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시 명 : 양순실 전
전시기간 : 2015.4.13.-5.25
전시장소 : 서울 갤러리 숨
글 : 박영택 (경기대학교교수, 미술평론가)
양순실의 그림은 문학적인 그림, 도상을 이용해 서사를 전개하는 일종의 텍스트 같은 그림이다. 다분히 비의적이고 내밀한 상징들로 수놓은 이미지 텍스트! 따라서 그는 도상을 뒤섞어놓아 이야기를 기술한다. 화려한 목단꽃 밑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그 주변에 피어나는 꽃(상사초, 목단)과 새(벌새)는 살아있는 생명체, 언젠가는 소멸해가는 존재이자 수시로 자신에 관여하는 존재이다. 흩날리는 작은 꽃잎들은 쓸쓸함과 덧없음을 안긴다.
수시로 등장하는 해골의 도상은 당연히 죽음, 부재의 은유다. 삶은 저마다 다양하게 전개되고 그들이 맞이하는 죽음도 제각기지만 그 결과는 잔인할 정도로 평등하다. 오직 뼈로 남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평등하고 민주적인 것으로 뼈만한 것이 없다. 살은 뼈 없듯이 살았지만 뼈는 한시도 그 살을 저버린 적이 없다. 죽음에 이르러서야 살들은 오직 저 안쪽에 돌처럼 박혀있던 뼈의 은자적 존재를 생각한다. 뼈로 남은 결정인 해골은 어딘가를 응시하는, 움푹 들어간 텅 빈 눈동자, 그 빈자리를 슬프게 떠올려준다.
In theshade-mercy, 캔버스에 아크릴, 2014
삶은 저렇게 해골로 귀착되는 덧없는 일이겠지만 산 자들은 결코 자신이 해골로 남게 되리라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 그래서 삶에서 가능한 한 죽음을, 해골을 멀리한다. 그러니 해골을 가까이하는 이들은 삶 안에 죽음을 기꺼이 껴안으려는 자들이다. 작가는 항상 우리를 보는, 정면상의 해골을 등장시킨다. 죽음이 우리를 늘상 지켜보고 있다!
또한 중력의 법칙, 시간과 온도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지고 녹아 흐르는 케이크 역시 덧없는 삶의 은유다. 휘날리는 꽃잎과 동일한 내용이다. 모든 좋았던 순간은 이내 사라져버린다. 텅 빈 케이크, 달콤한 초콜릿은 죄다 녹아 물처럼, 폭포처럼 흐른다. 한편 그림에서 빈번하게 보이는 이 유동성, 액체성은 촉각성을 자극한다. 끈적거리며 농밀한 상태에서 죽죽 흘러내리는 듯한 물감(흘러내리듯이 묘사한)은 감정의 분출을 인상적으로 가시화한다.
나로서는 목단이 가득한 화면 하단에 해골 하나가 자리한 작업이 좋았다. 그래픽적인 도상의 힘과 장식성, 이미지의 힘이 돋보이는 작업이다. 민화와 문자도, 산수화 등 전통미술의 형식을 차용한 근작들은 그 도상들이 지니고 있는 문맥을 활용해 자신의 현실적 삶에서 연유한 메시지를 삽입시키고 있다.
전통미술의 도상들은 모두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차원을 지닌 이미지, 문자들의 체계다. 그것들은 비가시적인 것들의 외화이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는 통로다. 작가가 끌어들인 문자(문자도)는 조선시대의 유교적 가치와 철저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 차원에서 기능하던 것들이다. 그것은 남성의 종속적 존재로 여겨졌던 여성들의 삶을 제한하고 규정짓는 틀이자 금기들의 명문화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 문자도에 개입한다. 그 전통적 가치에 균열을 내고 다른 사유의 통로를 벌려놓는다. 여기서 전통 이미지라는 텍스트들은 고유한 의미를 발현하는 오리지널리티로서의 권위를 지닌 것이라기보다는 원본의 무게가 탈각된, 언제든지 인용하고 조합할 수 있는 수많은 텍스트들 중의 하나로 기능한다. 작가에 의해 조작 가능한 수많은 기표들로 다루어지고 서로는 자유롭게 접합되고 연쇄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목단 꽃 아래 덩그러니 해골 하나가 놓여있다, 웃는 듯, 엄한 듯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이다. 사실 해골은 표정이 없다. 표정을 가능케 하는, 심리를 전달하는 근육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 꿈들은 죄다 사라졌다. 죽음 앞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음을 가까이 느끼며 바르게 사는 것을 장자는 ‘근사지심(近死之心)’이라고 하였다. 인
간은 늘상 삶 속에서 죽음을 의식하며 산다. 삶에서 죽음을 외면하거나 지워낼 수는 없다. 삶 속에 이미 죽음이 저장되어 있기에 그렇다. 따라서 삶을 생각하는 이는 당연히 죽음을 사유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라는 질문은 곧바로 어떻게 죽어야 하는 가와 동일한 물음이 된다. 죽음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이를 내면화할 수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 덜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존재하는 것은 삶과 죽음의 특정한 조합으로 이뤄진 ‘형이상학적 합성물’이다.
내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내 삶에 끝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인생에 관한 심오하고 근원적인 진리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막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다. 이처럼 인간은 죽음을 사유하는 존재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지레 내다봄으로써 죽음을 사유하고, 그럼으로써 항시 죽음을 자신 속에 간직하고, 드디어는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양순실의 근작은 그 죽음에 대한 인식의 폭이 두텁고 깊어 보인다. 삶의 애환이나 상처의 피상적인 반영이 아니라 근원적인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이 근작에서 어른거린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러한 주제보다도 실은 그림 자체의 밀도와 시선을 사로잡는 도상의 힘이 돋보인다는 점이 더 중요해 보인다. 전통사회에서 기능했던 도상들의 체계를 빌어 그 문맥에 자신의 현재적 삶의 의미를 개입하는 한편 문자와 이미지, 과거와 현재, 전통과 현대를 결합해 놓는 화려한 연출로 이루어진 회화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