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한일 근대미술들의 눈 - ‘조선’에서 그리다
전시기간 : 2015.4.4.-5.8
전시장소 : 일본 가나가와 현립근대미술관 하야마(神奈川県立近代美術館 葉山)
글 : 황정수(근대미술연구가)
「한일 근대미술가들의 눈-‘조선’에서 그리다」는 일제강점기 조선의 자연과 풍물을 소재로 그린 작품 300여점이 소개되는 대규모 전시이다. 특히 20세기 초·중반을 살았던 조선과 일본의 미술가들이 식민지 ‘조선’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체험했고 또 무엇을 표현했는지에 초점을 맞춰 기획됐다.
그 동안 일제강점기의 한일 미술교류를 다룬 전시는 관전(官展)과 같은 국가적 행사에 출품되었던 공적인 전시의 속성이 강한 작품을 중심으로 소개됐다. 이와 같은 전시는 당시 제국주의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실질적인 미술 현장을 보여주기에는 지나치게 제국주의적 정책을 대변하는 요소가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300여점 중 절반 이상은 그동안 미술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작품들이다. 이는 저명한 일본화가에서부터 당시 조선*을 여행한 이름 모를 화가에 이르기까지 새로 발굴된 작품들로서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던 일제강점기의 모호했던 미술사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만한 귀중한 자료들이다.
전시는 크게 5부로 나뉘어있다. 그림의 소재적인 측면에서 보면 조선의 전통적인 삶의 모습에서 시작해 근대화에 적응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비롯해 아름다운 자연과 전통, 역사적인 유물을 대상으로 그린 그림까지 총망라돼있다. 작가들은 일본 미술계의 중추적 인물에서 조선의 학교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조선으로 이주해온 화가, 조선을 여행하기 위해 방문한 화가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있다. 전시의 5개 파트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부 조선과의 만남: 조선 풍속을 모티브로 한 그림과 공예 작품
제2부 근대 조선의 풍경: 조선을 소재로 한 풍경화
제3부 근대인의 일상: 조선 일상 생활을 그린 모던 의식의 작품
제4부 그룹 활동과 사제관계: 조선 내에서 전개된 교육 활동, 그룹 활동
제5부 에필로그: 해방 이전에 활동을 했던 한일 미술가들의 해방 이후의 활동
제1부 ‘조선과의 만남’은 주로 식민지 조선의 풍속을 다루는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 처음에 조선에 온 일본 미술가들은 주로 공적인 일로 방문하였지만 이들은 곧 조선의 전통적 풍물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는 이국의 방문객이 갖는 일반적인 관심사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당시 제국주의 침략의 일환으로 ‘식민지의 향토색’을 구현하라는 식민지 정책에 부응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식민지의 남녀노소를 다양하게 그렸으나 주를 이룬 것은 조선의 전통적인 풍속과 여인의 생활 모습을 그린 것들이었다.
도쿄미술학교의 수료 작품으로 제작된 사이고 고게츠(西鄕孤月)의 <조선 풍속>은 1895년 조선을 다녀간 경험을 바탕으로 그린 것으로 당시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생생한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일본 미술인이 그린 작품으로는 매우 이른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규모나 내용면에서 당시를 대표할 만한 그림이다. 시장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조선인 생활상을 현실감 있게 표현하였으며 당시 우리의 그림과는 달리 서구적 원근법이 잘 드러난 이채로운 작품이다.
사이고 고게츠 <조선풍속>
그 외 조선 여인네의 풍속을 다룬 그림으로는 서양화가 후지시마 다케지(藤島武二)의 <꽃바구니>, 고스기 호안(小杉放庵)의 <우물>, 이와사키 가츠히라(岩崎勝平)의 <약수물 뜨는 여인>, 나카자와 히로미츠(中澤弘光)의 <조선 가기> 등이 소개됐다. 이들은 조선 여인의 모습을 지극히 낭만적인 정서로 그리고 있어 현실을 도외시한 지배 국민의 시각이라는 한계를 보이기도 한다.
이들과 달리 경성에 살면서 조선인들과 가까이 호흡하며 이를 그림으로 그린 이시이 하쿠데이(石井柏亭)의 작품에는 이른바 ‘조선의 냄새’가 나는 것을 보면 미술은 현실의 공기가 담겨져야 진정한 예술로 승화됨을 느끼게 한다.
후지시마 다케지 <꽃바구니> 이와사키 가츠히라 <약수물 뜨는 여인>
동양화로는 히라후쿠 햐쿠스이(平福百穗)의 <샘>, 쓰치다 바쿠센(土田麥僊)의 <평상>, 노다 규호(野田九浦)의 <조선 풍속>은 눈길을 끄는 이채로운 그림들이다. 특히 쓰치다 바쿠센의 <평상>은 기생의 일상을 극도로 절제된 선과 감각적인 색채를 사용하여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정확히 계산된 구도 속에 완성시킨 명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당대 최고의 무희 최승희를 그린 고바야시 고케이(小林古徑)의 작품도 비록 밑그림이기는 하지만 감각적인 선의 흐름이나 맑은 색감이 전설적인 무희 최승희의 고혹적인 매력을 나타내는데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쓰치다 바쿠센 <평상>
제2부 ‘근대 조선의 풍경’은 주로 조선을 소재로 한 풍경화들로 구성돼있다. 일본 화가들은 조선의 농촌과 조선적 채취가 남아 있는 명승을 그리기를 즐겼다. 경성의 고궁, 평양 유적지, 그리고 경주와 개성과 같은 오래된 도시는 당시 일본인들이 즐겨찾는 단골 여행지였으며 또한 좋은 사생 대상지였다.
후지다 쓰구하루(藤田嗣治)의 <조선풍경>, 다카기 하이스이(古木背水)의 <풍경>은 조선의 농촌 풍경을 그린 작품 중 유독 눈에 띄는 작품이다. 이들은 한일 합방이 이루어진 초기에 조선을 방문해 조선 미술가들과 많은 교류를 한 중요한 인물이다. 이 두 작품은 한국 근대서양화의 태동과 연관 지어 영향 관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그림이기도 하다.
후지다 쓰구하루 <조선풍경>
다카기 하이스이 <풍경>
명승지 가운데 유독 일본인들이 좋아했던 곳은 금강산이었다. 서양화가든 동양화가든 모두 즐겨 금강산을 그렸다. 그러나 금강산의 천하절경이 동양화 소재에 적합했던지 금강산 그림은 동양화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 중 유키 소메이(結成素明)의 금강산 그림은 미술적 구성도 뛰어나고 소재의 취택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도쿠다 교쿠류(德田玉龍)는 일본에 널리 알려진 이름 있는 화가는 아니지만 금강산에 미쳐 금강산에 들어가 3년간 살며 금강산만 그린 이른바 ‘금강산 화가’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가 그린 금강산 그림에는 금강산 산줄기를 속속들이 알고 그린 것 같은 생생함이 담겨있다.
유키 소메이 <금강산>
도쿠다 교쿠류 <금강산>
제3부 ‘근대인의 일상’은 조선의 일상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을 모은 부분이다. 일제강점기의 조선과 일본 화가들은 미술가이기 이전에 급변하게 근대화되는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는 지식인이기도 했다. 이들의 이와 같은 의식은 그림 속에 투영돼 나타나는데, 어쩔 도리 없이 외세에 의존해 조선이라는 정체된 왕조에서 모던한 세계로 이행되는 조선의 과도기적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부산한 시장 풍경, 근면한 조선 여인들의 모습, 광산 등에서 일하는 조선인 모습 등은 슬픈 식민지 시대의 표상들이다.
야마구치 호슌(山口蓬春)의 <시장>은 조선의 시장 풍경과 일본화의 기교가 만나 이루어낸 일제강점기 최고의 미술 작품 중의 하나이다. 또한 미나미 군조(南薰造)의 <강변의 집>은 당시 조선인의 삶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 중의 하나로 손꼽을 만하다.
미나미 군조 <강변의 집>
이 시대의 ‘모던’이라는 것은 자생적 개념이 아니라 먼저 서양화된 일본을 통해 서양을 배우려는 것이었다. 이런 모던 의식은 근대화의 물결과 함께 박람회 등을 통한 급격한 도시화와 더불어 당시 급격히 늘어난 일본 유학생을 통해 형성됐다. 오카다 사부로스케(岡田三郞助)의 <조선 부인>은 전통 복장을 하고 있지만 손에 든 수첩에서 모던을 기대하는 여인의 성향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이인성의 <노란 옷을 입은 여인>과 대비되며 당시 여인네들의 삶의 지향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카다 사부로스케 <조선 부인> 이인성 <노란 옷 입은 여인>
5
4부는 ‘그룹 활동과 사제 관계’는 당시 조선에서 전개된 교육 활동과 그룹 활동이 만들어 낸 결과물들을 모아 소개하는 코너로 어떤 의미에서 당시 한일교류를 집어볼 수 있는 핵심에 해당돼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더욱이 그동안 이름만 전하던 식민지 조선의 미술교육을 담당했던 인물들 가운데 실제 작품이 상당수 발굴돼 일제강점기 미술사를 체계적으로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있다.
서화협회를 담당했던 안중식, 고희동을 비롯해 경성에서 화숙(畵塾)을 경영한 시미즈 도운(淸水東雲), 조선 최초의 서양화 강습소를 세웠던 야마모토 바이카이(山本梅涯), 조선남화원(朝鮮南畵院)의 구보타 텐난(久保田天南) 등의 활동은 비록 정규 학교교육은 아니었지만 조선 근대미술교육의 한 축을 담당한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이들 가운데 이름만 전할 뿐 작품은 확인할 수 없었던 야마모토 바이카이, 구보타 텐난 등의 작품이 공개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야마모토 바이가이 <눈 내린 풍경>
당시 식민지의 미술 교육을 담당했던 중등학교 교원은 주로 도쿄미술학교 출신들이 맡아 활동했다. 이들은 경성1고보, 경성2고보, 경성사범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경성제1고보에는 히요시 마모루(日吉守), 경성제2고보는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와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 그리고 경성사범학교에서는 후쿠다 요시노스케(福田義之助)와 고안키 마사미(小牧正美) 등이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야마다 신이치, 사토 구니오, 고안키 마사미 등의 작품이 처음으로 출품돼 장욱진, 이대원, 유영국 등을 배출한 사토 구니오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손일봉, 이봉상 등을 배출한 경성사범학교의 미술교육 분위기를 추론할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토 구니오 <자화상>
이대원 <정(庭)>
6
제5부 ‘에필로그’는 해방 이전부터 활동했던 한일 미술가들의 해방 이후의 활동을 담고 있다. 주로 일본에서 공부한 조선인 화가들의 귀국 후의 활동과 패전후 조선에서 일본으로 쫓겨간 일본인 화가들의 모습에 포커스를 맞춘 코너이다.
일제강점기를 살아온 조선인 화가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 유영국 등은 해방 후 조선의 대표적인 근대 작가로서 자리 매김하였으나, 이쾌대, 김용준 등 재능있는 화가들은 다시 남과 북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싸여 월북의 길을 걷게 된다. 반대로 일본에 남은 전화황, 조양규 등 재일본 조선인화가들은 과거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 화가들과 유사한 삶을 살게 된다.
이중섭 <길 떠나는 가족>
이쾌대 <자화상>
한편 조선에서 화가로서 큰 명성을 누렸던 야마다 신이치(山田新一), 히요시 마모루(日吉守), 가토 쇼린(加藤松林), 미키 히로무(三木弘) 등은 고국으로 돌아가 활동을 재개하지만 조선에서의 이력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미술계에서 하나 둘 사라지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의 성공을 위해 조선에 왔던 이들은 그들이 충성하였던 조국에 귀환해 오히려 식민지 조선에서의 삶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아이러니컬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이들 중 한 사람인 가토 쇼린이 일본에 돌아가서도 여전히 조선을 소재로 한 그림만 그리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은 일본인으로 태어나 조선에 왔지만 다시 일본인으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은 운명을 가진 이들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키 히로무 <물 긷기>
본래 이 전시는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조선과 일본의 화가들이 조선을 어떻게 그렸는지를 소개하면서 이들의 상호작용을 살펴보려는데 초점을 맞춘 전시였다. 그러나 조선을 그린 작품을 수집하다보니 조선화가의 것보다 일본화가의 그림이 압도적으로 많고, 교육 역시 일본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식민지 상황이라서 둘 사이의 상호 작용을 따지기는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일본인들이 조선을 어떻게 미술적으로 해석했는가와 조선인 화가들이 어떻게 일본에서 공부했는지에 살펴보는 전시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본래의 의도와는 별개로 정말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실망할 일은 아니다. 우열을 가리기 위한 조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의 문호가 개방돼 일제 강점에 이르고 해방이 될 때까지 우리 미술사가 어떻게 구성, 발전돼 왔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식민지 치하라는 힘든 상황 속에서 조선 미술을 견지해 온 근대 화가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할 부분도 많다는 생각이다.
이제 우리는 근대 미술에 대한 새로운 연구에 발을 들여야 할 것이다. 일제강점기 우리 근대 미술가들은 어떻게 공부했으며, 이들은 누구에게 배웠는지 실상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제 간의 사승 관계가 분명해질 때 이들 작품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추사 김정희 문집에 실린 글 중 상당수가 김정희가 스승의 글을 베껴 놓은 것임을 나중에 알게 된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를 걸러내고도 김정희의 예술과 학문이 충분히 위대하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반일, 친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예술의 본질을 바라보아야 한다. 비록 이 전시가 일본 주도에 의해 기획된 일이기는 하지만 기초 자료가 수집되고 있고 또 연구도 축적돼가는 중이므로 연구의 반은 시작된 셈이다. 근대미술관 하나 없는 현실에서 이런 정도의 기반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자체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년에 걸쳐 기획된 이 전시가 최근 한일에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불협화음 그리고 친일 문제의 발생 가능성 등의 이유로 예정과 달리 한국 전시를 취소했다는 사실은 정말 아쉬운 일이다. 일본 화가의 그림 중 상당수는 조선의 전통과 풍속이 좋아서 그리고 금강산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그림으로 남긴 것들이다. 이들의 마음속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인 손길을 찾기는 쉽지 않다. 예술이라는 정서는 전쟁도, 이데올로기도 막을 수 없는 위대한 힘이 있다는 사실은 관계 인사들이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전시의 성격에 따라 여기서도 한국 대신 ‘조선’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 참고로 이 전시는 가나가와 현립근대미술관(新奈川縣立近代美術館) 하야마(葉山) 분관 전시를 포함해 10개월 동안 일본내 5개 미술관에 순회 전시될 예정이다. 일정은 다음과 같다.
1. 가나가와 현립근대미술관 하야마(新奈川縣立近代美術館 葉山): 2015.4.4-5.18
2. 니가타 현립반다이지마 미술관(新潟県立万代島近代美術館): 2015.5.16-6.28
3. 기후현 미술관(岐阜縣美術館): 2015.7.9.-8.23
4. 홋카이도 도립근대미술관(北海道立近代美術館): 2015.9.1.-10.12
5. 미야코노 시립미술관(都城市立美術館): 2015.10.23.-10.6
6. 후쿠오카 아시아미술관(福岡アジア美術館): 2015년12.17-201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