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윤형근 개인전
전시기간 : 2015.4.15 - 5.17
전시장소 : 서울 PKM갤러리
글 : 박영택(경기대교수.미술평론가)
김환기의 사위이기도 한 윤형근(1928-2007)은 1970년대 김환기의 점화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화가이다. 윤형근이 번짐을 소재로 작품을 하게 된 것은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에서 장인인 김환기 화백의 전면 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본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윤형근, Umber16, Oil on canvas,65x100cm, 1991
그는 1970년대에 화면을 수직 또는 수평으로 분할하고 공간을 설정해 생겨나는 청색 또는 흑갈색의 면을 통해 서체적인 선의 구성이나 수묵의 얼룩과 번짐, 수축 등의 오묘한 변화를 연상시키는 회화를 선보였다. 일체의 구성적 요소를 배제한 체 강한 질감을 주는 마포나 면포 캔버스를 바탕으로 그 위에 다색과 청색을 테레핀유와 린시드유로 혼합해 몇 겹씩 겹쳐 발라 거의 흑색에 가까운 청·다색면을 화면 좌우로 배치한 극도로 단순화된 구도의 그림이다.
물감에 일정량의 테레핀을 섞어서 묽은 상태로 만든 후에 화폭을 적시면 물감은 올 사이로 번져나간다. 번지고 있는 선은 사라짐(부재)과 나타남(존재) 사이에서 놀이한다. 사라지는 선은 그어지고 난 후에도 ‘시간성’이 드러낸다. 물감은 캔버스 천 표면과 동시에 뒷면, 이면마저 물들인다. 다분히 동양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먹의 번짐을 연상시키는 화면이다. 작가는 번짐뿐만 아니라 스밈을 통해 자신의 몸짓, 흔적을 지운다. 망각시킨다.
화면은 손에서 완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림 스스로 번져나감으로써 나타나고 완성된다. 한편 수묵의 색과도 유사한 그 갈색은 캔버스 천과 닮았다. 그 색은 쓰러진 나무가 비바람에 침식되어 흙으로 돌아가듯이, 시간적 흐름을 통해 차츰 본래의 색상이 희박해지고 침식되면서 소박한 무채색으로 돌아간다. 화면을 물들인 짙고 어두운 색은 모든 생명체가 결국 돌아가는 색이자 나무나 흙, 돌 같은 원초적인 것들의 색채, 자연의 색감을 연상시킨다.
그가 사용하는 목면이나 마로 된 캔버스는 우선적으로 자연 섬유에서 오는 소박, 신선함으로 인해 강한 인상을 주었다. 작가는 그 바탕 위에 짙은 남색 등이 섞인 엄버,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색을 만들어 기름에 흠뻑 적신 후 커다란 귀얄을 이용해 위에서 부터 아래로 내리 긋고 다시 그 위에 거듭 그어나가는 동작을 반복한다. 이때 내리그은 굵은 선 가장자리로 시간과 중력이 법칙에 의해 기름이 번져 나오고 캔버스의 올과 올 사이로 스며든다.
이후 화면에 길이와 두께가 서로 다른 기둥 같은 것들이 세워지면서 검은색과 삼베/천의 누런색이 절제된 조화를 이루는 그림이 완성된다. 여러 번 반복되어 덧칠된 물감은 천의 씨실과 날실을 따라 스며들고 퍼져 표면위에 물감층을 가지지 않고 그 대신에 천의 두께를 통과해 밑으로 배어나오면서 캔버스 배면에 또 다른 물감 자국을 남긴다. 이렇게 캔버스 구조를 통해 연출되는 변화는 회화의 정면성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그는 그림을 애써 그리기보다 인간의 삶과 자연의 섭리를 생각하며 일루젼을 배제한 소박한 화포에 그저 물감을 스며들게 하고 번지게 했을 뿐이다. 이처럼 윤형근은 정의할 수 없고 규명할 수 없고 형상화할 수 없는 것을 그리려고 했으며 자연과 같은 세계를 그리고자 했다. 그것은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김환기가 꿈꾸었던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테레핀유의 번진 자국이 배경으로부터 몽롱하게 떠오르거나 가라앉는 듯한 시각 효과를 줌으로써 다분히 ‘시적 몽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장인의 그림이 여전히 시 적이고 문학적인 그 무엇을 연상시켜주듯이 말이다. 이 ‘시적(詩的)’이란 당시 화가들이 주로 추구하던 정신이었다.
무엇을 만들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닌 형태가 스스로 생명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이 자연주의적 특성, 다분히 무작위적인 측면은 한국추상미술을 말할 때 흔히 거론되는 수사다. 소박한 질감, 널찍한 여백, 색채의 은은한 번지기, 흑과 백의 강한 대비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그림은 당시 모노크롬회화를 선보였던 여타의 작가들과는 구별되는 품격과 정신성, 그리고 짙은 먹빛 톤과 여백의 미가 자아내는 한국적 미감과 정서를 대변하는 멋과 깊이를 지녔다는 평을 받았다.
결국 그는 가장 원천적인 자연의 현존을 추구하고자 했다. 역설적이지만 모든 인위의 무용함을 지적하며 자연이 되고자 했다. 어떤 그림이 자연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한국의 중요한 작가들 상당수(김종영, 김환기, 장욱진 그리고 이후 최상철, 문범 등)가 자신의 작업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경지가 되고자 했고 종국에 스스로 자연이 되고자 열망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한국 전통문화의 핵심이고 의미 있는 지점이라 여겼으며 한국 현대미술의 도달해야 할 그 무엇으로 인식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