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기간 : 2015.4.8.-4.20
전시장소 : 서울 갤러리 가이아
글 :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김진숙은 산책자가 되어 강철과 유리로 빛나는 도시를 소요한다. 문득 건물의 창과 빛나는 물질에 표면에 비춰진, 포착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도시공간은 자신의 모습을 수시로 받아주고 내뱉고 비춰주기를 반복한다. 그러자 이 기이한 통로, 창문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가로질러 놓여있는 다리 같다. 자신의 시선 앞에서 갑자기 이곳과 저곳이 동시에 겹쳐지는 장면은 환각처럼 다가온다. 여러 겹의 창과 투명한 물질과 조명과 빛의 어지러운 혼재 속에서 찰나적으로 ‘나’를 발견한다. 문득 유리에 반사된 자신의 이미지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데 그 모습은 나로부터 소외된 낯선 형상이다. 나는 내게서 분리되어 저기 유동하는 이미지로, 허상으로 흔들린다. 도시공간을 유령처럼 떠돌면서 순간순간 접하게 되는 나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공간과 시간 속을 흘러 다니는 저 육체는, 지금 이 순간은 무엇일까? 나는 창을 통해서만, 반사면을 통해서만 그 세계를 본다.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이미지는 왜곡되고 흐르고 유동한다. 몽환적이면서도 애매한 상들이 몽롱하게 유동하는 장면 앞에서 작가는 무의식중에 자아를 접한다.
김진숙, Liquid Memory, 캔버스에 아크릴, 117x91cm,2014
김진숙의 그림은 거울에 비춰 투사된 영상의 추적이다. 그러니까 도시경험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정한 도시 공간, 장소를 재현한 것이 아니다. 작가는 도시공간 속에서 경험된 자신의 감정, 몸의 감각을 그리기로 구현한다. 그 그리기의 방법론은 반사되는 이미지, 빛의 중첩, 공간의 겹침, 여러 시간의 누적, 순간순간의 감정과 기억의 고임을 층층이 쌓는 작업이다.
그래서 화면은 수없이 잘게 쪼개진 색 면으로 차오르고 몇 겹의 판으로 중복된다. 날카로운 선으로 분할된다. 마치 한 판 한 판 쌓아 올려가는 판화적 방법론을 연상시키는 그리기다. 각각의 한 판(색 면)은 매 순간의 시간, 기억, 감정과 등가물이다. 명암의 강렬한 대조와 보색대비, 유사 색상의 계조적 흐름과 연계 등이 섬세하게 조율된 화면은 매혹적인 색채의 세계로 수놓아진 운율적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그림은 도시의 거침없는 속도감, 흐르는 시간의 유동성, 매 순간 사라지기를 거듭하는 체험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그림이기도 하다. 그 어지러운 공간 속에서 문득 자신을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단편적인 편린들이 얽혀있다. 총체성은 사라지고 명료성과 확고함은 부재하다. 모든 것은 유동적이다. 이미지는 반사된다. 그것이 도시의 본질이다. 도시는 ‘빛과 자아도취로 되어 있는 거울의 도시’다.
작가는 자신을 투명하게 비추는 유리, 거울이 자기 자신을 특별하게 보여주는 것들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 기억, 흔적, 시간이 쌓인 것들이기에 흥미롭다. 작가는 도시공간에서 경험한 것을 ‘사후적’으로 기억해 그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고 기억을 정리하며 그 삶의 동선, 생을 반추한다. 그러는 과정에 그때의 모든 지각들이 그림으로 풀려나온다. 특정 공간에서의 현재의 경험은 과거의 경험과 겹쳐지고 사후에 기억하는 과정에 현재의 감정이 다시 간섭한다.
즉각적이고 기대하지 않았던 현재의 순간이 과거의 충격과 사건에 대한 재빠른 인식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이는 벤야민의 이른바 변증법적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현재를 통해 과거를 멀리서 보기나 현재를 통해 과거를 걸러내기’를 시도한다. 이때 과거의 의미는 과거와 현재가 만들어내는 특별한 구도에 의해 규정된다. 그림 속의 장면은 기억의 순간들이자 자신과 타인이 공유했던, 그러나 서로 다른 기억들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점차 왜곡의 과정을 겪는다. 결국 지난 시간, 공간에 대한 기억이 작업의 핵심이다.
작가는 “기억 속 시간들의 흔적을 색이 있는 형상으로, 밑의 흔적들이 투영되게 차곡차곡 쌓아 올리면서”(작가노트) 그 순간을 기록하고자 한다. 한때의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