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불계공졸(不計工拙)과 불각(不刻)의 시(時)·공(空)
전시기간 : 2015.9.11.-2015.10.14.
전시장소 : 학고재
글 : 황정수(미술사가)
“불계공졸(不計工拙)과 불각(不刻)의 시(時)·공(空)”이라는 철학적인 제목부터 비범한 이번 전시는 그동안에 있었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우성(又誠) 김종영(金鍾瑛, 1915-1982) 두 거장과 관련된 행사 중 가장 이색적인 전시회이다. 130여년의 차이를 두고 서화와 조각이라는 매우 이질적인 분야에서 활동한 두 사람 간의 공통분모를 찾는 일이다. 일견 두 사람 사이에는 공통점이 크게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김정희는 “잘 되고 못 되고를 굳이 따지지 않는다(不計工拙)”고 하였으나, 사실 그의 글씨는 완숙한 서법과 한 점 흐트러짐 없는 솜씨, 창조적 정신까지 더해져 조금의 빈틈도 없어 보이는 완결성을 보인다. 이에 비해 김종영의 조각은 인위적인 손질을 가능한 한 줄이고 재질의 자연스러운 속성을 남겨 인간의 창조적 개입을 가능한 줄이고자 노력한다.
이렇듯 기법 상으로는 대척점에 있는 두 사람이지만 목적하는 예술의 지향점이 크게 다르지 않고, 오히려 예술적 성취의 과정은 유전적 요소가 있어 김정희의 예술론이 김종영의 조각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에서 기획된 전시이다. 그동안 현대미술의 해석을 서구이론에 맞추던 관성에서 벗어나 우리 현대 미술의 원류를 전통적인 예술정신에서 찾으려는 자생적 연구 방법의 모색이기도 하다.
전시 전경
이번 전시 방식은 김정희의 글씨와 김종영의 조각 중에서 서로 공통적인 요소가 있는 작품을 대조하여 보여주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기획의 출발은 김종영 조각의 근저에 김정희의 글씨 쓰는 정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기획자의 의도 때문이다. 기획자는 “복합성을 띠고 있는 김종영의 추상조각에 비(碑)·첩(帖)의 각체가 혼융된 김정희의 서(書)의 원리가 배태되어 있으며, 김정희와 김종영의 작품은 모두 ‘구조의 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추사와 우성은 ‘불계공졸’과 ‘불각’의 예술정신과 철학을 화면과 입체라는 2, 3차원의 시공간에서 경영해낸 작가”라는데 공통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전시장 초입에는 김정희의 <제해붕대사영(題海鵬大師影)>과 김종영의 <작품 80-5>와 김종영의 드로잉 <자화상>이 전시되어 있다. 도록에만 실려 있는 김정희의 <자화상>과 대비시켜 인간의 표피적인 얼굴의 묘사를 통해 드러나는 본질적인 내면 의식을 짚어보려는 의도이다. 인생에 대한 지적인 관조가 잘 드러난다는 공통점이 있는 작품들이다.
<제해붕대사영>과 <작품 80-5>
김정희 <자화상> 김종영 <자화상>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띠는 작품은 공식적인 전시에 처음 소개되는 김정희의 글씨 <자신불(自身佛)>이다. 이 작품은 예서의 기운이 있는 해서로 쓴 것으로, 글씨의 주된 내용인 ‘자신불’은 “현세(現世)에 있는 몸이 그대로 부처가 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위쪽에 ‘자신불’이라 쓴 큰 글씨는 무심한 듯 당차게 서 있는 모습이 마치 깨달음을 얻은 한 사람이 우뚝이 서있는 모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신(身)’자의 구성은 위태한 인생길에서 흐트러짐 없이 서 있는 무심의 경지에 이른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듯하다. 김정희의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세파를 이기고 노년에 든 인간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하고, 김종영의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인간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래쪽에 “철선아 스스로 깨쳐라, 남에게 의지하지 마라(鐵禪自供 無作他觀)”라는 화제의 울림은 ‘자신불’ 세 글자를 흔들림 없이 세워 놓은 철 조각처럼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자신불> <자신불>의 위 아래 부분
김정희의 <순로향(蓴鱸鄕)>은 ‘괴(怪)’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기이하게 생각하는 이른바 ‘추사체’ 중에서 비교적 편안함을 주는 글씨이다. 중국 진나라의 장한(張翰)이 자기 고향의 명물인 순챗국과 농어회를 먹으려고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이 작품은 ‘행농(杏農)’이란 서정적인 호를 가진 이에게 써준 까닭인지 쇠처럼 강한 선을 사용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아래쪽의 비교적 넓은 구성이 안정감을 주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순로향>과 김종영의 <작품 68-1>은 구성 면에서 유사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강한 직선을 사용하여 비대칭적인 기하학적 구성을 하고 있는데, 이 작품 또한 직선의 차가움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불규칙한 면의 구성이 넉넉함을 주는 반전이 느껴진다. 김정희의 글씨와는 반대로 위쪽의 넓게 자리 잡은 면의 구성이 불안함보다는 율동감과 일탈을 보여주기 때문에 느껴지는 것으로 보인다.
<순로향>과 <작품 68-1>
8폭으로 구성된 <칠언시구집(七言詩句集)>과 <작품 78-31>, 횡액 글씨 <위공식서(爲公寔書)>와 <작품 78-4>의 대비는 두 거장의 닮은 듯 또는 다른 듯 표현 방식이 나름대로의 기품을 가지며 서로 보완하고 있는 모습이 각각 다른 분야의 예술의 절대미를 보여주는 듯하다.
<칠언시구집>과 <작품 78-31>
<위공식서>와 <작품 78-4>
두 거장의 작품으로서는 정형의 틀에서 벗어난 대표적인 작품들인 <천기청묘(天璣淸妙), 매화동심(梅花同心)>과 <작품 74-9>는 파격이라는 면에서 공통점을 느끼게 한다. <천기청묘, 매화동심>는 김정희의 작품으로는 획의 흔들림이 많고 글자 간의 배열 구조가 자유분방하다. <작품 74-9> 또한 ‘불각(不刻)의 각(刻)’이라 하더라도 단정한 미니멀리즘적인 요소가 있는 다른 김종영의 작품들에 비해서 ‘조각(彫刻)’의 속성이 강하고 인위적인 손길이 많다는데 그 차별점이 있는 작품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작품은 그들의 작품 속에서 다르지만 크게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으며, 각각 ‘불계공졸’과 ‘불각의 미’를 설명하듯 우뚝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기청묘, 매화동심>과 <작품 74-9>
이 밖에 김종영의 서예 작품 <자호삼매지실(紫壺三昧之室)>에서는 획의 구성과 결구(結構)가 김정희의 글씨를 방불케 하고, <작품 77-1>은 마치 <자호삼매지실> 중에서 ‘호(壺)’자나 ‘실(室)’자를 작품화 한 듯한 조형성을 보이고 있다. ‘서화동원(書畵同源)’이 아니라 ‘서각동원(書刻同源)’이라할까? 김종영의 조각 작품 제작 방식이 김정희의 글씨 작법에서 출발하였다는 유전적 영향이 있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라 생각할 수 있을 듯하다. 이러한 면은 김종영이 좋아했던 <장자(莊子)> '천하(天下)'편의 “판천지지미(判天地之美), 석만물지리(析萬物之理)”, 곧 천지의 아름다움을 판단하고, 만물의 이치를 이해한다는 의식이 무르녹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김종영 <자호삼매지실>
<작품 77-1>
이 전시회에서 보이듯 김종영은 늘 추사 김정희의 미술 세계를 흠모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로 끌어들이도록 노력하였다. 그는 <완당과 세잔느>란 글에서 “완당의 글씨는 투철한 조형성과 아울러 입체적 구조력을 갖고 있다”고 높게 평가하며 자신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또한 김정희가 왕희지체를 답습하는 당대의 주류에서 벗어나 고전을 탐구하고 새로운 창조적 정신을 더하여 글씨의 본질로 나아가려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은 김종영의 조각 예술이 더 높은 경지를 이루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음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을 관통하는 ‘법고창신’의 정신이 이들의 미술 바탕에 깔려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한편으로 이러한 의식이 미술의 내면적인 사상과 외형적인 재현을 모두 충족하고 있는 가에 대해 내심 불편함이 있는 것은 이 전시의 해결해야할 과제이다. 비록 내재적인 공통점이 있다 하더라도 외형적으로 이질적이면 닮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미술은 근본적으로 시각 예술이라는 대전제를 충족시켜야만 하기 때문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이 전시의 주인공은 김종영이다. 김정희와 김종영의 130여년에 걸친 인연을 다루고 있지만 김정희의 정신이 김종영의 작품에 어떻게 투영되어 있느냐를 보는 전시이니 분명 주인공은 김종영이다. 그러므로 이 전시의 결말은 김종영의 작품이 김정희의 정신을 어떻게 받아서 새로이 조각 작품으로 ‘창신(創新)’을 해 내었는지가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김정희의 작품을 통하여 김종영의 작품을 보더라도 내적인 예술적 정신세계의 전수는 이해가 되지만, 시각적 외형은 그가 공부한 조각의 선배인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나 한스 아르프(Hans Arp, 1887-1966) 등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좀 더 치밀하게 규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