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소 : 서울 통의동 스페이스 15번지
전시기간 : 2015.3.19.~3.28
글 : 조은정(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
손안의 핸드폰이 사라진 순간 혼비백산(魂飛魄散)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언제든지 “내가 돈이 필요해”라는 문자만 날려도 도움의 손길을 건네줄 이들의 명단이 저장되어 있다. 또한 내일 무슨 주제의 회의가 몇 시에 있는지, 홈쇼핑의 아이디와 패스워드가 무엇인지 그리고 은행거래 인증서까지. 게다가 가끔씩 꺼내보며 미소 짓는 행복하지만 내밀한 가족의 모습들도 그곳에는 차곡차곡 저장되어 있다. 스마트폰은 이제 현대인의 일상적 용도를 넘어선 위치에 있다.
폴 리(Paul Lee)는 스마트폰을 위한 스피커를 제작하였다. 이미 용도를 다한 허접한 박스로 만든 스마트폰용 스피커는 에디슨이 발명하였다는 축음기 모습을 띠고 있기도 하고 오래된 트랜지스터 라디오 모습일 때도 있고 선물상자, 심지어 백 팩의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한다. 첨단 소재와 기술로 만든 스마트폰이 인류 역사와 함께 한 종이, 그것도 값싸고 다른 물건을 위한 포장용도였던 골판지 박스를 이용한 단순해 보이는 기구 안에서 소리를 낸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지닌 디지털 음색이 종이박스의 스피커를 통해서는 지직거리지만 부드럽게 울려 퍼졌던 아날로그 소리를 내는 현상을 만난다. 이 오묘한 융합의 지점에서 과학을 넘는 단순 기술의 즐거움, 유희로서의 예술과 테크닉이 만나는 아주 오래된 미술의 개념을 확인하게 된다.
같은 형태가 나타날 수 없는 수공의 과정을 지나 제작된 개개의 스피커는 현대 사회 인간의 존재성을 되새기게 하는 장치가 된다. 플라스틱 수도관을 통하여 확성기와 연결된 스마트폰은 인체를 상상케 하는 패티시즘적인 면도 있다. 태국의 레지던시 공간에서는 현지에서 구한 종이박스로 등에 매는 가방을 만들었다. 가방은 외부의 포켓에 스마트폰을 넣으면 옆쪽의 역시 종이로 만든 스피커로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백 팩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노라면 떠돌이 방랑자, 음유시인 등의 노마드적 삶이 연상된다.
기계는 더 이상 기계가 아니며 스마트폰도 같은 메이커에 형태가 같다고 해도 결코 더 이상 같은 스마트폰이 아니다. 똑같은 외형의 기기이어도 사용하는 앱과 저장된 데이터의 다름으로 인해 결코 같지 않은 스마트폰은 그것의 소유자 개인의 삶을 반영한다. 다른 스마트폰과 함께 비교할 때 더욱 그러한 인격성은 두드러진다. 스마트폰이 허접한 박스 스피커 안에서 진동할 때, 우리는 개개인의 목소리와 발언을 상기하게 된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보여주는 넓은 세상은 삼성 혹은 애플, 엘지가 거의 독점한 최첨단의 시장이다. 전시제목이 인 것은 스피커를 종이로 만들었다는 의미에서기도 하지만, 뉴스에 등장하는 페이퍼 컴퍼니가 자본의 어두운 얼굴인 것을 드러내는 장치인 것이다. 자본의 게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ant’라는 영어 단어로 그려낸 애플사의 로고와 은하수(갤럭시)에서 더욱 극명히 드러난다. 주식투자에서 ‘개미’는 정말 열심히 일하여 투자하지만 결코 많은 것을 차지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개미에 의해 사과는 형태가 만들어지고 은하도 만들어진다는 작가의 블랙유머가 소박한 드로잉에 나타나 있다.
종이로 만든 기타로 연주한 음악이 얼마나 감미로울 수 있는지, 허접한 종이를 말아서 꽃피운 나팔꽃을 통해 비져 나오는 음악이 얼마나 낭만적일 수 있는지는 들어보아야 안다. 하지만 내 손 안의 핸드폰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부품을 위하여 공장의 노동자들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며, 노동시간에 비하여 항상 임금이 비례하여온 것은 아니었으며, 그들 모두가 안전한 환경에서 일하지도 못하였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시간 어딘가에서 새로운 스마트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적지 않은 수의 젊은이들이 졸음과 싸워가며 편의점의 밤을 지키고 있다는 것도.
앤디워홀의 ‘팩토리’는 예술을 원하는 이들에게 보급하는 시스템으로서의 미술을 보여주었다. 폴 리는 자신의 작품을 ‘Paper Company’로 직접화법을 선택하여 은유를 실현한다. 세상에 많은 Paul Lee가 있고 미술가로 이름을 알린 이도 있지만, 우리 눈앞의 그는 자신을 익명화한다. 거대한 서양미술사의 흐름에 경도되었던 대학원의 어떤 강의시간에 자신의 작품을 슬쩍 외국인의 이름을 얹어 논의하던 그 짜릿함이 이름에는 스며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 Paul Lee는 깊은 상처의 증거이기도 하다. 조각을 전공하는 이가 폴리코트를 내려놓고 비물질의 세계를 가시화하는 소리작업과 드로잉의 세계에 침잠하였을 때 그를 전공의 벽을 넘는 이가 겪는 가시로부터 은폐시켜준 안락함의 방어막이, 날카로운 비평의 칼 앞에 서양인인지 동양인인지 가늠할 수 없음으로 인해 칼날을 막아주었던 방패가 폴 리라는 이름자라니.(*)