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명 : Andy Warhol Live
장 소 : DDP
기 간 : 2015. 6. 6(토) ~ 2015. 9. 27(일)
1964년의 어느 날, 뉴욕 스테이블 갤러리에는 한 이상한 전시회가 열렸다. 브릴로 세제와 하인즈 케첩 등의 포장박스 모형을 수백 개 가득 채워놓은 전시장은 마치 수퍼마켓의 창고 같아 보였을 것이다. 작품이 잘 팔리지는 않았으나 이 전시는 이후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다.
현대미술의 한 사조로 자리잡은 팝아트와 그 중심이 되어 스스로 현대미술의 한 아이콘이 된 앤디워홀. 국내에서 그의 작품 전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DDP 전시장을 찾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앤디워홀미술관 소장품 중 400여 점을 골라 들여왔으며, 작품과 함께 다양한 자료가 소개되어 앤디 워홀의 작품세계를 망라하고 있다.
현대미술의 한 사조로 자리잡은 팝아트와 그 중심이 되어 스스로 현대미술의 한 아이콘이 된 앤디워홀. 국내에서 그의 작품 전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DDP 전시장을 찾았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앤디워홀미술관 소장품 중 400여 점을 골라 들여왔으며, 작품과 함께 다양한 자료가 소개되어 앤디 워홀의 작품세계를 망라하고 있다.
그가 작품에서 활용했던 헐리우드 스타만큼 유명하고 이미 생존 당시에도 스타였던 화가이면서, 미술사적으로도 팝아트를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든, 현대의 거장이라면 거장의 작품들이다. 작품과 함께 개인의 삶이 조명되고, 코카콜라 병, 캠벨수프 캔, 마릴린 몬로 등 일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작품들과 함께 그가 만들었던 잡지, 영화, 재난과 죽음에 대한 생각, 예술작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많은 사건들도 소개되어 있다. 1966년 워홀은 딜러 레오 카스텔리와 함께 연 두 번째 전시에서, 소 그림이 그려진 벽지로 바른 방과 헬륨은박풍선 구름이 가득한 방을 만든 바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 전시 또한 부분적으로 재현했다.
<마릴린Marilyn, 1967>
1960년대 초, 미국에서 추상표현주의가 그 절정에 이르렀을 때 뉴욕 화단의 젊은 화가들이 모여 어이없을 정도로 산업화된 이미지를 끌어온 작품들을 선보였다. 많은 비평가와 화가들은 이 시덥잖은 작품들에 대해 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팝아트라고 이름붙여진 이 미술은 그 이후로 한참을 미술계를 뒤흔들게 된다. 워홀이 연 실버팩토리라는 스튜디오에서는 조각, 영화, 대형 회화 등을 만들어냈는데, 당시의 유명인사라면 그 실버팩토리에 다 들락거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예술가의 작업실이 다락방을 벗어나 축제의 장소로 바뀌는 시점이었다.
진지하고 엄숙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작품들의 시작은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작용이었을지 모르지만 예술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본질을 구하기에 좋은 문제제기였다. 대중화된 이미지의 차용, 미술의 독창성 originality, authenticity 에 대하여 저항한다. 작품 자체의 생산 방식도 대량화를 위해 만들어진 방법을 쓴다. 차용과 복제, 유일성의 해체 등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점으로 미술계에 드러난 모습이었다.
진지하고 엄숙한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작품들의 시작은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작용이었을지 모르지만 예술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본질을 구하기에 좋은 문제제기였다. 대중화된 이미지의 차용, 미술의 독창성 originality, authenticity 에 대하여 저항한다. 작품 자체의 생산 방식도 대량화를 위해 만들어진 방법을 쓴다. 차용과 복제, 유일성의 해체 등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전환점으로 미술계에 드러난 모습이었다.
현대미술 이미지가 넘쳐나는 세상에 현대화된 동양의 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세제포장상자를 그대로 재현해 낸 브릴로박스와 정성들여 그린 캠벨 수프 캔에서 1960년대의 미국인들이 받았던 충격을 느끼지 않는다. 워홀 이후의 수많은 국가의 수많은 예술가들이 자본주의의 결과물과 상품들을 가지고 새롭고 충격적인 작품들을 만들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표작을 대하면 오히려 그 작품 아이디어의 오리지널리티를 느끼게 된다. 오리지널리티를 해체한 그 오리지널리티.
<캠벨수프I: 치킨누들Campbell's Soup I: Chicken Noodle, 1968>
워홀은 기자들의 “Where are you from?”이라는 질문에 "I am from nowhere"라는 유명한 답을 했다. 만화와 영화를 좋아한 어린시절, 헐리우드 배우에 대한 열광 같은 것들이 그의 작품 세계를 이끌었다고도 할 수 있으나 무엇보다 그가 독보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누군가를 따라하지 않고 계속 샘솟는 아이디어로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을 마음껏 했던 때문이다.
commercial artist 즉, 상업광고 등 일러스트레이터로 시작한 그의 이력은 끝까지 대중예술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는 것으로 이어졌다. 인터뷰 잡지 발간이나 영화에 대한 열정도 그렇고, “business artist로 마무리하겠다”는 그의 과감한 발언도 상업성이나 대중성에 대해 거리를 두는 기존의 예술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1980년대에 이르면 그는 상업광고로 다시 돌아왔고, 실크스크린이 아닌 핸드페인팅을 캔버스에 시작했다. 바스키아나 키스 해링 등과도 작업하고 모든 이미지가 그의 창작의 자산이 되었다.
상업적이라는 비판을 비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워홀이기에, 이렇듯 참으로 상업적이고 잘 꾸며진 전시가 어울렸다. 19금의 실험적 영화로부터 벽지까지, 그의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능력과 가볍지만은 않은 팝아트 작품들. 충분히 그의 작품세계를 헤엄치다 나온 기분이 든다.
부와 명성을 얻고, 예술가로서 인정받고, 스스로의 작품과 삶을 통제하고 군림한 워홀. 이 시기에 워홀의 작품에서 우리 시대의 예술가들은 어떤 실마리를 얻을지 갑자기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