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한국 근대화단의 선봉 – 춘곡 고희동 50주기 특별전
장 소 : 원서동 고희동 가옥
기 간 : 2015. 10. 22~12.27
춘곡 고희동(1886~1965)이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1918년 직접 설계하여 지었다는 한옥이 서울 한복판 관광객과 시민들이 오가는 창덕궁 옆 북촌에서 버텨 운 좋게 남아있다. 고희동은 이곳에서 41년간 생활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당대문화인들과 교류하고, 작품활동을 했다. 2000년대 초반 이 가옥이 헐릴 위기에 처했을 때 북촌 주민과 시민단체 등에서 보전운동을 펼쳐 2004년 등록문화재가 되고, 2008년 종로구에서 매입, 2012년 (재)내셔널트러스트문화유산기금과 업무협약을 맺어 ‘춘곡 고희동과 친구들’ 특별전을 시리즈로 열기 시작하며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의 50주기에 맞춰 작은 회고전을 열 수 있게 된 것 또한 흔하지 않은 좋은 운인 듯하다.
고희동은 최초의 서양화가로 불리지만 그의 서양화 작품은 자화상 몇 점만 전해질 뿐이고, 1926년 이후로는 서양화를 그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시에서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그 이후에도 펼쳐지는 그의 다양한 행보에 대한 미술사적 역사적 평가는 다음으로 미루고, 그가 서화 화단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와중에 전통적인 수묵채색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그려냈는지의 시대별로 어떠한 변화가 있는지 실마리가 될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고희동은 14세부터 4년간 프랑스어학교인 한성법어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다녔고 대한제국의 궁내부에서 관리로 일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관직 개편이 일어나 설 자리가 애매해 진 상황에서 1907년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게 그림을 배우던 이도영을 만나 자신도 그들을 찾아가 문하로 들어가며 한국화를 배우게 되었다. 1909년 2월 일본에서의 미술 연구를 위해 일본으로 떠나고 9월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서양화를 배우고 돌아와 유화를 국내에 소개하고 적극적으로 후학을 키우고 협회를 만들고 활동하면서, 고희동이라는 인물이 한국의 근대화단 형성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부채를 든 자화상>(1915)이 그의 작품 중에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화 작품으로 등록된 그 작품 덕에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져 있고, 유학 이후 휘문, 보성, 중동학교 등에서 서양화를 가르쳤지만, 유학 전 소림 조석진과 심전 안중식 문하에서 한국화를 배웠던 터라 귀국 후 당대의 서화가와 교류하면서 1920년대 후반에는 전통 수묵화법을 기초로 한 근대적 서화 작품들이 많다.
산수도, 1927년, 종이에 담채, 23x41cm, 개인
사계산수도, 종이에 담채, 36x20cm, 개인
탁족도, 1939, 종이에 담채, 42x21.9cm, 이상혁 소장
춘곡 선생이 가지고 있다가 원서동에 살던 손자 친구 이상혁이 정초에 세배와서 그림을 청하자 주었다고 한다.
화조도, 1956, 종이에 담채, 67.2x25.5cm, 개인
서양적 기풍을 가미했다고는 하나 양식적으로 독자적인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그의 산수화, 화훼영모도, 글씨들을 꽤 다양하게 볼 수 있다. 제자들의 그림, 변관식, 이병직, 배렴, 최우석과 함께 그린 합작도, 관재 이도영, 무호 이한복과 함께 그린 그림도 함께 전시되어 있으며, 졸업장, 그가 그렸던 표지 등의 자료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와 별개로 가옥의 한쪽에 그의 화실과 사랑방을 재구성하여 그가 사용했던 도구와 사용했던 물건들도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그의 활동반경에 비해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연구는 많지 않은 편인데, 이번 전시 및 연구가 미술사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는 기회가 될 듯하다.
변관식, 이병직, 배렴, 최우석과 함께 그린 합작도(부분). 왼쪽이 고희동이 그린 국화 부분.
역사가옥자체가 박물관 역할을 할 때의 장점은 건물 자체가 근대문화유산으로서 감상대상이 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박물관 건물이 남아 있는 유품들과 함께 작품의 맥락을 강화시킨다는 점에 있다. 이 그림들이 아무런 관계없는 네모난 흰 벽의 전시관 유리창 안에 들어있다면 어떤 감흥을 줄 수 있을까. 어떤 면에서는 그림만 들여다보게 되기는 힘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는 힘든 환경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안채에서 내려다 본 뜰과 사랑방
50여년 100여년 전의 일조차 우리에게 제대로 남아있지 않고, 역사적 평가가 필요한 부분에 빈 공간이 여전히 너무 많다. 우리에게 현재는 과거의 어떤 일들이 모여져서 나타난 것들인데, 그 실타래를 풀지 않고 문화융성의 미래를 아무리 외쳐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