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거장 이쾌대, 해방의 대서사
전시기간 : 2015.07.22(수)~2015.11.01(일)
전시장소 : 덕수궁미술관
글 : 조은정(미술평론가)
“오랜만에 내 소식을 알리게 됩니다. 9월 20일 서울을 떠난 후 오륙 일 동안 줄창 걷다가 국군의 포로가 되어 지금 부산 100수용소 제3수용소에 있습니다. 나의 생사를 모르는 당신에게 이 글월을 보내게 되니…신병을 앓는 당신은 몇 배나 여위지 않았소. 안타깝기 한량없소이다.
…이곳의 미인 수용소 소장이 미술을 이해하는 분이기에 까닭에 화용지와 색채도 구해주셨습니다. 내일부터는 포로수용소의 정경을 그리게 되었습니다…내 걱정 과히 말고 모쪼록 당신 건강 조심해 주시오. 이곳 나의 희망은 무엇보담도 당신의 건강입니다.
아껴둔 나의 색채 등은 처분할 수 있는 대로 처분하시오. 그리고 책, 책상, 캔버스, 그림들도 돈으로 바꾸어 아이들 주리지 않게 해주시오. 전운이 사라져서 우리 다시 만나면 그때는 또 그때대로 생활설계를 새로 꾸며봅시다. 내 맘은 지금 우리 집 식구들과 모여 있는 것 같습니다.”
이쾌대의 가족 사진(1940년대)
이쾌대가 사용하던 파레트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이쾌대의 편지이다. 부인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 그리고 포로수용소에서 화가의 생활이 나타나 있는 이 편지는 놀랍게도 쉽게 입에 붙는다. 강의 때 화면을 보지 않고 편지를 읊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남의 가정사를 들여다보는 관음증이 아니라, 압축된 문장 안에 들어가 있는 역사와 개인이 눈앞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미 작고한 작가이므로 전시될 수 있는 작품 수는 한정적인데, 보여질 수 있는 이쾌대 작품 거개가 나온 전시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신문지상에서 시작하여 각종 블로그로 번져나간 이쾌대에 관심은 전문가에게서부터 대중에게로라는 보편적인 유포의 틀 안에서 이해되고 있다. 2015년 가을, 국화꽃 화분이 그 옛날 국전 때처런 나란히 장식되어 있는 덕수궁미술관에서 보여지는 이쾌대, 그의 전시가 지금 우리에게 보여지는 방식은 어떤 것일까.
이쾌대,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 1940년대 후반, 캔버스에 유채, 72x60cm, 개인소장.
대중이 이쾌대를 처음 만난 것은 야구대회였다. 휘문고보 야구부원이었던 그는 아주 탁월한 운동선수였다. 1929년 9월의 배재와 휘문이 맞붙은 제5회 연맹전은 양팀이 승세를 가늠할 수 없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경기였는데 이쾌대는 후보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안타 하나 없던 그는 이듬해인 1930년 9월에는 내야수가 되어 있고 1타수를 올렸지만 그게 그만 중비(中飛), 센터플라이여서 휘문이 점수를 얻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만든 적도 있었다. 그는 2번 출전하여 4번의 타수를 기록하였는데 안타 1, 루타(壘打) 1, 삼진 1, 사사(四死)구 1을 기록하였다. 물론 이듬해의 이쾌대는 7타점을 올리는 주전이 되어 있었고 유격수로 이름을 날렸다. 1932년 10월에는 중앙기독청년회가 주최한 기계체조대회에 참가하여 6등을 하였던 그는 스포츠맨이었다.
1932년 한 해 동안에도 6월에는 야구대회 주전으로 활약하였고 9월에는 전조선남녀학생미술대회에 출품하여 중등회화 3등이라는 큰상을 받고 10월에는 기계체조대회에서 또 전국 순위에 드는 말 그대로 다재다능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동아일보에는 휘문고보 5학년 이쾌대 자화상을 지면에 실었으며, 수상자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아직 고보생인 그에 대한 기자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근대기 청년 이쾌대를 만날 수 있다.
“휘문고보 리쾌대 군은 남성적 건강미를 홀로 지닌듯한 건전한 체골의 소유자! 첫 번 대하매 몸갓는 모제와 입을 열 때 표정이 군인의 긔상 그대로이었다, 쾌대! 그의 이름이 그 성격을 넉넉히 설명하여 준다고 할까.
‘입상은 처음입니다. 학생전에 두어 번과 선전에 한번 입선은 되어보얐습니다마는- 한갓 깃븝니다.’ 쾌활하면서도 대범한 긔색을 보이는 군은 대답이 간결하얐다.
‘앞으로 좀 해볼 작정으로 있습니다.’
이러케 다시 말끗을 잡는 군은 미래의 대가됨에 자신을 어든 듯 하얐다.
군은 학교에서 야구선수로 일즉이 뚜렷한 자최를 안긴 것이 만흐며 또 학과에도 성적이 우량하야 동료들 중에 특히 ‘머리좋은 친구’라는 평판을 듣고 있다 한다.
무엇보다고 이번 학생전에는 군의 누이동생까지 1등 입상(수예)이 되어 집에서는 요지음 유일한 화제거리가 될 뿐만 아니라 군들의 재질을 닥거줄 새 방침이 익어가고 잇다 한다(사진은 리쾌대군)”
요즘 말로 엄친아. 그가 바로 이쾌대였던 것이다. 그는 휘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데이코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에 유학을 떠났다. 1935년 동경유학생들이 조직한 야구단에서도 이쾌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으니 그는 미술을 전공하기로 하며 야구를 즐기는 청년이 되었던 것이다. 1938년에 졸업한 이후에도 동경에 머물며 이번 전시에도 소개된 <운명>으로 니카전(二科展)에 입선하기도 하였다. 그는 1941년 동경에서 이중섭(李仲燮)·진환(陳瓛)·최재덕(崔載德)·문학수(文學洙) 등과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였고, 1944년까지 동경과 서울에서 신미술가협회전을 가졌다. 대개 학교를 졸업하면 귀국하던 다른 미술가들과 달리 그는 일본에서 그림을 그리며 생활했던 것이니, 3만석지기의 아들이란 말이 실감난다.
이쾌대, 운명, 1938,캔버스에 유채,156x128cm, 개인소장, 1939년 일본의 유명 전람회인 '니카텐(二科展)'에서 입선한 작품
그런데 광복 이후 이쾌대는 생의 기쁨을 즐기는 청년이 아니었다. 그는 광복 직후 북한에서 건설 예정이던 강원도 해방탑 건립에 초청받아 조규봉, 김정수, 이석호 등과 함께 북행하였다가 다시 가족이 있는 서울로 이석호와 함께 돌아왔다. 이쾌대가 찾아간 북한은 그가 꿈꾸던 상상 속의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었던 때문일 것이다. 이때 평양에서 해주로 이사 가던 김병기는 이사 때 이쾌대가 와서 도와주었다고 기억하였다. 사상의 시대, 이쾌대는 인간미를 지닌 자연인 이쾌대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남으로 돌아온 이쾌대를 기다린 것은 변화한 주변의 시선이었으니, 미군정의 반공으로 강화된 반공정책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보도연맹에서 매주 1회씩 포스터와 현수막을 그리고 반공대회에 참석하는 것은 지식인 이쾌대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시기 세 편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광복 직후인 1946년, 북한을 둘러보고 온 1947년, 그리고 남한에서 보도연맹 등으로 시달리던 1949년의 것이다. 시기적으로 민족미술에 대한 평가와 북한에 대한 생각의 변화가 엿보인다. 이른바 사회주의자로서 이쾌대가 아닌 한국인으로서 이쾌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광복 직후 해방기념미술전에서 이승만과 고희동 뒤에 서서 사진을 찍던 이쾌대는 보도연맹에 소속되어 감시대상자가 되어 있었다.
이쾌대는 조선미술동맹의 서양화부 위원장 자격으로 강원도에 건립할 해방탑 문제로 북한에 들어갔지만 북한이 단일정치 노선에서 민주건설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으므로 미술 또한 건설의 토대에서 싹이 피고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광복이 지난 뒤로도 계속 선전미술에 머문 현실에 경악하였다.1) 북한의 창작이 없는 미술에 회의를 느꼈던 것이다. 그는 1948년 성북동에 회화연구소를 내어 후학양성에 힘쓰는 한편 왕성한 제작과 활동을 하였다. 개인전도 가졌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작들은 이때 제작된 야심찬 것들이 많다.
08_이쾌대_군상4_1948 추정_캔버스에 유채_177x216cm_개인소장
하지만 1949년 4월 이쾌대는 정종녀, 최재덕, 김만형 등 좌익성향이 있다고 여겨지던 미술인들과 함께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국민보도연맹은 표면상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게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는 목적에서 결성된 조직”이었지만 실은 좌익세력의 색출과 반정부세력의 단속, 통제 업무를 맡은 조직이었다.2) 국민보도연맹 중앙본부 조직은 총재 지휘 아래 부총재, 그 아래의 사무총국장 문화실을 운영하였는데 문화실은 문학부, 음악부, 미술부, 영화부, 연극부, 무용부, 이론연구부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국민보도연맹에 나가 매주 1회씩의 반공포스터 전시회와 길거리에서의 반공결의대회 등의 집회에 쓰일 현수막을 제작하는 업무를 해야만 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미술동맹에 소속되었고 서울에서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를 그릴 때 그는 머뭇거리며 찾아온 화가에게 “그래, 자네도 그려야지.”라며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동료화가에게 마음을 써주었다. 그는 이 초상화 제작에의 참여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처럼 그는 인민군과 함께 서울을 빠져나와 걷다가 국군에게 잡혀 거제도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북쪽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북을 선택할 수 있는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래서 형 이여성의 영향으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남한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탄압을 몸으로 체험하였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북쪽밖에 없었던 것일 게다. 게다가 북에 갔다가 남으로 온 적도 있으니 그는 이 분단이 그리 오래 가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지로 부역의 주동자가 모두 북으로 간 이후에도 고희동 등에 의해 미술인의 부역자 심의가 이루어진 것을 보면 이쾌대를 비롯한 이들 남한에 적을 두었던 미술인들이 남쪽에 남을 수는 없었던 상황임이 확실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미술동맹에 소속되었고 서울에서 김일성과 스탈린 초상화를 그릴 때 그는 머뭇거리며 찾아온 화가에게 “그래, 자네도 그려야지.”라며 아무도 쳐다보지 않던 동료화가에게 마음을 써주었다. 그는 이 초상화 제작에의 참여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처럼 그는 인민군과 함께 서울을 빠져나와 걷다가 국군에게 잡혀 거제도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그곳에서 북쪽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북을 선택할 수 있는지 선뜻 납득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래서 형 이여성의 영향으로 파악하기도 하지만 남한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탄압을 몸으로 체험하였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북쪽밖에 없었던 것일 게다. 게다가 북에 갔다가 남으로 온 적도 있으니 그는 이 분단이 그리 오래 가리라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지로 부역의 주동자가 모두 북으로 간 이후에도 고희동 등에 의해 미술인의 부역자 심의가 이루어진 것을 보면 이쾌대를 비롯한 이들 남한에 적을 두었던 미술인들이 남쪽에 남을 수는 없었던 상황임이 확실하다.
광복 직후 이쾌대는 진환에게 편지를 썼었다.
“기어코 고대하던 우렁찬 북소리와 함께 감격의 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경성의 화가들도 '뭉치자 엉키자 다투지 말자' '내 나라 새 역사(役事)에 조약돌이 되자'와 같은 고귀한 표언 밑에 단결되어 나라 일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미술인들이 유엔군에게 보여주려고 며칠이고 밤낮 가리지 않고 가두를 정비하며 환경미화를 하였다고 전하는 이쾌대, 반만년 역사의 위대한 조국이 일본의 수탈에 의해 더럽혀지고 초라해졌는데 곧 머물다 갈 그들에게 우리의 모습이 추레하게 보이지 않기를 바랬던 순수한 사람. 그런데 울릉도 부근에서 조업중이던 어부와 해녀들이 미군의 무차별적인 포탄연습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조난>을 그렸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동료의 평가는 “그림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는 말도 있었으니, 역사 속에 뜬 섬 같은 이쾌대를 지면 속에서 발견한다.
전시를 함께 둘러보던 학생이 발견한 편지글, “어머 손발이 오글거려요, 선생님~” 콧소리를 따라 눈을 들어보니 이렇게 적혀 있다.
“오! 어여쁜 아가씨여
오! 나의 귀여운 천사여
나는 지금 안타까움을 이기지 못하여 오직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서 무아몽중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귀동녀여!
당신은 왜 이다지 나의 마음을 끕니까.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는 향기가 솟아나며 하늘나라 어린이들이 우리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날면서 행복의 씨를 뿌려주는 것 같습니다
.
이 세상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해낼 적에 어떤 며칠 날 유씨 따님과 이씨 아드님이 서로 만나서 그날부터 그 두 사람의 사이에 온전하고 행운한 사랑이 움터서 영생토록 향락하게 살아라는 것을 미래의 두 젊은이들에게 약속하셨나 봅니다.”
함께 전시를 둘러본 학생들의 뇌리에는 아내를 사랑했던 부자 작가 그런데 북으로 간 로맨시시트 이쾌대가 있었고, 그것은 인터넷마을의 블로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사 앞에서 고뇌하고 민족미술의 양식을 찾아헤매던 이쾌대, 장려한 화면을 남겨주어 우리로 하여금 근현대미술사가 부끄럽지 않게 하여 준 작가 이쾌대는 그렇게 로맨시시트가 되었다. 성북회화연구소에서 그림을 지도받던 이들 대개는 기억한다.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그 시대 그만한 인물 찾기 어려운, 아니 지금도 보기 드문 인재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 한 인간을 기억하는 방식에서, 작가라면 그가 역사 앞에서 또 작가 양식으로 이루어낸 것들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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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쾌대, 「북조선미술계 보고」, 『신천지』, 1947년 2월호.
이쾌대, 카드놀이하는 부부, 1930년대, 캔버스에 유채, 91.2x73cm, 개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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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쾌대, 「북조선미술계 보고」, 『신천지』, 1947년 2월호.
2) 김기진, 『국민보도연맹』, 역사비평사, 2002, p.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