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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러내지 않고 부처를 표현하기 - <내 안의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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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수완(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조교수)

전시명 : 내 안의 부처
장  소 : 갤러리 아트링크
기  간 : 2015.5.1~2015.5.31

전시 제목처럼이다. 내 안에 있기 때문일까, 이번 전시에 부처는 없다. 오로지 보살상-그것도 단 1점-, 나한상이 몇 점 전시되어 있을 뿐, 전시의 주인공은 고려시대 불교공예품이다. “내 안의 부처”, 즉 부처는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고, 그렇기에 모두가 부처라는 관념은 실상 대승불교의 본질이다. 하지만 너무나 상투적으로 언급되는 표현이기에 솔직히 제목 자체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고 갤러리를 찾았다. 그러나 전시를 둘러보면서 그 제목이 결코 상투적으로 붙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이번 전시가 의도한 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부처’, 혹은 ‘드러내지 않고 부처를 표현하기’ 아니었을까? 사람은 남이나 남의 것은 잘 보면서도 자신의 내면을 보기는 가장 어려운 법이기 때문에 우리 안의 부처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우리를 발견하는 것은 대부분 간접적인 것들을 통해서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 나를 인식하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작품들은 보이지 않게 부처를 암시하고 있다. 한때 ‘무불상시대’라는 것이있어서 위대한 성인인 석가모니를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보리수, 법륜, 혹은 발자국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암시라기 보다는 상징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되지 않았을 뿐, 어떤 형태를 가지고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작들은 아예 아무런 형체도 이용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부처를 드러내는 듯하다. 만약 찻잔을 보면서 향을 느낄 수 있다면, 촛대를 보면서 빛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리고 향로를 보면서 그 피어오르는 연기를 마음에 그려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내 안의 부처가 아닐까? 사실상 이런 물품들은 ‘육물공양(六物供養)’이라 하여 부처님께 바치는 주요 공양물을 담는 것이었는데, 불단에 놓였을 때는 조연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이렇게 독립적으로 전시해놓으니 이들 하나하나가 보이지 않는 부처님을 어떻게 지향하고 있는지 새삼 확인하게 된다. 


도1. 목조 사천왕권속. 높이113㎝                 도2. 목조 사천왕권속. 높이132㎝


뿐만 아니다. 이번에 나온 작품들은 그간 공개되지 않았던 금속공예품을 상당수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처음 접하는 것임에도 그 수준이 일반적인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에 우선 진위문제가 거론되지 않을 수 없는데, 갤러리 측에서는 이미 다양한 연구 데이터 및 전문가의 평가를 준비해놓고 있어 우선은 어느 정도 검증된 작품임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진위문제는 뒤로 미루고 작품의 의도와 표현에 몰입해서 감상해보고자 했다.

우선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작품은 악귀들이다. 이 악귀들은 원래 사천왕의 발 아래에 굴복해서 사천왕을 받들고 있는 존재들인데, 이렇게 절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천왕문에 있었던 상들이니만큼 전시장 입구에 놓이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된다. 특히나 이들이 모시고 있던 사천왕은 지금 이 자리에 없지만, 이 악귀들은 천왕을 떠받치고 있던 자세 그대로 앉아있기 때문에 마치 보이지 않게 거대한 사천왕이 이 공간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천왕 대신 우리를 안내하며 마치 과거에 천왕을 모셨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를 모시겠다고 하는 듯 보이니, 송구하기 그지없다. 어쩌면 이미 내 안에 천왕도 들어와 있음을 이들이 보았기 때문일까? 푸른 얼굴의 악귀는 마치 나를 발견하고 지금 막 달려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안내하듯 앉았는데, 애써 허둥댄 모습을 감추려는 듯 진지하다. 맞은편 뾰족 모자를 쓴 악귀는 마치 개과천선이라도 한 듯한 자신의 처지를 반듯한 자세로 보여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3.은제금은상감포류수금문합(銀製金銀象嵌蒲柳水禽紋盒), 3.8×9.7×7.5㎝.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은제 금은상감 포류수금문 합(銀製金銀象嵌蒲柳水禽紋盒)이다. 담배갑만한 이 은제 상자의 뚜껑과 몸체 옆면에는 볍씨처럼 가느다란 터키석이 ‘八’자 모양으로 성글게 돌아가며 붙어있고, 뚜껑 윗면에는 금과 은으로 연못과 버드나무, 오리, 수초 등의 한가로운 정경이 금은입사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특별히 눈에 띠는 것은 버드나무와 수초가 자라있는 연못 가운데의 섬은 돌을 감입하여 표현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은 금은입사가 아니라 금은‘석(石)’입사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흙에 해당하는 부분을 돌로 표현한 것인데, 옆에 둘려진 터키석이나 포류수금문의 금은이라는 재료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갑작스럽게 화면 안에 자리한 이 돌은 마치 선종에서의 화두(話頭)처럼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더불어 이 돌에 정신이 팔려 이 화면 속의 연못에 빨려들다 보면 마치 거대한 우주가 이 안에 담겨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도대체 무엇일까? 리얼리즘의 발로일까? 아니면 물질성에 대한 실험이었을까? 여하간 고려시대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새로운 사례로 보인다. 이 작품도 불교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안에 향이 담겨있었는지, 아니면 차가 담겨있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문양을 특별히 불교적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비록 포류수금문이 불교에서 비롯된 정병의 기형에 많이 시문되고, 때로 사찰 법당의 문살이 이와 유사한 연지수금문 계통인 경우도 많아서 불교와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직접적으로 불교와 연관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획자가 이 작품을 ‘내 안의 부처’ 컨셉 안에 넣은 것은 첫째로는 너무나 평정한 모습이 곧 부처의 경지를 담아낸 듯 하고, 두 번째로는 거기에 뜬금없이 박힌 이 돌덩이가 마치 일본 쿄토 료안지(龍安寺) 정원에 놓인 돌덩이처럼 깨달음을 주는 듯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되는데, 충분히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도4.목제은제도금투조당초문경상(木製銀製鍍金透彫唐草紋經箱), 14×35×14㎝.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목제 은제도금투조당초문 경상(木製銀製鍍金透彫唐草紋經箱)이다. 다시 말해 불경을 담는 상자인데,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투각한 은판을 덧씌운 것이다. 지금까지 불경을 넣은 상자는 주로 나전칠기류의 유물이 전하는데, 대부분 최고의 정교함을 자랑하는 고려의 공예품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금속제 투각을 한 경상은 처음 접한다. 본디 공예품은 금은동의 금속기가 가장 먼저 만들어지고, 가장 고급제품이며, 여기 들어간 문양을 모방해서 나전칠기 제품이 등장하고, 이를 보다 대량으로 생산하는 과정에서 자기제품이 출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한다면 이 경상은 현존하는 나전칠기 경상의 원형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유물이다. 이러한 유물은 고려불화 중에 특히 지장보살도에 보면 무독귀왕이 들고 있는 경상과 닮아있다. 하지만 그림 속에 등장하는 경상과 이번 전시에 출품된 경상은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림 속의 경상은 대체로 완전히 네모난 상자 형태이거나, 이 작품처럼 뚜껑이 모죽임 되어 모서리가 꺾여있더라도 아래 부분이 이와 같이 기대 같은 형태를 가지지는 않는다. 나전칠기경상은 뚜껑에 모죽임이 있지만, 이 역시 기대는 없다. 문양에 있어서도 몸체와 뚜껑, 기대 전면을 동일한 패턴의 투각당초문으로 하여 매우 대담한 의장계획을 보여준다. 더구나 상자의 비례도 일반적인 경상과는 달리 매우 길쭉한 형태이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해놓고 보니, 이 상자는 관(棺)을 닮았다. 아무런 경첩도 없이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어서 더욱 관처럼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원래 중국에서는 불사리를 관처럼 생긴 사리기에 봉안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처의 열반을 상징하는 사리는 실상 부처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하간 그것이 육체로서는 죽음을 뜻하기 때문인지 관 형태에 사리를 봉안했다. 그런데 경전을 그러한 관 형태의 상자에 넣은 것은 왜일까? 그야말로 경전이 불사리를 대신하는 법사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역시 부처의 부재를 대신하여 그 존재를 암시하는 역할을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겠다.

특히나 여기에 사용된 나무는 연륜연대측정 결과 통일신라시대까지 연대가 올라간다고 한다. 그래서 통일신라시대에 벌채된 나무로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고 하는데, 정말 그렇다면 초기 형태의 경상이 사리기 형태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은 더욱 커진다.


도5.청자은제도금투조수금문완(청자은제도금투조수금문완), 높이 7.3㎝, 입지름 17.5㎝, 바닥지름 5.1㎝.



도6. 목조나한상, 높이64.5㎝ 


끝으로 소개할 유물은 청자 은제도금투조수금문 완(靑瓷銀製鍍金透彫水禽紋盌)이다. 그 아름다운 청자의 빛깔을 왜 굳이 투조금속으로 감싸는지 언뜻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완에서 청자 빛은 물풀과 물새가 노니는 연못의 물로 완벽히 변신했다. 울창한 수풀을 헤치며 연못으로 다가가는 느낌이 든다. 혹시 더운 차를 받았을 때 그 온도와 연관하여 이런 금속기를 덧입혔는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마치 원래부터 한몸이었던 것처럼 정교하게 자기 위에 금속을 입힌 기술은 놀랍기만 하다. 이번 전시를 위해 준비된 도록에도 이미 밝혀져 있는 내용인데,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비(元宗大師慧眞塔碑)에 보면 광종(光宗)이 원종대사에게 하사한 물품 중에 ‘금구자발(金口瓷鉢)’이 있었다. 그 실체가 궁금하던 차에 바로 이런 작품이 금구자발이라면 하사품의 목록 중에 특별히 기록되고도 남을만한 걸작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외에 4점의 목조나한상도 특기할만한데, 모든 유물을 일일이 소개할 수 없어, 그 전시기법만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보통은 정면으로 배열하는 조각상을 이번에는 거울을 보며 뒤돌아 앉은 모습으로 전시했다. 그 의도는 혹 전시장에서 기획자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는 행운이 있기를 바라며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혹시라도 유물 자체를 바라보려는 사람은 뒷모습만 보이는 이런 전시기법에 불만을 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물관이 아닌 갤러리에서 평소 볼 수 없었던 목조나한상의 뒷모습을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되리라 생각한다.


도7. 청동은입사봉황문탁(靑銅銀入絲鳳凰紋托), 높이 6.5㎝, 폭29㎝



그 밖에 법해사(法海寺) 태강(太康)10년명 금동9층탑이나, 금은수정감장(金銀水晶嵌裝) 촛대 1쌍, 금동 금은입사 봉황·수금문 절구 및 공이, 청동은입사 봉황문반 등이 이번 전시에 소개되었다. 일반 감상자 여러분께는 특히나 부처님 오신 날을 즈음하여 보이지 않는 부처를 감각적으로 느껴보실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며, 아마도 미술사 연구자들에게는 많은 진지한 고민을 안기는 전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전시는 5월 31일까지 이어진다.


글/ 주수완(고려대학교) 관리자
업데이트 2024.11.1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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