱海)>와 <무량수각(無量壽閣)>은 임모와 탁본이지만 추사 김정희 글씨의 정수를 보여준다. 


<송백인(宋伯仁) 5언시> 



<구하(鉤河)·봉괴(奉魁)>


이번 전시는 유최관의 한중교류라는 매력적인 사건과 옹방강·옹수곤 부자와 김정희의 글씨 같은 시각적인 예술품의 발굴도 중요하지만, 사실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추사 김정희 인맥의 한축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다. 유최관이 김정희나 신위는 물론 동번(東樊) 이만용(李晩用, 1792-1863), 형암(逈盦) 김훈(金壎), 박제가의 아들 박장암(朴長馣), 정학연(丁學淵, 1783-1859) 등과도 폭넓게 교유를 했음을 알 수 있었으며, 집안 선조들의 자료와 주변인들의 필적은 유최관의 인성과 학문·글씨 등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자료의 발굴은 유최관 한 명에 대한 연구 뿐만 아니라 그 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친구인 김훈 그리고 이들과 교류한 ‘양춘(陽春)’이란 호를 쓰는 이 등의 정체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듯 많은 장점이 있는 좋은 전시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신위에게서 배웠다는 유최관의 그림을 한 점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스승인 신위나 선배인 김정희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음에 비해서 유최관의 그림이나 글씨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음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전시로 유최관의 글씨는 편린이나마 확인되었으니, 이제 ‘자하풍(紫霞風)’으로 예측되는 유최관의 문인화가 발견되기를 기대해 본다.

황정수(미술사가) 관리자
업데이트 2024.10.28 0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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