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기간 : 2015.06.11~09.06
전시장소 : 경기도 이천시립월전미술관
글 : 최경현(홍익대학교 겸임교수)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 1912-2005)의 인물화는 소재나 기법에 있어서 전통과 현대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한국적 인물화의 전형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그는 미인이나 일상의 풍속, 기독교 미술, 특정 인물의 초상, 고사인물, 도석인물 등 다양한 소재를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채색 공필법부터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초상화법, 수묵담채의 현대적 문인화법까지 두루 섭렵하며 근․현대 한국 인물화의 변천과 궤적을 함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장우성의 작고 10주기를 기념한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그린 부모님 초상화를 비롯해 조선미술전람회 출품작, 해방이후 민족미술의 방향을 제시하려 했던 성화(聖畵), 1960년대 이후 현대적 문인화법으로 그려낸 도석이나 고사인물화는 물론 현실에 대한 자신의 주관을 담아낸 여성인물화까지 망라되어 있다. 이밖에 그의 인물화 초본(草本)들이 다수 공개되어 제작과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스타화가가 된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 1892-1979)의 제자로 스승의 채색 인물화법을 가장 잘 계승했던 대표적 화가였다. 이번에 전시된 <귀목(歸牧)>과 <승무(僧舞)>는 각각 1935년 제14회와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작으로 스승의 채색인물화법을 충실히 따랐던 장우성의 초기 화풍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승무>는 김은호가 즐겼던 소재로 화면에서 하얀 소복에 검은 장삼을 걸치고 투명한 고깔을 쓴 채 북채를 잡은 양손을 들어 천천히 춤사위를 시작하는 동작이나 차분한 색채감각은 종교의 초월적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시선을 아래로 한 여승의 눈매 사이로 떨리는 듯한 눈동자에서 속세의 인연을 떨치지 못한 젊은 여승의 번민을 읽을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감성 표현이야말로 장우성의 인물화가 높이 평가되었던 이유일 것이다.
장우성 <승무> 1937년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 비단에 수묵채색 198×161cm 국립현대미술관
해방 이후에는 단구미술원(壇丘美術院)을 결성해 민족미술의 방향성을 모색하였고, 서울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에는 김용준(金瑢俊, 1904-1967)과 함께 일본색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안으로 사실주의적 표현에 근간을 둔 문인화의 현대적 표현기법을 적극 모색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일련의 성화(聖畵) 시리즈는 가톨릭 미술의 주인공인 성모자(聖母子)를 한복을 입은 어머니와 아들로 번안한 것으로 한국적 성화의 방향을 제시한 선구자적 작례로 주목받았다.
장우성 <한국의 성모자상> 1949년 종이에 수묵채색 130×88cm 월전미술문화재단
또한 1956년 서울대학교 개교 10주년을 기념해 그린 <청년도(靑年圖)>는 대학생들이 교정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으로 필선 위주로 그려진 인물 표현이나 담채로 입체감을 강조한 것에서 일제강점기와는 차별화된 면모가 간취된다. 이처럼 필선을 위주로 하며 담채를 적극 활용한 인물표현은 그만의 현대적 문인화로 옮겨가기 이전의 과도기적 단계의 작품에서 자주 사용했던 것이다. 또한 이 무렵의 인물화는 종교적 숭고미를 강조하거나 <청년도>처럼 인물의 건장함을 부각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민족미술을 구현하려 했던 화가의 의도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장우성 <청년도> 1956년 종이에 수묵채색 212×160cm 서울대학교미술관
1960년대부터는 화훼, 인물, 동물 등 다양한 화목에서 수묵담채의 간결한 구도에 여백을 강조하며 현대적 문인화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갔다. 인물화에서는 선동(仙童)이나 달마(達磨) 등의 소재를 백묘법(白描法) 또는 감필법(減筆法)으로 그려내어 전통을 적극 수용하기도 하였는데, 전시된 <동자와 천도(天桃)>(1961), <오원대취도(吾園大醉圖)>(1994), <면벽(面壁)>(1998) 등은 이러한 맥락을 보여준다(도 4).
장우성 <면벽> 1998년 종이에 수묵담채 84×48cm 이천시립월전미술관
더불어 1980년대 이후부터는 현대사회의 문제나 현상에 대한 주관적 의견을 담아낸 그림들을 통해 사회적 고발이나 풍자를 시도하며 월전 양식의 또 다른 재도약을 보여준다. 일례로 1984년에 그린 <춤(舞)>은 흰 한복을 입은 노인이 흥에 겨운 듯 춤사위를 시작하는 표정과 동작에서 현실을 초탈한 삶의 여유가 배어나며, 노인의 얼굴에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한 화가 장우성이 오버랩 되는 듯하다.
화면에서 절제된 춤사위를 시작하는 노인의 수직성과 왼쪽 아래에 직사각형의 공간을 이룬 제시(題詩), 여백의 붉은 인장들이 어우러지며 그가 추구한 현대 문인화의 조형성을 온전하게 접할 수 있다. 이밖에 서구 문물에 경도된 현대 여성을 풍자한 <군군일백오십대손(檀君一百五十代孫)>은 창작과정에서 끊임없이 현실을 반추하려 했던 대가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장우성 <춤(舞)> 1984년 종이에 수묵담채 136×86cm 경기도미술관
장우성 <단군일백오십대손(檀君一百五十代孫)> 2001년 종이에 수묵채색 67×46cm
‘월전 양식’이라 일컬어지는 장우성의 현대적 문인화는 화목에 관계없이 수묵담채로 간결하게 대상을 그려내어 여백의 미를 십분 활용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 문인화가 대부분이 지향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남다른 평가를 받는 것은 전통 문인화의 격조와 현실적 미감이 곳곳에 스며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전시는 영인본이 포함되어 아쉽지만, 인물화를 통해 월전 장우성이 현대적 문인화가로 거듭나는 기나긴 여정을 새롭게 반추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